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 vs Cool – 청년, 교회를 말한다 – 백승덕

백승덕

지도신부님들의 노고와 방청객의 자리 사이에서

주체가 주체가 되기 어려운 현실

가톨릭학생회를 하는 동안 내가 지켜본 지도신부님들은 청소년국을 비롯한 교회의 ‘위’ 신부님들과 학생들 사이를 조율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활동을 하면서 학생들은 가톨릭학생회가-특히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서가대연)가 학생자치공간이라고 거듭 강조했었다. 하지만 그런 구호와 현실은 많이 달랐다. 단적으로 연합회 예산은 학생들의 회비에서 충당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지원금에 대부분을 기대고 있다. 교회의 ‘위’ 신부님들이 가톨릭학생회를 불온시하거나 별 활동이 없이 예산과 공간만 차지하는 단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근래의 지도신부님들은 ‘가톨릭학생회가 운동권이 아니라는 점’과 ‘사람이 많고 잠재력이 크다는 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알려야 했다. 적잖이 고생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가톨릭학생회의 회원이 되어 서가대연 행사에 들르는 학생들 중 상당수는 이런 상황을 모른다. 게다가 회비가 아니라 교회지원금으로 운영되는 것이 어떤 제약조건이 되는지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을 한 학생들이 별로 없다. 회의에서 결정하면 그 결정사항이 얼마나 중요한 구속력을 지니는지를 이해할 경험을 한 친구도 별로 없다. 연합회에서 집행을 맡는 경험을 했던 친구들마저도 세세한 사정을 알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정에 참여하고 이를 책임지면서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 되어보는 감각을 기르는 것이 주체화라면, 서가대연에는 학생들이 주체로 성장할 수 있을 경험이 부족했다.

어떠한 결정에 참여하고 이를 책임져보는 경험이 빈곤하니 가톨릭학생회 본연의 역할도 공유되기 어려웠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구원을 위한 곳이다. 가톨릭학생회도 그렇다. 하지만 학점이나 취직 등등의 현실이 있는데 신앙이니 구원이니 하는 얘기는 참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라며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는 회원들을 참 많이 만났다. 아니, 그런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가 왜 모여 있는지 모를 만큼 허무함이 드는 상황이었다.

연합회나 가톨릭학생회를 끌어가는 이들이 레크레이션 강사는 아니었는데, 냉소적이고 수동적인 회원들이 기대하는 건 딱 그만큼까지인 것처럼 느껴졌다. 서가대연이 너무 ‘운동권’이란 비판도 있었지만, 실은 전혀 정치적으로 보이지 않는 피정이나 성지순례와 같은 행사도 가는 사람만 갔다. 그래서 축구동아리에서 농구하자는 애들만 많은 거나 다름없다는 자조 섞인 농담도 했다. 일부러 자리 만들어서 술도 무지 마셨고, 가끔은 날 선 논쟁도 일부러 했다. 그래도 ‘세상의 논리’에 빠진 아이들이 너무 처세만 신경 써서 힘들단 생각을 매번 했다.

하지만 시나브로 구원이란 게 무엇인지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의 구원이란 게 무엇일까?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를 반대하는 운동을 얘기하거나 혹은 기륭을 통해 비정규직 문제를 얘기하던 것이 나와 함께 하던 사람들에게 해방감을 주지 못하고, 피정이나 성지순례, 매주 하던 미사가 구원이 무엇인지 느끼는 전례로 가닿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어쩌면 우리가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 문제가 있던 건 아니었을까? 아니, 우리의 구원 인식 자체가 문제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질문들이 남아 아직도 괴롭히고 있다. 이 질문들은 주체로 성장하는 경험과 관련이 있다.

나는 최근에 만나는 후배들과 이야기하며 ‘교회의 일’과 ‘교회를 통한 일’의 차이에 대해 깨닫고 있다. 언제부턴가 가톨릭학생회의 연합회 일을 한다는 것이 교회의 일을 보조하는 것이 되었단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1~2년 간 종교 학생단체에서 일을 맡는다는 건 교회의 언어와 학생들의 언어, 그리고 세상의 언어 간의 불화를 느끼며 그 사이에서 관찰-판단-실천을 하는 주체로 성장하는 경험을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주체화 과정이 사라지거나 매우 빈곤해졌다. 그래서 아무도 구원을 묻지 않기 때문에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할 경험의 기회가 가톨릭학생회에 없기 때문에 아무도 구원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고, 그 답은 내가 아니라 전적으로 성직자나 (바로 위가 아니라 역사적 순간을 살았다는 먼) 선배들에게 있다고 믿는다면 질문을 던지며 굳이 긴장을 만드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구원을 묻는 건 일종의 노젓기다. 노를 맡은 사람은 자본주의나 가부장제, 정세와 같은 세상의 물결 위에 뜬 배에 앉았다. 그가 삶의 양식을 온전히 구원을 향해 두기로 마음을 먹더라도 그는 물결의 힘을 의지로만 거스를 수는 없다. 그에게는 물결을 타고, 물결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지혜를 익히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우선 물결을 적당히 탈 줄 알아야 할 것이고, 주위를 둘러볼 계기가 필요할 것이고, 그 모든 것을 함께하며 의지할 수 있을 동료가 필요하다. 스승은 그 과정에서 너무 나서지도, 방관하지도 않도록 스스로를 다스려야 한다.

이 지난한 과정들이 함께할 때 누군가가 삶의 양식을 온전히 구원을 향해 둘 수 있게 된다. 이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게 우리 가톨릭학생회가 처한 난처함이 아니겠는가. 우리에게 누군가를 책임 있는 주체로 키우는 페다고지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니 애쓰고 훌륭한 신부님에 대한 응원은 있어도 스스로의 일로 책임을 느끼며 나서는 이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방청객의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게 된 학생들을 보면서 나 또한 내 자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백승덕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부의장과 임시대표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양대학교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1950년대 한국에서 병역이 정착되어간 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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