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진화는 양립할 수 있다

맹영선 (수도자신학원 강사)

오랜만에 ‘창조과학’이라는 해묵은 논의가 사회문제로 다시 떠올랐다. 그 발단은 한국창조과학회 이사로 활동했다는 새 정부의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 때문이다. 결국 그는 자진 사퇴했지만, 청문회에서 “창조론을 신앙적으로는 믿고 있지만, 과학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다”라고 언급함으로써, 어떻게 ‘믿음(belief)’이 때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 후보자뿐만 아니라 내 주위의 많은 사람이 이렇게 종교와 과학이라는 두 세계를 왔다 갔다 하며 사는 것 같다. 나 역시 오래전 그 두 세계를 왔다 갔다 했다.

그 당시 누구도 교회에서 가르치는 ‘창조론’과 학교에서 배우는 ‘진화론’을 통합시켜주지 않았다. 나 스스로 그것들을 공부하고 통합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만일 그렇게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학교에서는 진화론을, 교회에서는 창조론을 믿는다고 했을지 모른다. 원고청탁을 받고 이렇게 창조과학에 대한 글을 쓰지만, 이들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진화 개념은 그리스도교와 관계가 전혀 없는, 무시해도 상관이 없는 과학이론 이상의 것임은 분명하다. 나는 창조과학보다 오히려 진화론적 유신론에 더 많은 관심이 있지만, 여기서는 창조론과 그 대척점에 있는 과학적 유물론만을 간단히 살펴보려 한다.

 

믿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는 ‘고집이 센 뇌’

우리는 무엇인가를 믿고자 하는 성향과 믿는 능력을 갖고 태어났지만, 사실 어떤 특정한 것에 대한 믿음을 갖고 태어나지는 않는다. 우리는 학습을 통해 어떤 하나의 믿음 체계를 갖게 되고,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그것은 믿음의 무의식적 토대가 된다.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뇌의 기억회로에 기록된 유년의 믿음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자신의 믿음을 버리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지만, 새로운 생각과 체험, 훈련을 통해 예전의 믿음 체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생물학적 능력(신경 가소성(neural plasticity)에 의해)을 인간은 분명히 갖고 있다.

문제는 믿음이 스스로를 유지하려는 경향성(傾向性)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믿음’의 힘은 정말 강력하다. 일단 한번 믿음이 형성되면, 그에 상반되는 증거가 나타나도, 대부분 우리는 그 믿음을 의심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일단 신경학적으로 믿음의 틀이 형성되면, ‘고집이 센 뇌’는 그 믿음에 상반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뇌는 이미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않을지 결정하는 작업을 끝냈다. 신경회로는 이미 만들어졌고, 우리는 각자의 판단을 믿는다.

우리 시대 뇌과학은 우리가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보며, 결국 우리는 자신이 선택한 정보만 의식할 수 있다고 알려준다. 그러니까 무엇을 의식(意識)하려면 선택(選擇)이 필수라는 것이다. 특히 ‘종교 체험’을 한 뇌는, 그 체험을 현실로 지각한다. 종교적 ‘신앙(faith)’이란 정말 특별한 형태의 믿음이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신앙을 “이론상 여전히 의심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믿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내가 사는 이 세계를 정말 제대로 보려면, 내가 믿고 싶은 것만 골라서 믿어서는 안 된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

사실 우리 삶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믿음은 어떤 가정(假定)에서 시작한다. 그리스도교는 ‘창조주 하느님이 우리 세계와 인간을 창조했다’는 가정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진화론뿐만 아니라 진화론에 기초한 많은 학문들, 특히 인지과학, 진화심리학과 인지종교학 등은 이 가정을 뒤집는다. 즉 ‘우리 우주는 빅뱅(Big Bang)에 의해 생성되었고, 그로부터 지구와 생명이 나타났고, 마침내 인간이 등장했으며, 그 인간의 마음이 신(神)이나 종교 개념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화론이 그리스도교에 도전장을 던졌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런 진화론에 대해 그리스도교는 상당히 다양한 반응을 나타냈고, 결국 창조론과 진화론의 문제는 특별히 논쟁적인 주제가 되었다.

진화론은 인간을 생명 세계의 정점에서 추락시켰고, 그리스도교의 신(神) 존재 가설을 무력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어떤 면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우주에 대한 해석, 즉 창조론과 전혀 양립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특히 창조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진화론이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인 인간을 다른 생물과 같은 위치로 끌어내린다고 이해하기 때문인 듯싶다. 그러나 인간의 진화에 대한 증거는 너무 압도적이다.

종교적 믿음과 과학적 증거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훈련을 하려면 과학적 자세와 접근이 필요하다. 과학은 기본적으로 모순된 것의 양립을 허용하지 않으며, 잘못된 지식은 폐기한다. 벌허스 스키너(Burrhus Frederic Skinner)는 “과학은 사실이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를 경우라 하더라도,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다”라고 했다.

현대 과학은 우리 우주가 138억 년 전 빅뱅으로 시작되었고, 46억 년 전 태양계가 형성되었으며, 지구 나이는 45억 4,000만 년 정도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결과는 여러 분야의 수많은 과학적 연구가 축적되어 얻어낸 것이다. 천문학, 물리학과 화학은 입자의 진화, 별의 진화와 화학적 진화에 대한 증거를 제공했으며, 진화생물학(Evolutionary Biology)은 생물학적 진화에 대한 상당히 많은 물적 증거를 보여주었다.

인간의 진화에 대해서는 아직도 아는 것보다 알아야 할 것이 훨씬 더 많지만, 분자생물학(Molecular biology)은 유인원이 우리 조상이 아니라 우리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는 점을 확인해주었고, 비교생물학(Comparative biology)은 현대 인류와 현대 침팬지의 유전적 간격은 좁지만 행동적·해부학적 간격은 넓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사실 인간의 조상은 인간도 침팬지도 아닌, 단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전념했던 생물이었을 뿐이다. 그들 중 일부는 멸종했고, 남은 일부가 인간으로 진화한 것이다.

현대 과학의 결론은 인간은 우주 진화 과정의 일부라는 것이다. 빅뱅으로 탄생한 우리 우주는 입자의 진화, 별의 진화, 화학적 진화, 생물학적 진화, 인간의 진화로 계속 진화 중이다. 엄청난 시간 척도에서 일어나는, 현재에도 진행 중인 거대한 우주의 진화 과정에서 인간은 등장했고, 진화하는 이 우주에서 인간은 태어나 살다가 죽는다. 인간 각 개인의 삶을 상당 부분을 결정하는 유전자(gene) 역시 진화의 산물이다.

 

진화론에 대한 반응

진화론에 대한 반응은 상당히 다양하지만, 크게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또한 각 그룹은 상당히 세분되지만, 여기서는 지면상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신을 믿지 않는 과학적 유물론

첫째, 진화하는 우주를 믿지만 신 존재는 전혀 믿지 않는 ‘과학적 유물론(Scientific materialism)’ 또는 과학주의(Scientism)가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과학이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보고, 진화론을 무신론과 연결한다. 이들은 도덕적이기 위해서 굳이 신 존재를 주장하는 종교를 믿을 필요는 없으며, 과학자가 어떻게 하느님을 믿을 수 있는지 의문을 표한다.

다윈의 진화론이 전통적인 유신론에 반(反)한다고 생각한 토마스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이후로,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등이 그들의 무신론에 진화론이 잘 들어맞음을 발견했다. 매우 도전적인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우연과 자연선택으로 생명의 역사 속에 나타나는 모든 창조성(creativity)을 설명할 수 있다면, 굳이 신 개념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진화로써 인간 종(種)을 포함한 다양한 모든 생물 종의 역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다니엘 데닛(Daniel Dennett) 역시 진화는 의도와 목적이 없는 과정의 산물이며, 모든 정신적 사건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과학을 이성과 동일시하며, 신앙은 간혹 사회적으로 쓸모는 있지만 비이성적이라고 주장한다.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은 인간의 도덕성이 생존과 관계된 먼 초기 조상들의 행동에서 발전했다고 주장하면서, 윤리나 종교적 신념을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는 진화생물학이 인간의 모든 것을 설명해줄 수 있다고 확신하며, 윤리나 종교적 신념도 궁극적으로는 생물학적 지식으로 대치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화론을 거부하는 창조론

둘째, 역사적·과학적으로 성경만이 진실이라고 믿으면서 진화론을 거부하는 ‘창조론(Creationism)’이 있다. 이들은 믿음에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한 원칙적 권위를 성경에 둔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어떤 과학이론은 받아들이고, 어떤 과학이론은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특히 진화론을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그들은 진화와 신(神)은 절대 양립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처음 주장했던 것은 ‘젊은 지구 창조론’이다. 즉 ‘지구의 지형과 지층을 형성한 지질학적 대격변의 원인은 노아의 대홍수이며, 지구 나이는 6,000년에서 1만 년이고, 지구(사실상 우주)와 모든 생명체는 성경에 쓰인 대로 6일 만에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진화의 모든 가능성을 배제했고, 성경에는 절대 오류가 있을 수 없으므로 성경의 글자 하나하나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젊은 지구 창조론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문자 그대로의 성경 해석과 충돌하는 과학이론을 과학적 근거로써 반박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오래된 지구 창조론’, 즉 창조과학(Creation Science) 또는 과학적 창조주의(Scientific Creationism)다. 이들 역시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음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찾으려 했다. 이들은 성경의 창세기를 생명 창조에 대한 과학적 이론의 원천으로 제시하면서, 진화론보다 성경 본문이 생명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성경 본문이 제공할 수 있고, 지질학·생물학·고생물학 등의 과학적 자료에 더 잘 부합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들은 진화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증거의 결함에 초점을 맞추어, 화석기록에 틈새가 있음을 지적했다. 이들은 창조에 관한 성경의 설명을 현대과학과 융합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창조과학은 과학의 시험대를 통과하지 못했다. 과학자들은 과학적으로 성경은 부정확하고,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왜냐하면 창조과학은 자체-수정이라는 과학적 방법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 결과 동료-검토(peer-reviewed)를 받은 출판물을 발표한 적이 없고 검증과 연구의 대상이 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과학이론은 검증 가능한 예측을 해야 한다. 어떤 이론이 검증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과학이론이 아니다. 또한 우주의 시작이나 생명의 기원에 대한 현대 과학적 지식을 과학 이전 시대에 기록된 성경에 질문하는 것은, 성경의 본래 의도를 놓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에 질문을 잘못 던지면, 성경은 본래의 의도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창조과학이 무용지물이 되자 창조론 진영은 다시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고,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변형된 창조론(Modified Creationism)’, 즉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 ID)’다. 변형된 창조론은 대부분 현대과학 이론을 받아들이지만, 다윈주의 진화론과 화학적 진화이론만은 여전히 거부한다. 이들은 과학적 자료를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과학을 확장해 순수하게 지적 설계자를 가정하는 것이고, 그 설계자가 초월적 존재라고 주장한다. 법학 교수인 필립 존슨(Philip E. Johnson)의 『심판대의 다윈』 출간 후 관심을 끌기 시작한 지적 설계 운동은, 생화학자 마이클 베히(Michael Behe)와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윌리엄 뎀스키(William A. Dembski)에 의해 과학이론으로 포장되었다.

존슨은 진화론을 타당성 없는 과학이라고 비판하면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실은 ‘신의 개입’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고 보았다. 그는 과학적 유물론자들이 의도적으로 우연을 반(反)유신론적 원리로 끌어올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존슨이 진화론의 약점을 과장했다고 비판했으며, 신학자들은 존슨이 과학이론과 그 이론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자들의 철학적 입장을 적절하게 구별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베히는 자연에 있는 생물의 세포구조는 너무 복잡해서 절대로 자연선택을 통해서 진화할 수 없다고 하면서,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 개념을 주장했다. 그는 생화학계의 복잡성을 살펴보면 그 계들이 점진적 진화의 산물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부분 생물학자는 진화적 변화는 기존의 가용한 구성요소를 활용해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점진적인 진화를 통해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고 대응했다. 신학자들은 그가 진화적 설명을 배제해버림으로써 과학의 부족함을 채우는 신이라는 새로운 논의를 제기했다고 말했다.

치열한 논의 끝에 과학자들은 지적 설계 역시 과학이 아니며 창조과학과 같은 종교적인 전신(前身)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신도 믿으며 진화론을 수용한 유신론적 진화론

셋째, 진화하는 우주와 신 존재를 모두 믿으면서 진화론을 수용하는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 또는 ‘진화론적 창조론(Evolutionary Creationism)’이 있다. 이들은 과학으로부터 종교의 상호독립(Interdependence)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대화(Dialogue)와 통합(Integration) 그리고 긍정 확인(Conformation)의 입장까지 그 논의가 훨씬 다양하다. 이들은 전반적으로 ‘진화란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할 때 사용한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과학적 개념을 사용해 과학적 법칙에 어긋나지 않게 신이 현상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을 설명한다. “우주를 창조한 신은 자연법칙에 따라 우주가 작동하도록 설정했고, 신은 오랜 세월에 걸쳐 펼쳐지는 계속 창조(생물학적 진화 포함)를 세부 조정할 필요가 없으므로, 기적을 일으키면서 자연세계의 여기저기에 개입해 땜질을 하지는 않는다”고 보는 것이 ‘유신론적 진화론’이다. 결국 ‘유신론적 진화론’을 믿는 과학자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과학적 연구도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진화론과 양립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가톨릭 신학의 전반적 입장은 ‘진화론적 유신론’이다. 가톨릭 신학은 신의 창조성이 단순히 ‘태초’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작용한다는 교리를 강조한다. 결과적으로 ‘계속 진행되는 신의 창조’는 진화로 함축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진화과학은 창조교리와 양립할 수 있다. 가톨릭 신학은 적어도 진화론적 과학과 모순되지는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특히 예수회 사제인 고생물학자 떼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이 시도한 그리스도교와 진화의 통합은 20세기 후반의 가톨릭 신학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최근 몇몇 신학자는 철학자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의 과정철학에 기초한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을 가톨릭 신학에 끌어들였다. 이 신학은 상당히 진화론적이다. 그러나 아직도 어떤 신학자는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창조론의 입장에서 유신론적 신학 논의를 전개하고 있으며, 진화론적 개념에 대한 신학적 논의나 자연에 대한 신학적 성찰 역시 여전히 주변 문제다. 다행히 생태신학자는 계시와 육화, 구원이라는 신학적 주제를 조금씩 우주 진화의 맥락에서 성찰하고, 인간이라는 생물 종(種)이 지구공동체의 다른 생명체들과 생명의 그물로 엮여 있다는 생태학적 관계를 분명히 표현한다.

나는 우리 시대 신학자는 필연적으로 진화론의 신학적 함의를 찾아야만 하고, 진화하는 우주와 관계하시는 하느님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설명해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 신학자의 의무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진화론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굳이 분리할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진화론은 분명히 양립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자연관은 진화론과 통합되어야 한다. 진화론적 자연관과 그리스도교는 잘 어울린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라는 체계 역시 진화하는 우리 우주 안의 수많은 다른 체계처럼 걸림돌을 넘어서지 않으면 더는 진화할 수 없다.


맹영선. 식품화학과 생태신학을 공부했고, 토마스 베리의 『지구의 꿈』과 『우주이야기』, 찰스 커밍스의 『생태영성』을 번역했다.

참고문헌

토마스 베리, 『우주 이야기』, 맹영선 옮김(대화문화아카데미, 2010); 빅 히스토리 연구소, 『빅 히스토리: 138억 년 거대사 대백과사전』, 윤신영 등 옮김(사이언스북스, 2017) 참조.

리처드 도킨스의 책 참조. 『눈먼 시계공』, 과학세대 옮김(민음사, 1994); 『만들어진 신』, 이한음 옮김(김영사, 2007);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 김명남 옮김(김영사, 2012) 등

대니얼 데닛, 『주문을 깨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종교라는 주문에 사로잡혔는가?』, 김한영 옮김(동녘사이언스, 2010) 참조.

대니얼 데닛, 『주문을 깨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종교라는 주문에 사로잡혔는가?』, 김한영 옮김(동녘사이언스, 2010) 참조.

필립 존슨, 『심판대 위의 다윈』, 이수현 옮김(과학과예술, 1993); 『위기에 처한 이성』, 양성만 옮김(한국 IVP, 2000) 참조.

마이클 베히, 『다윈의 블랙박스』, 김창환 외 옮김(풀빛, 2001).

윌리엄 뎀스키, 『지적 설계』, 서울대학교 창조과학연구회 옮김(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2).

추가설명

다윈 이후 150년 동안 수많은 연구를 통해 등장한 현대진화론(Neo-Darwinism)은 다음과 같이 크게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진화는 일어난다. 둘째, 진화적 변화는 수천 년 혹은 수백만 년에 걸친 개체군의 점진적인 유전적 변화를 통해 일어난다. 셋째, 생명의 새로운 형태는 하나의 계통이 두 개로 갈라짐으로써 생긴다. 이 과정을 분화(differentiation)라고 한다. 넷째, 진화는 대부분 자연선택을 통해 일어난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지금도 계속 나타나고 있다. 진화의 증거는 어마어마하게 많다.

한스 큉 역시 진화론이 신(神)과 창조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진화론은 신이 이 세계의 위나 밖이 아닌 진화의 중심에 있으며, 창조와 진화는 서로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 창조가 진화를 가능하게 만들며, 인간은 유기적으로 전체 우주에 관계되어 있다고 말한다.: Has Küng, Does Godn Exist?, trans by Edward Quinn(Doubleday, 1980), p.347.

진화생물학의 진화 개념과 ‘태초의 창조(creatio originalis)’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하느님이 이 세계에 개입하면서 창조 행위를 하고 있다는 ‘계속 창조(creatio continua)’ 개념 사이의 관련성은 그리스도교 신학계의 아주 중요한 이슈이다. 많은 신학자와 철학자, 물리학자, 생물학자들이 진화생물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의 관계를 심각하게 연구하고 있다.

인간 유전자와 불과 몇 %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현생 유인원이나 다른 영장류들과 비교해보면, 우리는 그들과 정말 다르다. 인간은 왜 그렇게 다를까? 어떻게 그렇게 다르게 되었을까? 이것이 인간 진화의 핵심 질문이고, 결국 인간의 ‘의식(consciousness)’이라는 상당히 중요한 주제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 주제는 창조론 vs 진화론과 같이 다루기에는 너무 복잡하므로, 여기에서는 그에 대한 논의는 생각한다.

1650년, 제임스 어셔 대주교는 성경을 꼼꼼히 조사한 결과, 창세기 천지창조가 기원전 4004년 10월 22일 오후 6시경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 결과는 1701년 잉글랜드 성공회에서 발간된 영어권 성경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던 킹제임스버전(KJV) 성경에 공식적인 주석으로 채택되었다. 지구 나이를 6천~1만 년 정도로 보는 것은 여기에 뿌리를 둔다. 이것은 당시의 믿을 만한 과학적 자료를 최대한 활용해 얻은 결과이다.

문자적인 성경 해석을 바탕으로 한 ‘창조과학 운동’은 1900년대에 나타났다. 창조과학은 미국의 근본주의 개신교 교단인 ‘제칠일안식교 예수재림교회’(이하 안식교)에서 시작되었다. 안식교 이론가 조지 맥크레디 프라이스(George McCready Price)는 그의 저서에서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를 통하여 현재 지구의 지층 구조가 형성되었다는 이론, 노아의 홍수 이후 급격한 환경 변화와 신적인 개입이 동시에 작용하여 새로운 생물종이 나타났다는 이론을 전개했고, 이것은 지구 역사를 약 6,000년이라고 주장하는 ‘젊은 지구론’의 단초가 된다. 프라이스의 주장이 미국 개신교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근본주의 설교자 존 휫콤(John C. Whitcomb)과 프라이스의 대홍수 이론에 매료된 남침례교 출신 토목공학자 헨리 모리스(Henry M. Morris)가 공저한 「The Genesis Flood」가 1961년에 출판되면서부터이다. 이 책은 1980년대 중반까지 20만 부가 팔렸고, 창조과학은 근본주의 개신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에서 급속히 퍼지게 되었다. 개신교 근본주의는 성경의 권위와 진실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성경으로 현대 과학을 반박하며 지구와 생명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미국 복음주의 개신교계의 주류를 차지하는 근본주의자들에게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마크 A. 놀,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박세혁 옮김(IVP, 2010). 159-160쪽, 244-245쪽, 248쪽; Ronald L. Numbers. The Creationists: The Evolution of Scientific Creationism(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pp.3-4, 81-85, 192-194, 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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