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A – 자살 예방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현주

자살 예방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Q

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담선생입니다. 저한테는 삶이 힘든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가끔은 자살 충동을 느낀다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 분들은 “내가 내 자신을 해치게 될 것 같아 두렵다”고 합니다. 이런 분들을 만날 때 지금까지 제가 했던 것은, 그냥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그 슬픔을 함께 느끼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상담을 잘 못해줘서, 이런 분들이 저를 만난 이후에 자살을 다시 시도할까봐 크게 두렵고 걱정스럽습니다. 제가 상담을 통해서 공감을 아무리 잘해준다 해도 그분들의 생활 여건이 바뀌지는 않기 때문에, 제가 이야기를 듣노라면 저도 슬퍼서 그냥 같이 울기만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분들이 삶의 희망을 찾도록 도와주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요?

A

“자살 예방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저의 답을 먼저 말씀드리고 나서 나머지 이야기를 덧붙여보겠습니다. 위의 질문에 대한 저의 답은 이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

몇 마디 덧붙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다른 사람의 자살을 예방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혹시 자살 못하게 억지로 막을 수는 있겠지만.”

이로써 저의 답을 모두 드린 셈입니다만, 질문하신 분의 고충에 동감도 되고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다른 이들도 많을 것 같아서, 내친 김에 짧은 저의 소견을 조금 더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저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이른바 인생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저의 ‘사사로운 견해’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음,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저의 견해’를 간략히 정리해보겠습니다.

  1.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의 주인공인데 진짜 주인공은 아니다. 무슨 말? 갑돌이는 갑돌이 인생을 산다. 아니, 갑돌이 인생만 살 수 있다. 을순이도 마찬가지다. 갑돌이가 을순이를 자기 인생 안으로 초대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해서 을순이 인생을 살 수는 없다. 을순이도 갑돌이 인생에 끼어들 수 있지만 그렇게 해서 갑돌이 인생을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자기만의 인생을 산다. 다른 사람 누구를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그와 인생을 바꿔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기가 남의 인생을 살 수도 없고 남이 자기 인생을 살게 할 수도 없다. 이런 뜻에서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아무도 제 맘대로는 살지 못한다. 자기 몸 하나 자기 맘대로 못하는 게 사람이다. 아무리 늙기 싫어도 세월 따라 나이를 먹어야 한다. 언제까지나 젊음을 유지하고 싶지만 어림없는 말씀이시다. 세상일 또한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애써 세운 계획이 바뀌거나 무너지는 걸 어쩔 방법이 없다. 때가 되면 아무리 더 살고 싶어도 죽어야 한다. 그러니 누가 자기 인생의 주인공임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결국 사람의 인생에는 그 진짜 주인이 따로 있다는 얘기가 된다.

  1. 사람은 죽음을 잉태한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난다. 태어나는 날부터 죽어가는 게 인간이다. 그리고 모든 인생의 내용과 과정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 그것을 ‘운명’이라 부른다면, 한 사람이 태어날 때 이미 그가 어떻게 살다가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인지 결정된 상태로 태어난다는 얘기다. 단, 그 운명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를 (거의) 모든 사람이 까맣게 모르고 살아간다. 이 ‘모름’이야말로 생각할수록 고맙고 놀라운 은총이다. 자기가 어떻게 살다가 언제 어떻게 죽는지를 미리 알고 산다면 그토록 싱겁고 무의미한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조물주는 인간을 세상에 보내면서, 달리는 열차에 역방향으로 앉은 승객처럼, 한 치 앞도 미리 내다볼 수 없도록 만드셨다. 덕분에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도 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괜한 고생도 하며 인생의 갖가지 묘한 맛을 음미할 수 있는 것이다.
  1.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와서 자기 수명(壽命)을 온전히 누리고 간다. 태어난 지 몇 달 안 되어 숨진 아이도, 심지어 태어나기 전에 숨을 거둔 아이까지도, 자기 수명을 다 누린 것이다. 평균수명이란 말은 가능하지만, 제 명에 못 죽었다는 말은 첨부터 있을 수 없는 말이다. 시간의 값은 그 길이에 있지 않고 내용에 있다. 장수는 좋고 단명은 나쁘다는 생각이야말로 오랜 편견 또는 착각일 뿐이다. 그 생각이 진실이라면, 서른셋에 죽은 예수보다 9백 몇 살까지 살았다는 구약의 아무개가 더 좋은 인생을 살았다고 말해야 한다. 과연 그런가?
  1. 아무도 자기 생일을 스스로 정하지 못하듯이 사망일도 스스로 정할 수 없다. 두 날을 정하는 것은 본인이 아니다. 그래서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 사람 목숨이 하늘에 달려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태어나고 죽는 날을 스스로 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태어나고 죽는 방법도 스스로 정할 수 없다. 자기 삶은 자기 선택의 열매라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 선택 자체가 처음부터 그렇게 선택하도록 운명으로 정해져 있음을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이 ‘모름’이 하늘의 은총이라는 얘긴 앞에서 했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언제 어떻게 태어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없듯이 자기가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인지도 결정 못한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인생의 진짜 주인공인 하느님(다른 말로 하면 ‘참 나’)의 몫이다. 누구도 자기가 어떤 방법으로 마지막 숨을 거둘 것인지를 스스로 정할 수 없다. 자살조차도 그가 스스로 택한 죽음의 방식이 아닌 것이다.
  1. 자살은 하늘 명[天命]을 어기는 범죄라는 생각에 동의하기 어렵다. 자살이 그에게 내려진 하늘의 명인지 아닌지를 누가 입증 또는 반증할 것인가? 자살을 범죄로 보는 생각의 바탕에는 어떤 사람의 ‘몸’이 곧 그 사람이라는 어미-착각이 숨어 있다. 그 사람 몸이 곧 그 사람이라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예수는 ‘죽은 사람’이다. 그가 정말 ‘죽은 사람’인가? 예수의 몸은 죽었지만 스스로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다.”고 말한 그는 죽지 않았다. 죽지 않았다가 아니라 죽지 않는다. 아니, 죽지 못한다. 태어난 적이 없는데 무슨 수로 죽는단 말인가? 그러므로 자살은, 교통사고나 노환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숨을 거두는 여러 방법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쯤 제 생각을 말씀드렸으니, 자살 예방 방법을 모르겠다는 저의 답에 어느 정도 부연설명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요, 아무도 어떤 사람의 자살을 미리 예방할 수 없습니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미리 막을 수 없듯이. 인간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거니와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니 질문하신 분은 “내가 상담을 제대로 잘 못해줘서” 누가 자살을 시도할까봐 걱정할 근거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픈 사람과 함께 아프면서 함께 울어주는 것. 사람이 사람한테 할 수 있는 일로서 이보다 아름답고 착한 일이 무엇이겠어요? 예, 질문하신 분은 할 일 다 하셨습니다. 아주 잘 하셨어요.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 이상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일, 시도할 이유도 의무도 없는 것입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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