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 vs Cool – 청년, 교회를 말한다 – 고은지

고은지

‘가톨릭 키드’에서 ‘커뮤니티 키드’로

나는 ‘가톨릭 키드’다. 초등학교 3학년 늦여름날, 엄마가 가면서 먹으라고 손에 쥐어준 딸기를 오물거리며 이십 분을 걸어 성당에 발을 들인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첫영성체를 받고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세례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성탄 아기별 잔치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구두닦이 역할을 맡아 제대 위를 누볐던 난, 교회 울타리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며 자라났다.

대학에 입학하며 중고등부 주일학교에 머물던 선후배들은 대개 자연스럽게 주일학교 교사, 전례단, 성가대, 청년성서모임 등 다양한 청년 단체로 안착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이십 대 초반에 청년 단체 활동을 하지 않았다. 교회 바깥에서 벌어지는 학내 분규 사태와 여러 사회 문제에 시선을 빼앗겼던 탓도 있지만, 미사 때마다 강론을 통해 들어 왔던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교리를 사회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고민되었기 때문이다. 교내 청년성서모임 개강 미사에서 주님의 기도를 암송하며 손을 맞잡았던 ‘미카엘 교수님’이 재단 이사 퇴진 문제를 해결할 때 대립각을 세우며 몸싸움을 하는 ‘원수’로 돌변했다. SOFA 협정에 반대하는 시위 현장에서 방패로 나를 떠밀며 위협하던 전경을 명동 성당에서 만난 적도 있었다. 만약 같은 본당에서 만났다면 청년 단체 활동에 참여하며 친해질 수도 있었으리라. 그들도 성호경을 그으며 내가 부르는 분과 같은 하느님께 기도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혼란스럽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팡질팡했지만, 그들에게도 나름의 고민과 두려움이 있다면 교회 안에서는 모두 위로 받길 바랐다. 그만큼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직분도 권위도 가면도 벗어버린 채 다른 입장과 생각을 아우르길 원했다. 다양성이 공존하고 사회의 때 묻은 시선에서 자유롭길 바라며 교회 안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청년 전례단, 청년성서모임, 청년 연합회를 두루 거치며 내가 품었던 기대도 차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청년 단체는 더 이상 안식처가 되지 못했다. 단체마다 회장과 부회장을 중심으로 한 암묵적 상하구조가 존재했고, 담당 사제와 절친하거나 오래 청년 단체를 지킨 사람이 회장으로 선출됐다. 회합 시간도 모두에게 고른 발언권을 주고 다양한 생각을 인정하지 않고 다수결로 처리한 안건을 담당 사제에게 보고하는 형식으로 흘러갔다. 각 단체에 주어진 회합과 미사 중 담당하는 과업 외에 구성원 개개인을 깊이 이해하고 생활을 나누는 시간을 갖지 못했다. 본당 안에서, 단체 지원금에 맞게 정해진 일과대로 움직이니 창조적으로 청년 활동의 대안을 모색할 자원이 말라붙는 것은 당연지사. 미사 후에도 함께 머문 시간에서 각자 경험한 느낌과 감정을 솔직히 나누기보다 가볍게 한 잔 하며 내일 출근을 준비하곤 했다. 소위 말하는 사회인으로서의 하루가 그대로 반복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소수자’로 분류되는 청년도 몇몇 눈에 띄었다. 과거에 청년 단체 활동을 했었지만 지금은 미사만 참례하는 청년, 청년 단체 활동을 하지 않는 청년, 성소자가 그랬다. 그들은 늘 미사 시간 전에 와서 청년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참례하고는, 파견 성가가 끝나자마자 황급히 자리를 뜨곤 했다. 무슨 이유로 청년 연합회 안에 섞이지 못하는 것일까. 잠잠히 지켜보니 여러 이유가 있었다. 소위 말해 개인 사정으로 평범하게 단체 활동을 마무리한 청년의 경우, 다시 교회 울타리 안으로 편입하는 게 비교적 수월했다. 그러나 단체원으로 활동하거나 청년 연합회 간부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담당 사제와 이견이 있어 중간에 조용히 ‘정리’된 청년의 경우 담당 사제가 이동할 때까지 그림자 청년이 되거나 비교적 1인 신앙생활이 가능한 본당으로 옮겨 가거나 교구나 수도회에서 주관하는 각종 교육 및 피정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목마름을 해결했다.

청년 단체 안에서 ‘성소자’로 알려진 이에게 쏟아지는 기대와 시선도 그들이 자유로이 활동하는 데 제약을 주는 듯했다. 성소자는 이래야 한다는 기준이라도 설정되어 있었을까. 몸가짐은 어때야 하고, 조신하게 있다가 소리 없이 입회하는 게 정설이 된 분위기를 온전히 받아내면서 가끔씩 툭툭 던지는 호기심 어린 질문에 마음 아파하는 것도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들이 되어 보지 않고 어떻게 그들이 본당 안에서 겉도는지 알 수 있느냐는 물음이 돌아올 법하다. 이렇게 대답하겠다. 나도 겪어보았다고. 청년 활동을 했던 청년이자, 청년 연합회를 더 자발적인 공동체로 만들고 싶어서 의견을 내었다가 본당 사제와 보이지 않게 어긋나 홀로 괴로워했던 청년이자, 자의 반 타의 반 성소자로 알려졌던 청년이었다고. 그래서 조용히 둥지를 떠나 교회 밖으로 난 길을 따라 걷게 되었다고.

교회 밖에서 살아가며 즐거움은 SNS와 스마트폰 등의 놀잇감으로, 안락함은 개인 피정과 개별 면담으로, 창조적 활동은 협동조합 구성과 대안 공동체 모임으로 해소해 나갔다. 하지만 교회 밖에 있으면서도 결국 세상이라는 교회 안에 속해 있다고 깨닫는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하느님을 떠난 것이 아니다. 교회라는 잘 짜인 둥지, 울타리를 벗어났을 때 비로소 안에서는 보지 못했던 교회의 모습과 마주하고, 환대해야 할 이웃과 만났다. 강론과 교리 안에 갇혀 정형화한 해석이 아니라 삶에 바탕을 둔 유연하고 창조적인 체험을 더할 때, 말씀을 ‘살아 내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가톨릭 신자만 참여하는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다양한 이와 ‘함께’ 하는 리그를 꿈꾸게 되었다. ‘가톨릭 키드’가 아니라 ‘커뮤니티 키드’로 변화를 모색했다. 이리저리 들쑤시고 문제를 제기하던 ‘마리아 막달레나’를 마뜩찮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제와 수녀, 청년 분과장의 시선을 피해 세상을 마음껏 누비고 있다. 교회 밖에 있지만, 교회 안에 머문다. 청년 단체에 몸담고 있지 않지만, 하느님과 그분이 만드신 세상에 민감하고 예민한 시선으로 함께 하고 있으니까. 여전히 내가 원하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과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어디선가 열심히 꿈틀대며 약동하는 청신한 움직임에 응원을 보내면서.

고은지. 청소년 관련 일을 하고 있으며, 스스로 집이 되어 길 위를 흐르며 환대하는 삶을 위해 분투하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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