우신연이 시대 읽기 – 갈라진 시대, 편드는 예수

경동현 우리 신학 연구소 소장

갈라진 시대, 편드는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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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 미사, 2013, 어슬렁

중립과 선택 사이에서

우리는 오늘 갈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 서울 한복판에서는 쌍용차 해고자 복직을 위해 사제들의 거리 미사가 매일 봉헌되고 있다. 평택, 울산, 밀양, 인천 등 전국 각지의 갈등 현장에서 천주교 사제와 수도자, 신도들이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의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연대하면서 정부나 사용자 측과 대립하는 모습들을 본다. 나아가 사회 현실에 참여하는 신앙인들을 보면서 못마땅해 하거나 이들과 갈등하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들도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이러한 갈등의 상황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대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 스스로 겪고 있거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어느 한 쪽을 택할 것인가 혹은 언제나 중립인 채로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공정해야 한다. 양쪽의 이야기를 다 들어야 한다. 항상 양쪽 모두에 옳고 그른 점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대화를 통하여 오해와 잘못된 개념을 가려내게 한다면 갈등은 해소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매우 그리스도인답게 여겨진다. 불순한 의도 없이 공정함과 정의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화해가 절대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경우는 사적인 싸움으로서 두 사람이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며 시비에 가까운 논쟁을 벌이고 근본적으로는 오해에서 갈등이 비롯되는 경우이다. 그러나 모든 갈등이 다 사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갈등은 한편이 옳고 다른 한편이 그르며, 한편이 공정치 못하고 억압적이며 다른 한편이 불의와 억압으로 고통 받는 것이다. 이런 경우 화해를 빙자하여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일치를 추구하고 모든 논쟁에서 중간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인식은 긴장과 갈등이 불의와 억압보다 더 나쁜 악이라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이 가정은 억압에 시달리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부족에서 생기는 마음이다. 따라서 모든 갈등 속에서 집요하게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압자와 한편에 서는 행위라고 하겠다.

진정한 화해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갈등을 부추기는 세력일까? 화해의 방법은 없는가? 성서는 참 화해가 무엇이라고 말할까?

유대민족의 역사는 한마디로 이교 국가와의 갈등의 역사라 하겠다. 이 갈등과 대립은 단순히 하느님이 격려한 것일 뿐 아니라 유대민족에게 불의와 독재와 타락에 대항하여 싸우라고 하느님 자신이 끊임없이 명령한 것이다. 유대민족이 저지른 가장 큰 죄악중의 하나는 그들을 억압하는 이교민족과 화해하려고 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평화, 평화’라고 외쳤을 때에 예언자 예레미야는 변화와 회개 없이 어떠한 평화도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예레 14,13; 6,14).

많은 사람들은 신약에서 예수가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전해주고자 하였던 것들 중 하나는 물론 평화이며 그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이는 복되다’고까지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마태오(10,34-36)나 루가복음(12,51-53)에 나타난 예수의 또 다른 중대한 가르침을 배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는 분열과 갈등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결코 불의와 타협할 수 없는 그 자신의 사명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자 사이에 분열과 갈등을 일으켰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바리사이파와 죄인들의 갈등 속에서 바리사이인들에 대항하여 창녀, 세리들과 어울렸다. 그리고 부자와 가난한 이들간의 갈등에서도 예수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였다. 예수는 양편을 똑같이 고르게 대하지 않았으며 그들 사이에 있는 오해를 극복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뚜렷이 갈등과 대립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는가?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예수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평화와 세상이 원하는 평화를 명백히 구분하였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평화는 진리와 정의, 사랑에 뿌리내린 평화이다. 세상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평화는 진리를 왜곡하고 교묘하게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불의를 감추고 있는 피상적인 평화요 일치인 것이다. 예수는 이 잘못된 평화를 부수고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갈등과 대립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기조차 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평화와 협상을 구분하고 있다. 협상은 도둑과 살인자 사이에도 가능하지만 진정한 평화는 진정한 사랑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이다.

원수를 사랑하기

이제 우리는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우리에게 원수가 있다는 것, 그들이 진정으로 우리의 원수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계명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우리가 그들과의 대립이나 갈등을 피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유혹은, 가장 위대한 사랑의 행위가 불의의 권좌에 앉아 있는 이들을 하나씩 회개시켜 제도나 체제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변화는 실제적으로 그런 방법으로 오지 않는다. 권좌가 남아 있는 한 항상 그 자리는 다른 이들로 채워질 것이고 억압은 그대로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는 가장 효과적인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우리의 원수로 만드는 체제를 없애기 위하여 행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사랑과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 편에 함께하며 불의한 부자와 권력가들에 대항하는 것이다.

갑을 사회의 생얼을 매일 확인하고 있고, 가진 자들의 낯 뜨거운 조세 회피, 고위 공직자들의 선거개입과 원전 비리 등의 각종 스캔들, 5.18이 북의 소행이라고 말해도 아무 문제없이 지낼 수 있는 나라에서 멀리 서서 판단만 일삼지 않고, 싸움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유일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결단은 내려져야 한다. 한쪽에 서야하는 것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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