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 vs Cool – 청년, 교회를 말한다 – 이희연

이희연

교회 공동체가 준 선물 – 성장

내가 받은 선물

나는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욕구가 큰 아이였다. 다른 사람보다도 더 나아지고 싶었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내가 하는 것보다 더 잘 하고 싶고 완벽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늘 나를 따라다녔다. 그런 내가 직업적 성공이나 스펙 쌓기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착하고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닌데, 본당의 온갖 활동을 거쳐 지금까지도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모이는 교회의 모임에 드나들며 살게 된 것이 스스로도 신기하기만 하다. 성당에서 온갖 일을 벌이며 살아가는 내가 되기까지는 성장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는 경험과 그것을 성장으로 연결시켜 준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마 그 발단은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전해 준 교구 청소년 행사의 자원봉사자 모집 공지였을 것이다. 몇 달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처음 해보는 큰 행사를 앞두고 봉사자들은 모두 모여 발대미사를 했다. 내가 중1이었으니 봉사자 대부분은 언니, 오빠, 그리고 주일학교 선생님들이었다. 막내이고 키가 작았던 덕분에 나는 제대 바로 앞자리를 양보 받았다. 성찬의 전례가 시작되고 신부님이 투명한 성작에 담긴 성혈을 들어 올렸을 때 그 잔에는 몇 달 간 애써서 행사를 준비한 친구, 선배, 선생님의 얼굴이 있었다. 정든 얼굴들 가까이 내 얼굴도 있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여 있다는 것. 그것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가 있을까. 그 시기가 나에게 남긴 것은 ‘교회 공동체’에 대한 이미지였다. 마음을 두드리는 이미지 하나가 교회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봉사를 통한 ‘성장’의 경험이었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교회가 내게 준 선물이었다.

수시로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 나는 당연한 듯 주일학교 교사회의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생각보다 청소년부 교사회의 반응은 냉랭했다. 교사가 많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어린이부에서 교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청소년 시기의 경험을 떠올리며 그 당시에 만났던 선생님들처럼 이젠 내가 위로와 지지를 건넬 차례라고 믿었던 기대가 무너진 내게 더 큰 고민은 내가 어린이들을 별로 귀여워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린이부 교사들은 회합 시간만 되면 귀여워 죽겠다는 말을 쏟아내기 바빴다. 물론 나도 아이들과 잘 놀아주고 웃으며 인사하고 말을 걸려 애썼지만, 기대했던 만큼 대화가 통하지 않았던 아이들이 귀엽게 느끼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성당에서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가장 심각하게 고민하던 시기였다. 단지 내가 봉사활동을 하겠다고 앉아 있는 것은 아닌가, 여기서 나는 몇 해쯤 아이들과 놀아주고 미사를 드리면 되는 소모품이 아닌가 하는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의 나는 몇 년 지나도 전혀 달라질 것 없는 기계처럼 느껴졌었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들의 담임이었던 내가 매주 달라질 것 없는 토요일에 지루해하던 그 순간,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성당에 오지만 언제나 즐겁게 놀다가는 동생과 달리 성당 구석에 앉아 바닥만 쳐다보다 가는 아이. 교사를 시작하고 세 달이 되어 가는데 누구 하나 목소릴 들어보지 못한 아이. 교리 준비를 다 못해서 일찍 성당에 갔던 날 하필이면 그 아이를 마주칠 줄이야. 어색한 인사를 건네고 교사실로 올라가려는데 혼자 두고 가는 게 자꾸 마음이 쓰였다. 이런 저런 말을 걸어봤지만 역시 수줍게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나도 답답하기만 했다. 때마침 뒤따라온 동생은 언니가 집에서는 말을 잘하는데, 하며 철없이 언니의 비밀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심하게 왕따를 당했던 그 아이는 집에서만 말을 할 뿐 밖에서는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다시 본 그 아이는 여전히 내 눈에 귀엽지 않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내 안에도 누군가를 안타까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구나 하는 느낌. 저 멀리 하느님만이 아니라 내 옆에도 나를 원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 느낌이 다시 더 나은 나로 성장하고 싶어 하는 나를 일깨웠다.

내 성장의 동력

물론 내게도 성당에 가고 싶지 않은 순간은 있었다. 교사들과 갈등을 겪었을 때, 예상치 못한 순간 갑자기 교사회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을 때, 소진되어 모든 것에 무기력해질 때, 내가 아무리 애써도 바뀌는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무엇보다도 내가 소모품처럼 느껴질 때. 이런 순간 나는 본질적인 고민을 꺼내어 본다. ‘나는 왜 성당에 있는 거지?’ 시작은 공동체에 대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성혈 안에 담긴 얼굴들이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아니었다면 어떠했을까? 아마 성혈 안에 담긴 것은 교회가 아니라 지옥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나에게 교회 공동체는 내가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그리고 성장해야 하는 이유도 마련해주었다. 무엇보다도 아직 나에게 ‘성장’이란 가치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한다. 그 가치가 사라졌다면 매주 똑같은 미사와 반복되는 봉사를 위해 돌아가는 기계 부품처럼 내 자신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본당의 청년들에게 주어지는 많은 일들이 성장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나에게 그랬듯 경험을 성장으로 연결시켜 줄 누군가가 내 친구들에게도 필요하다. 그들이 나처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가 크지 않더라도 말이다. 성장이 완성된 모델인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면, 성장은 교회가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인 ‘구원’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가치가 사라지는 순간이 오면, 기계 부품으로 만족할 수 없는 나는 교회 안에 남아있을 자신이 없다.

이희연

일생동안 사람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고 싶은 청년으로 철학교육이라는 ‘희귀한’ 분야를 전공하고 논문을 쓰면서, 교회가 가진 풍요로운 자원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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