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전 – 혜은 씨의 희망세상에 놀러오세요~

김옥자

혜은 씨의 희망세상에 놀러오세요~

목마른 이들의 우물파기 프로젝트 ‘육아협동조합’의 청지기

일수벌금제. 개인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벌금에 차등을 두는 제도. 이미 북유럽 등에서는 보편화되어 우리나라의 법조계에서도 오랜 기간 논란이 되어온 제도다. 같은 종류의 법 위반 경우 월 소득 100만 원인 사람이 10만 원을 낸다면 1,000만 원인 사람은 100만 원 정도를 낸다고 할까, 수입이 높은 사람일수록 동의하기 어려운 제도. 아니 동의를 한다고 해도 그 소득을 어떻게 정확히 파악할 수 있으랴. 단지 월급만으로 그 사람의 소득 수준을 정한다는 건 부정확할 터, 자기 집인지 전세인지, 또 지역에 따라 집값 차이는 얼마나 천차만별인가. 아~ 머리 아파하며 그냥 일괄 적용. 나라에서 하는 건 뭐 이정도인데 그걸 실행한 사람들이 있다. 물론 벌금은 아니고, 어린이집 보육료다. 소득에 따른 차등 보육료, 당연히 단순 월 소득만으로 정한 것도 아니다. 원천징수영수증은 기본, 전세인지 자기 집인지 아주 세심한 것까지 살피고 구분해서 결국 이뤄냈다. 아마 우리나라 어린이집 보육료로는 처음일 텐데, 자신의 소득을 ‘까발리면서까지’ 좋은 어린이집을 만들었던 사람들, 그 중심에서 완벽한 실무를 이뤄낸 전(前) ‘희망세상 어린이집’ 원장, 김혜은 씨(이하 혜은 씨)를 만났다.

고달픈 육아가 희망의 씨앗이 되다

혜은 씨는 현재 인천 남동구의 ‘푸른숲 어린이집’ 원장이다. 국공립 어린이집인 이곳의 특징은 24시간 보육이 가능한 곳으로 차등보육비를 가능하게 했던 ‘좋은 어린이집을 만들기 위한 인천시민 협동조합(이하 육아협동조합)’이 인천 남동구에 제안해 채택된 곳이다. ‘육아협동조합’이 함께 한 어린이집은 처음 만들었던 ‘희망세상 어린이집’과 ‘성미 어린이집’, 서대문구의 ‘푸른숲 어린이집’ 그리고 얼마 후 개관을 앞둔 ‘서창다소니 어린이집’이다.

그야말로 요즘 대세인 ‘협동조합’이 만든 어린이집이지만 첫번째 ‘희망세상’의 시작은 협동조합이 뭔지도 모른 채 그야말로 ‘우리 아이들을 보내고 싶은 곳’이 절박했던 부모들의 결의가 이뤄낸 쾌거였다.

“지금이야 협동조합에 대한 이해들이 많지만 90년대 중반만 해도 돈은 없고 아이들은 잘 키우고 싶고, 그런 걸 혼자 하지 못하니까 모여서 해보자 했던 거죠. 지금도 뭐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노동자든 시민활동가든 여성들은 결혼을 하면 직장과 활동을 그만 두어야 했어요. 물론 당시에도 어린이집들이 있어서 아이들을 맡길 곳을 찾아다녔죠. 그런데 어린이집이 좀 크고 번듯하면 규율이 엄해서 아이 맡기기가 부담스럽고 좀 작은 곳은 환경이 열악해서 맡기고 싶지가 않은 거예요. 그래서 대부분 제 친구거나 선배였던 대여섯 명의 엄마들이 사무실 한 칸을 얻고, 아이들을 봐줄 선생님을 모셔왔어요.

사무실은 당시 인천지역 (여성)단체 회장님이 배려해주셔서 가능했는데 전 그때 유치원 교사를 하고 있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진 못했어요. 그러다 아무래도 사무실 한 칸으로는 너무 좁아서 엄마들이 십시일반으로 50만 원 70만 원 모아서 상가 2층에 전셋집을 마련했고, 저도 첫째를 맡겼어요. 필요한 집기는 아이들 부모는 물론 부모의 선후배들이 와서 만들어주고, 또 십시일반으로 구입하곤 했어요.

그러다 여름이 돼서 더우니까 창문을 열고 지냈는데 옆 아파트에서 시끄럽다고 문을 닫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또 십시일반해서 에어컨을 달았더니 이번에는 에어컨 물이 흐른다고……. 엄마아빠들이 밖에서는 모두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애를 쓰는데 막상 자녀들은 너무 좋지 않은 환경에서 지냈던 거죠. 부모 중에 지금은 돌아가신 강희철 선배님이 그때 막 백일 지난 아이를 보내고 계셨는데, 후배들이 육아를 이렇게 어렵게 하는지 당신의 아기를 보내시고야 알게 되었다며 어디 한번 정말 좋은 어린이집을 지어보자고 하셨어요. 헐~ 어린이집이라니. 상상만 해도 가슴 벅찬 일이었죠. 러시아 속담에 가난한 사람은 상상력이 풍부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어쩜 저희가 가진 게 많았다면 그런 상상, 그런 꿈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어요.”

  희망세상 부모들은 아이들 집을 짓는데 내 새끼만 잘 키우려는 일이 될까봐 공공성을 갖기 위해 전문가의 도움도 받았다. 음에는 한국보육교사회 인천지부장, 유아교육을 위한 인천교사모임 회장, 교사인 아빠, 간호사인 엄마가 모였다. 땅과 집, 그리고 운영을 위해서는 5억, 아이들은 백 명 정도가 모여야 했다. 1인당 5백만 원이 필요한 형편인데 처음 금액을 산출하고는 모두 웃었다. 다들 어려운 살림에 그런 큰돈이 가당할까? 일단 땅부터 구하러 다녔다. 산을 끼고 있으면서 되도록 많은 부모들이 맡기고 데려가기에 좋은 위치를 찾았다.

“그때 찾은 땅이 1억 5천이었는데 돈이 없잖아요. 그래서 일단 돈을 모아서 계약금 마련하고, 중도금 줄 때가 되면 또 돈을 막 모으고, 잔금도 막 만들고, 그때는 다들 아이들 맡기는 일이 너무 절실해서 그 일들이 다 되더라구요.”

혜은 씨는 당시 간사로 일하면서 어린이집에 보낼 아이가 있는 부모들이 있는 곳마다 찾아다니며 설명회를 했다. ‘어떤 어린이집이면 좋겠냐’는 질문만 하면 온갖 제안이 쏟아졌다. ‘영어 안 가르치기’, ‘건강한 음식 먹이기’, ‘자상한 선생님’ 등 혜은 씨는 그때 나온 이야기들을 한 가지도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가 어린이집에 고스란히 반영했다.

최초의 소행주(?) 탄생

닿을 수 없는 목표처럼 보이던 5억 원이 차곡차곡 모아졌다. 당시 5백만 원을 낼 수 있는 집은 없었다. 하지만 ‘열망’은 사람들을 고민하게 했고 결단하게 했다. 방 세 칸을 두 칸으로 줄이고, 대출은 흔한 일이었다. 처음 예상한 5억보다 더 많은 돈이 들었지만 그것 역시 다들 십시일반으로 마련했다.

“그땐 저희들 눈엔 사람들이 다 출자자로 보였어요. 아이가 있는 부부는 물론, 결혼을 앞 둔 사람, 연애하는 커플까지 출자를 종용했죠. 부모가 다니는 직장에 가서 직원들에게 설명회도 했어요. 그 과정에서 제가 배운 게 너무 많았는데 엄마들이 얼마나 꼼꼼한지, 아직 집도 안 지었는데 식판은 뭘로 하면 좋을지, 뒷산에 어린이집과 통하는 다리를 만들면 좋겠다는 의견, 그림 그리는 실내놀이실, 아이들이 조용히 쉴 수 있는 조용한 방, 둥근 방, 등등 반짝이는 아이디어들이 많았어요.”

누가 시켜서가 아닌 스스로 하는 공부는 신명이 나는 법이다. 부모들의 바람을 이뤄주기 위해 교사들은 전통육아 책을 찾으며 공부도 많이 했다. 그렇게 해서 처음 아이들 55명, 50가족 조합원으로 시작한 희망세상은 1999년 ‘육아협동조합’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꼬박 1년이 걸렸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1년 정도 희망세상을 운영하다보니 초등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생겼고 그 아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방과 후 공부방’이 필요했다. 물론 또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십시일반’에 이력이 난 이들에게 ‘불가능’은 없었다. 아이들을 위해 전세방을 구하다 이왕이면 어린이집을 포함한 다가구 주택을 짓자는 의견이 나왔다. 어린이집 부모 중 자기 집 없는 가정을 위한 프로젝트이기도 했던 건축은 분양을 목적으로 한 게 아니니 실 건축비만 내면 됐다. 1층엔 어린이집 방과 후 학교, 2-3층은 총 9가구의 다가구 주택.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멋진 공동 주택, 최초의 소행주(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가 탄생한 것이랄까?

“참 감동적인 일이 많았어요. 처음 상가 2층에 전세로 있을 때 십시일반으로 마련했던 2천여만 원이 있었거든요. 희망세상이 다 완성되고 그 돈에 대해 논의하게 되었어요. 상식적으론 각자 지출한 원금만큼 가져가면 되는데, 그때 아빠 모임 대표가 ‘그 돈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사니, 그 돈을 장학기금으로 해서 희망세상에 오기 어려운 아이를 오게 하자’는 제안을 했어요. 처음엔 의견이 분분했죠. 그런데 결국 그 돈이 고스란히 장학기금이 되었어요. 그래서 조합원이 아니어도 희망세상에 오고 싶어 하는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 또 지역의 어려운 아이들 자리에 각각 10%를 할당해 20% 지원이 가능했죠. 정말이지 희망세상 부모님들은 대단했어요. 차량 운행이 필요해서 돈을 거두면 ‘내가 좀 더 낼 테니까 누구네 돈은 받지 말라고 하고, 소득은 B등급인데 보육료는 한 등급 높여 C등급 낼 테니까 어려운 아이 더 하게 해주라는 분들도 많으셨어요.”

감동적인 일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 이사회에서 교사도 부모와 동등하게 500만 원을 출자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처음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헉! 이제 20대 아직 미혼인 교사들에게는 큰돈이기도 했지만, 교사까지 출자한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공동육아의 경우, 부모들과의 갈등으로 교사들이 집단사퇴를 하는 사례를 들며 부모와 교사가 동등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100% 동의, 적금 깨고 부모님께 말씀드리는 등의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새로 오실 선생님들. 누가 올까 싶어 고민하다 신문에 작은 광고를 냈다. ‘이 어린이집의 주인은 당신이다’. 결과는 의외. 교사 지원자들은 생각보다 돈 문제에 쿨했고, 혜은 씨는 그때 깨달았다. 사람들은 ‘주인 되게 일하는 걸’ 더 좋아한다는 걸.

듣보(듣도 보도 못한)차등보육비!

혜은 씨는 희망세상의 기획단계에서부터 조합 간사를 하고, 어린이집 완공 후 원장직을 6년간 수행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들었을 시기, 어디 어려운 일이 한 두 가지였을까? 하지만 혜은 씨는 힘든 것보다는 재미있던 일, 즐거웠던 일만 생각난단다. 그래도 한 가지, 가장 어려웠던 거라면 차등보육료를 정하는 일이었다. 지금이야 국가에서 무상보육을 하고, 어린이집에 안 보내는 경우 양육수당도 지급되고 있지만 첫 시작 때만 해도 보육료는 꽤 큰 부담이었다.

예를 들어 의사부부와 활동가 부부의 수입은 큰 차이가 난다. 그런 집이 보육료가 같다는 게 혜은 씨는 어쩐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기준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이었다. 이건 나라에서도 못한다고 덮으며 회의마다 미루었고, 이사회에서 뜻에 동의하는지만 정하고 의지만 있다면 방법은 찾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1년. 결국 매년 년초에 부모의 원천징수영수증이나 급여명세서 3개월분을 제출하게 했고, 자기 집 유무의 재산 기준을 취합해 등급을 매겨 차등에 따라 보육료를 제시했다. 소득이 가장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의 차이는 10만 원 정도. 물론 수급권자에게는 보육료를 받지 않았다. 그래도 처음 오는 분들에게 이해시키고 설명을 하는 건 늘 숙제 같이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희망세상은 그야말로 한 마을의 중심이 되어갔다. 방학 때면 아이들의 점심을 위해 계절학교를 열었고 희망세상을 중심으로 마을부엌과 마을도서관도 생겼으며 방모임 가족끼리의 유대도 두텁다.

어디선가 집 세 채를 지으면 성불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혜은 씨는 어린이집 건물, 공부방, 다가구 주택 9가구 총 11채를 지었다. 3대까지 성불할 숫자다. 그만큼 힘들었다는 이야기일 텐데, 오히려 혜은 씨는 아이들을 만났기에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며 감사해한다. 함께 일했던 선배들과 부모들이 자신 안의 새로운 것을 꺼내주어 가능했다는 것이다. 말이 그렇지, 그 많은 건축을 일일이 체크하고 일이 되게 뛰어다니고,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무엇이 혜은 씨를 그렇게 강하게 한 걸까?

조카들을 잘 보던 아이

또래 친구들보다 유난히 사촌 동생, 조카들이 많았던 혜은 씨가 유아교육과를 간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모들은 혜은 씨에게 늘 아이를 잘 본다며 흐뭇해했고 혜은씨도 진로에 대해 큰 고민 없이 이 길을 택했다. 하지만 혜은 씨가 택한 길은 단순한 보육교육이 아닌 보육운동이었고 그 시작은 천주교 교회였다.

혜은 씨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대학도 첫 직장도 서울에서 다녔다. 인천과 인연을 맺은 건, 부모님이 먼저 인천으로 이사를 가신 후, 자연스레 따라오면서부터인데 여전히 서울에 직장이 있던 혜은 씨는 인천에서 출퇴근을 했고 그러다 보니 인천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유치원 ↔ 집 외에는 내내 집에만 있었다.

그런 혜은 씨에게 엄마는 가톨릭회관에서 열리는 민중대학 팸플릿을 전해주셨다. 본당 신부님께 받은 것이니 좋은 걸로만 생각한 엄마의 제안이었다. 그때 강사가 김근태, 장을병, 백기완 선생이었다. 수강료까지 쥐어주시는 엄마에게 못이기는 척하고 나갔다.

“새로운 세상이었죠.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들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기 시작했어요.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도 처음 알았죠. 하루는 엄마에게 ‘우리나라 군사작전권이 어디 있는 줄 아냐고 했더니 엄마가 그거 미국에 있잖아 이러시는 거예요. 전 깜짝 놀랐어요. 나만 그 사실을 몰랐나 했죠. 엄마 역시 신부님께 들으신 이야기였지만요. 주말에도 집에만 있던 딸이 평일에도 늦게 들어오니 부모님 걱정이 커지셨지만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르는 거잖아요. 그때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남편도 거기서 만났구요. 희망세상을 만든 분들도 그때 만난 청년회 선배들이 대다수 함께 하셨죠. 제 두 번째 인생의 시작이었어요.”

어린이집은 엄마의 출산휴가 3개월 후부터 시작해 유치원 전까지 다니는 게 대부분이지만, 희망세상의 아이들은 방과 후 공부방까지 풀코스일 경우 13년 가까이 다닌다. 한 아이의 탄생 직후부터 10여년의 넘는 성장을 볼 수 있는 행운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건 아닐 텐데 이쯤에서 혜은 씨의 보육철학이 궁금했다.

“아이들은 정말 다양하고 누구 하나 예쁘지 않고 똘똘하지 않은 애가 없어요. 그런 애들에게 어른들은 많은 걸 해주고 싶어하지만, 사실 필요한 건 아이들을 그대로 보아주는 것이에요. 있는 그대로 봐주고 들어주고 믿어주는 것이죠. 가끔 생각나는 선생님이 계신데,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셨어요. 그분은 방과 후에 청소하고 검사 맡으려고 기다리고 있으면 꼭 풍금을 쳐주셨어요. 그럼 저랑 친구는 즐겁고 신나게 노래를 하고 집에 가는 내내 흥얼거렸는데 참 좋은 기억이에요. 그래서 가끔 그 선생님을 떠올리면 늘 즐거웠던 시간이 생각나요. 칭찬을 하거나 선물을 주셨던 선생님은 생각나지 않지만 그 선생님은 자꾸 생각나요. 그 기억이 제가 생각하는 보육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을 보면 그 선생님 생각이 나곤 했어요.”

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렸습니다 ^^

처음 생수전 코너에 혜은 씨를 소개해주신 분은 혜은 씨가 ‘희망세상’을 위해 모든 걸 다 내어놓았다고 했다. 과연 혜은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듣다보니 바오로 사도의 ‘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렸습니다’라는 말과 ‘진인사대천명’이란 문구가 생각난다. 각종 ‘운동’이 난무하는 21세기, 그 중 협동조합도 급물살을 타고 있지만 성공한 협동조합의 경우 ‘일치하는 하나의 목표’가 있고, ‘백인백색, 모든 구성원의 의견을 존중하고 모을 수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거기에 한 가지를 보탠다면 일상의 일과 연관이 있다는 정도?

‘좋은 보육’이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며 그야말로 황무지에서 생명을 일궈낸 농부 같은 사람들, 세상에 멋진 ‘가능성’을 열어준 그들이 보여준 건, 적어도 내게는 ‘초대교회’, ‘대동세상’이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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