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 vs Cool – 청년, 교회를 말한다 – 경동현

경동현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시대의 소명을 다한 교회의 신앙 감각

신앙생활 없는 신앙생활의 권고

5대째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어려서부터 집안 어른들을 뵐 적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이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탓일까? 4남매인 나의 다른 형제들은 소위 냉담자들이다. 4촌 형제들을 둘러봐도 비슷한 상황이다. 성인이 된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어른들이 강조한 신앙생활은 신앙인으로 어떻게 살라는 말씀보다는 주일미사 빠지지 않기, 기도 생활 잘하기, 성사 잘 보기와 같은 형식에 대한 강조가 대부분이었다. 성당의 신앙생활 역시 형식을 강조한 확장된 가정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된 큰 아이가 요즘 첫 영성체 준비로 분주하다. 몇 달 동안 매주 진행되는 첫 영성체 교리와 기도문 외우기, 성지순례, 부모까지 포함하는 성서 쓰기 숙제, 평일미사 참석에 귀찮아 할 법도 한데 군소리 없이 따라주는 아이가 한 편으로는 대견하면서도 형식에 대한 강조를 넘어서지 못하는 나의 경험을 반복하는듯해 아쉽다. 주임사제와 아이들의 면담이 있던 날, ‘첫 영성체는 아이를 볼모로 부모들을 나오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에 교회의 말 못할 고민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아이들이 주인공은 아니라는 생각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형식만 강조하다 보니 신앙의 의미와 하느님 체험은 오간데 없고, 약자인 아이들은 ‘위의 처분에 따르는 신앙’에 익숙해져 갈 것이다. ‘세례받자 냉담한다’는 말이 농담이 아닌 요즘, 초등학교 3학년을 정점으로 아이들이 점점 사라지는 주일학교 통계는 겉도는 신앙교육의 현실이 나와 내 아이만의 특수한 체험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체험은 아이들에서부터 청년을 거쳐 장년에 이르기까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교회의 양적 성장세가 둔화되던 1990년대 중반 무렵 많은 교구의 교구장 사목교서는 핵심주제로 청소년, 청년사목을 외쳤다. 2001년 폐막된 수원교구 시노드에서는 ‘소공동체’와 함께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를 주요 의제로 삼는 등 전 교회적인 차원에서 젊은이들을 위한 사목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떠나가는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게다가 많은 이들이 젊은이 사목은 앞으로 더 퇴보할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위의 처분에 따르는 신앙’에 길들여진 우리의 신앙 감각은 믿는다고 할 때 자연스레 생겨나는 물음들은 생략한 채 교회가 일방적으로 차린 신앙차림표를 따라가기에도 벅찬 형국이 아닌가? 가령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나와 교회에게 무슨 의미인지, 주일미사와 성당 모임에 성실한 것으로 예수 따름은 충분한 것인지 우리는 묻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차려진 신앙 차림표를 따르기도 벅차 질문조차 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질문이 없다보니 성당 안에서는 한 형제자매인 듯해도 찬반이 갈리는 사회적 이슈의 현장에서는 예수나 신앙은 끼어들 여지도 없이 원수가 되기도 한다.

구호에서 이벤트로

구호 차원에서 외치던 젊은이에 대한 관심이 효력이 없자 전국, 아시아, 세계 차원의 이벤트들이 유행으로 등장했다. 한국 가톨릭청년대회는 2007년 제1회 제주대회를 시작으로 2010년 의정부교구에서 열렸고, 2014년에는 대전교구에서 아시아 청년대회를 겸하여 열릴 예정이다. 또한 올해 브라질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대회(7월 23~28일)는 2~3년에 한 번씩 전 세계를 돌며 순회 중이다. 전국, 아시아, 세계 차원에서 젊은이들이 모여 한데 어우러지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가슴 뛰는 일일지 모른다. 젊은이들 만나기 점점 힘들어지는 교회의 상황을 고려하면 주교와 사제들, 대회에 참석하는 젊은이들에게는 분명 매력적인 일일 것이다.

‘위의 처분에 따르는 신앙’에 익숙한 신앙 감각을 문제 삼지 않고 치러지는 전국, 아시아, 세계 청년대회는 소비적인 이벤트 행사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다. 이벤트 준비에 들이는 관심과 노력만큼 본당과 젊은이 사도직 현장에도 귀 기울였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위의 처분’은 ‘위의 협력’으로 ‘따르는 신앙’은 ‘자유롭고 자기 주도적인 신앙’으로 바꿔내는 일이 함께 어우러지기를 바란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변화의 노력은 우리신학연구소의 생존을 위해서도 곡 필요한 일이다. 내년이면 스무 살이 되는 연구소에 젊은 평신도 연구자가 충원되지 않은지 오랜데 어떤 새로운 이야기들을 계속 해나갈 수 있을까? 과거 ‘자기 주도적인 신앙’을 체험한 청년 운동 그룹에서 주로 연구소 지원자들이 나왔으니 상황은 더욱 절실하다. 여러 방향에서 구체적인 노력들이 필요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건 우리가 젊은이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태도, 자세의 문제가 출발점이 돼야 한다고 본다. 깨어있고 활력 있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앨버트 놀런 신부는 사람들(젊은이들)과 관계 맺는 방식, 태도의 문제가 바로 예수의 영성이고, 하느님과 맺는 관계도 타인(젊은이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 안에서 가장 자주 체험된다고 말한다.

나의 형제들을 포함해 가까이 지내는 이들의 상당수는 ‘위의 처분에 따르는 신앙’의 잣대로 보면 냉담인 경우가 많다. 문제될 게 없다는 생각인데 최근에는 ‘자유롭고 자기 주도적인 신앙’을 지니면서도 교회 활동에 참여하시는 분들을 만나면 더 반갑게 느껴진다. 귀한 분들인 탓이다. 현대 영성가 로널드 롤하이저의 표현대로 냉담 여부와 상관없이 이들은 ‘새로운 가치로의 복원을 꿈꾸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규칙적인 교회 활동 여부를 떠나 이들은 그들 고유의 신앙으로 복음을 추구하며 살고 있다. 관리자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효율적이고 편할지 모르지만 교회를 떠나는 무수한 신자들의 상처를 대면한 바로 판단컨대 위의 처분에 따르는 교회의 신앙감각은 시대적 소명을 다한 지 오래된 것이 분명하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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