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연의 시대 읽기 – 음모론적 사회와 그리스도교인

박현준

음모론적 사회와 그리스도교인

최근 나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혹, 나는 누군가에 의해 설계된 매트릭스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저들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와 규칙의 함정에 빠져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주어진 현실을 빠져 나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그들이 허용한 범위 안에서 만족하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삶의 도처에 드리워진 좌절은 그들이 설정해 놓은 일상의 파편들은 아닌가? 내가 살고 있는 현재는 나와 세계의 상호작용으로 창조되고 있는 우연이 아니라 저들이 이미 확정해 놓은 세계는 아닌가? 다만 우리로 하여금 착각할 수 있을 정도의 미시적인 우연성만 제공하고 직접적 경험이 어려운 거시적인 세계는 그들이 이미 확정해놓은 것은 아닐까? KBS의 ‘글로벌 성공시대’에서 보여주는 영웅적 성공사례는 ‘너희도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식의 신화를 유포하기 위한 여론 조작은 아닐까? 그래서 대중들로 하여금 실패와 좌절의 원인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자신에게 있음을 세뇌시키는 것은 아닌가?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사람들은 컴퓨터가 창조한 가상의 세계에서 모의 인격으로 살아간다.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 또 그들이 경험하는 소소한 일상들은 컴퓨터가 조작한 세계다. 주인공 네오는 그것이 컴퓨터가 만들어 놓은 매트릭스이고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가 가짜임을 깨닫고 그 울타리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네오는 매트릭스로부터 버그로 간주된다. 그래서 일종의 바이러스 백신인 비밀요원들로부터 쫒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에드워드 스노든은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개인정보 불법 감시를 폭로해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국가기관이 기존의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개인의 정보까지 촘촘하게 수집하며 감시했다는 사실을 폭로한 스노든은 도망자 신세가 되어버렸다.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스노든은 그들의 시스템을 위협하는 돌연변이 바이러스가 된 것이다. 진실을 말하는 자가 자신이 살아 온 시스템에 살 수 없는 처지가 되는 세상,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세계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이 설정해 놓은 테두리 안에서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길고 오래 살 수 있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 길을 선택하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세계인 것이다.

세계를 음모론적인 시각에서 보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작금의 우리 세계, 특히 우리 사회는 영화 매트릭스의 현실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오로지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얻어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현실적 조건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치열한 경쟁 관계에 놓이게 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 정도는 심해진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학도 예외는 아니다. 대학은 이미 취업을 위한 치열한 학점 경쟁의 장으로 바뀐 지 오래다. 혹자는 대학이 취업을 위한 학원으로 전락했다고도 한다. 거기에는 철학도 없고 세계관도 없으며 교양도 없다. 오로지 영어공부와 학점 따기만이 유일한 덕이다. 그들에게 낭만은 사치이며 정의감은 철없는 감정 과잉에 지나지 않는다. 취업에 보탬이 되면 선이고 그렇지 않으면 악이다. 이것이 대학의 현실이다. 이러한 대학의 현실 속에서 학생들은 다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다. 차안대를 두른 경주마처럼 오로지 앞을 향해 가야만 한다. 한눈을 파는 사람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현실의 모순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의 부당성을 외칠 마음의 여유가 없다. 현실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은 프로그램의 버그처럼 제거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은 누가 창조했을까? 그것은 우연한 결과일까? 지난 수 십 년 간 채택해온 교육 정책의 오류일까? 혹 의도된 것은 아닐까?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는 가짜 세계를 무너뜨리고 진짜의 세계를 복원할 ‘그’라고 믿어진다. 그리스도교식으로 말하면 메시아다. 가짜의 세계를 직시하고 그것에 맞서 고독한 싸움을 벌이는 그는 매트릭스로부터 버그로 간주된다. 사실은 매트릭스를 지배하는 운영자로부터 제거 명령을 받은 것이겠지만. 아무튼 그는 시스템을 불안정하게 하는 일종의 바이러스로 간주되고 제거되어야만 하는 존재일 뿐이다. 오늘 우리사회의 현실도 이와 대동소이하다. ‘돈이 최고’라는 망령이 기존의 모든 가치를 삼켜버린 우리사회에서 거기에 순종하지 않는 구성원은 버그가 된다. 운영자 입장에서 보면 그는 시스템을 위협하는 바이러스에 지나지 않는다. 도덕과 윤리, 정의와 인간적 가치를 꿈꾸는 자는 현실 부적응자가 되어버리는 오늘의 우리 사회, 그것은 우연한 결과일까? 혹은 복잡한 여러 요인들이 물고 물리면서 만들어지는, 통제가 불가능했던 역사의 산물일까? 아니면 그러한 세상을 조장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설계자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

2000년 전 예수도 유대사회의 지배층들로부터 버그로 간주되었다. 제사장 계급들과 원로들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 복종하지 않은 예수는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버그로 간주되었고 결국 제거되고 말았다. 이른바 사두가이들로 지칭되는 소수 지배 계층이 예수를 버그로 간주한 것은 그가 주장했던 하느님의 성격 때문이었다. 예수는 하느님을 ‘거저 내어줌’의 정체로 이해했고 그래서 그분을 완전한 사랑이라고 전했다. 예수의 이같은 생각은 사두가이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지배 시스템에 균열을 가하는 위험한 요소였다. 사두가이들과 그들의 무기인 율법은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자신에게 충실하지 않으면 무시무시한 벌을 내리는 분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그 위에 자신의 지배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복잡하게 세분된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지 않을 경우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는다든지, 제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진노를 위무해야 한다든지 등. 그런데 예수는 이와는 달리 하느님의 속성을 대자대비하시고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으로 제시한다. 가히 혁명적인 전환이다. 이러한 예수의 깨달음은 백성들로부터 커다란 지지를 받았고 따라서 사두가이들은 예수가 자신들의 시스템을 위협하는 바이러스로 간주한 것이다.

우리 사회가 과연 소수 지배계층에 의해 설계된 매트릭스인지 알 길은 없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결정이 아닌 외부적 강제에 의해 인간답지 못한 삶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주거비용과 교육비, 열심히 일해도 계속 빚을 져야만 하는 이상한 시스템, 그마저도 불안정한 고용상태. 이 모든 것들이 정상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마치 비정상적인 것들이 정상적인 것처럼 포장되고 그러한 환경 안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구성원들끼리 무한 투쟁해야 하는 오늘 우리 사회, 그나마 그것의 진실을 알리고 그것을 깨기 위해 노력하는 버그들도 사라져 버린 우리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교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입 아픈 얘기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는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는 것에 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그의 삶을 본 받아 오늘을 살도록 초대받은 이들이다. 오늘의 세계는 진짜가 아니고 비정상적이며 하느님의 정의와 거리가 먼 세상임을 폭로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다. 매트릭스식으로 말하면 가짜의 현실에 균열을 내야할, 일종의 바이러스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기존의 시스템으로부터 제거될 위험을 안고 사는 존재, 바로 그들이 그리스도교인인 것이다.

박현준

우리신학연구소 초기 멤버이며 ?대 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신대 종교문화학과에서 학생들과 사제 혹은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가끔은 어렵지만 대부분은 편하고 유쾌한 선배님, 선생님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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