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복음 사이 – 소박한 바람으로 가려진 탐욕

김선실

13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루카 12장 13절-21절

오늘의 복음은 욕심에 대하여 성찰하게 하는 내용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고 하시며 ‘사람의 생명은 그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이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어 많은 재화를 모아도 하루 밤새 생명을 잃을 수 있다고 경고하신다. 탐욕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도 생명을 잃는다면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되새기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이 지닌 경고(?)를 무심히 지나치곤 한다. 탐욕이란 ‘지나치게 탐하는 욕심’이니, 내가 가진 작고 평범한 욕심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스스로 위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설마 하느님이 하루 밤새 내 생명을 거두어 가시지는 않겠지!’ 하고 위안하면서 말이다. 허나 예수님의 경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실 그것은 경고가 아니라 깨우침을 주기 위한 과장법이다. 우리 생명의 근원이 누구인지 깨닫는다면 그 순간 욕심을 내려놓으라는 권고인 것이다. 생명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헛되다는 ‘허무의식’이 때때로 우리의 욕심을 내려놓는데 필요한 것이지도 모른다.

최근 예전에 알던 20대 젊은 여성이 수척해진 모습으로 찾아왔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업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야위었냐는 질문에 금세 눈물부터 흘린다 1년 전 성경공부 모임에서 대학원에 재학 중인 복학생을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가지면 결혼을 하자고 약속할 정도로 관계가 진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둘의 관계를 알게 된 양가 어머니의 반대로 두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의사 사위를 보고 싶은 어머니는 공대생인 남자친구를 못마땅해 했고, 남자친구의 어머니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고 한다. 헤어진 후에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 괜찮은 척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실연의 아픔으로 여전히 고통 받고 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때로는 생명을 저버리고 싶은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고 호소한다. 얼마나 시간이 더 지나야 이 상처가 아물 것인지 동반하고 지켜보며 함께 아파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모의 반대로 실연의 고통을 겪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는 참으로 오랫동안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문제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의 미래를 생각해서 결혼의 조건을 미리 정해놓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반대한다. 그리고 그것을 마치 부모의 당연한 의무처럼 생각한다. 욕심 부리지 말라고 하면 욕심이 아니라고 펄쩍 뛰고, 이만큼 키워놨는데 이 정도 작은 바람도 안 되냐고 반문한다. 자녀에 대해서는 욕심이 아니라 사랑이나 의무라고 생각하고, 탐욕이 아니라 당연하고 평범한 작은 바람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자녀를 위한다’는 부모의 평범한(?) 욕심이 자녀의 생명까지도 위협한다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한다.

우리 사회에는 일명 ‘기러기 아빠’라는 이름으로 혼자 사는 남성들이 있다. 자녀들에게 좀 더 나은 교육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아내와 아이들을 외국에 보내놓고 돈을 벌어 송금하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외롭게 살아가는 불쌍한(?) 남성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녀가 외국에서 공부해서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로 스스로를 위안하며 모든 것을 감수한다. ‘기러기 아빠’들을 보면서 새삼 ‘가정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부부와 자녀가 함께 살면서 서로 부대끼고 사랑을 주고받으며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일상생활 속에서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존재가 없다면, 아버지에게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누리는 소소한 기쁨들이 없다면 그런 가정의 의미는 무엇인가? 가정이 자녀의 교육이나 성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세태가 자꾸 안타깝게 느껴진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부모들이 일정 정도 자녀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만큼 부모의 욕심에서 비롯되는 사회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지나친 교육열로 인한 사교육 문제, 불법 상속 문제, 불법 병역 기피, 부정 입학, 해외유학 열풍, 호화 예식과 지나친 혼수 등 가만히 따져보면 꽤 많다. 자식을 위한 일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사회문제가 된다면 이는 분명 탐욕에 해당된다. 또한 자녀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자녀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결국 자녀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도 분명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이라면 특히 ‘경계해야 할 모든 탐욕’ 속에 ‘자녀에 대한 욕심’을 첫 번째로 놓고 늘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욕심이 생길 때는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이니 내일이라도 거두어 가실지 모른다’는 생각을 상기시키며 욕심을 내려놓는 연습을 해보면 어떨까!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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