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Cool – 성인, 다다익선? – 조광

한국 천주교회는 1984년 103위 순교성인 시성 이후, 당시 시성되지 못한 순교성인들에 대한 추가 시복시성을 추진해왔다. 그 결과 내년에는 순교자 및 증거자의 125위 시복시성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들 외에도 ‘이벽과 동료 132위’,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에 대한 2차 시복이 추진되고 있고, 이와 별도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한국전쟁 순교자들인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동료 36위’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다.

이처럼 (제도)교회의 순교자 현양사업은 계속 이뤄지고 있지만, 정작 일반 신자들에게 ‘순교자’나 시복시성의 목적과 의미는 낯설기만 하다. 더구나 21세기 천주교 신자들에게 순교는 교리책에서나 나오는 옛날 이야기인양 자신의 삶과 연관 지을 수 있는 기회도 거의 없다. 거기에 한국 천주교회의 현양 사업과 운동이 신자 대중들의 원의로부터 상향된 것이 아닌 위로부터 하향된 것이 대부분인 터라 신자들에게는 강 건너 불구경, 자기 삶과의 연계성을 찾기에는 부족한 것이 현실.

이에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여, 순교자 현양 및 시복시성이 21세기 한국 천주교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함께 생각해봐야 할 점들은 없는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조광(고려대 명예교수)

시복시성은 왜 필요한가?

순교자들을 발굴하고 공경하는 것의 의미

21세기에 들어서서 한국교회는 한국교회사에 등장하는 여러 순교자와 증거자들에 대한 시복을 추진하고 있다. 이 시복의 추진은 시성의 전단계로 볼 수 있으니, 시복의 노력은 시성의 노력과 직접적으로 연계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추진하는 시복과 시성의 필요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자와 성인이란 누구인가부터 따져보아야 한다. 이에 대한 올바른 개념 없이 추진되는 시복시성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복자와 성인은 무엇인가?

동양의 전통에서 성인이라고 하면, 덕(德)이 충만하여 인(仁)과 의(義)를 실천하는 사람을 말한다. 중국의 요(堯)나 순(舜)과 같은 인물은 성인의 표상이 되어 왔다. 그리고 또한 동양사회에서 성인이라고 할 때에는 성군(聖君)을 지칭하거나 임금이 성군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부르는 칭호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성인이란 칭호는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는 최상의 존칭이었고, 사람들에게 함부로 부여할 수 없는 경건한 칭호였다.

또한 동양사회에서는 이 성인의 뜻을 충실히 받들어 해석하고 실천한 사람들에게 아성(亞聖)이라는 칭호 즉 ‘성인에 버금가는 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중국의 철학자 주희(朱熹)나 조선의 성리학을 완성한 이황(李滉)과 같은 이에게 이러한 아성(亞聖)이라는 칭호가 적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동양사회에서 성인이나 아성의 존재는 매우 희소하며, 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천명을 타고나거나, 사상과 문화의 발전에 비할 수 없이 큰 공헌을 남긴 이어야 했다.

성인을 넓은 의미에서 볼 때는,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모든 이를 지칭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지칭일 수도 있었다. 일반적 칭호로 우리 사회에서 성자(聖者), 성도(聖徒)로 불리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논하게 될 성인리라는 개념은 이렇게 넓은 의미로 파악되기 보다는 좁은 의미의 성인으로 제한한다. 이는 곧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적 덕성을 갖추고, 일생을 통해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일치되었던 사람으로서, 이러한 성성(聖性)을 교회로부터 공식적 인정을 받은 이로 한정한다.

한편 복자(福者)는 그 성덕(聖德)이 성인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고 판단되나, 그 공경의 범위가 특정 지역이나 단체에 국한되는 존재를 말한다. 그러므로 성인과 복자는 그 성덕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복자라 하더라도 그 성덕은 성인보다 얼마든지 뛰어날 수 있다. 이들 성인이나 복자는 모두 그리스도를 삶의 지주이며 바탕으로 삼았던 사람이라고 교회에서 인정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 공경의 범위에서 한다.

성인공경이란 무엇인가?

복자에 대한 공경이나 성인공경은 서로 동일한 기초를 가지고 있다. 즉, 성인이나 복자는 그리스도를 바탕으로 삼아서 하느님에 대한 최고의 사랑을 실천한 인물, 하느님의 거룩함을 나누어 받은 이들로 평가되었다. 성인공경은 신도들이 이들을 자신의 역할 모델로 삼아 이들과 유사한 삶을 살고자 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신도들이 공경하는 성인의 배후에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에서 성인공경은 일반적인 영웅숭배와 차이를 두고 있다.

복자에 대한 공경의 뜻도 성인공경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 특히 초기 교회에서는 순교자들을 완벽한 그리스도인이며, 하느님께 대한 최고의 사랑을 보여준 인물로 받들어 왔다. 그리고 오늘의 교회에서도 초기교회 이래의 전통에 따라 순교자에 대한 시복과 시성은 순교사실의 확인을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삼고 있다.

세계교회사를 보면 성인공경 문제 때문에 교회에 파란이 일어난 때도 있었다. 그리고 성인공경이 공인된 다음에도 중세에 이르러 성인공경의 지나친 관행은 여러 바람직하지 못한 파장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파행적 일들보다는 성인공경이 갖는 원래의 의미 때문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성인공경의 관행은 그 정당성과 건강함을 거듭 인정받고 있다. 단지, 현대교회는 성인의 범위로 지난날 ‘신앙의 증거자’란 관점으로부터 ‘사랑의 실천자’라는 측면을 더욱 중시하게 되었다. 이는 분명 현대의 교회생활에 활력을 줄 수 있는 해석으로 판단된다.

한국교회는 100여년에 걸친 박해의 과정에서 적어도 2천명 이상의 순교자를 배출했다. 그리고 박해가 끝난 다음에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죽어갔던 적지 않은 수의 신자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장한 삶을 자신의 모범으로 삼고자 함은 교회의 전통에 따르는 일이며 아름다운 일이기도 하다, 성인이나 복자에 대한 공경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시복시성운동은 우리 믿음을 살려 믿음살이를 살찌워서, 우리 살림살이를 풍요롭게 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이 때문에 시복시성은 필요하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 한국교회에서 103명의 성인이 태어난 지 30년이 되었다. 이는 우리에게 피를 나누어준 조상들이 우리의 성인이며 세계의 성인으로 선도되었다는 말이다. 이 시성식을 계기로 하여 우리와 세계의 신자들이 받들 수 있는 성덕을 갖춘 인물들이 그만큼 많아졌다. 그리고 곧 125명의 순교자와 증거자들이 시복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 이어서 모두 248명의 신앙인에 대한 시복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큰 반성을 요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땅에서 복자가 처음으로 탄생된 다음 100여년이 지났고, 한국의 복자들이 세계의 성인으로 선포되어 벌써 30년이 되어 간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한국 성인을 드높이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왔는가? 죽어버린 성인은 스스로가 드높여질 수 없다. 그 성인을 드높이는 일은 살아 있는 그들의 정신적 후예들이 성인의 정신과 삶을 지속적으로 실천해 나가야 가능하다. 복자나 성인으로의 선포는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본받으라는 하느님의 청촉이었다. 오늘의 믿음은 사랑을 통해서 증명된다. 자기희생을 무릅쓴 용기 있는 사랑을 통해서라는 말이다.

그러나 100여년 전의 시복식이나 30여년 전의 시성식 이후 한국교회는 우리 신앙의 선조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실천해 왔는지 반성해야 한다. 교황청에서는 최근 자신의 신앙을 사랑으로서 증거한 루터교 신자 몇 명에게 복자의 칭호를 주었다. 지난날의 열교인(裂敎人)이 가톨릭 복자가 되었다. 이만큼 시대는 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복운동을 통해서 그들의 믿음을 제대로 밝혀주고 있는가 의문이 간다. 시복시성을 위한 ‘학술적 검토 작업’이, 만일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각본에 따른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수치가 될 것이다. ‘악마의 변호사'(defensor diaboli)를 찾지 않으려는 한국 교회의 풍토에서 시복이나 시성을 위한 노력이 가져야 할 학문적 객관성은 담보될 수 없다. 이는 세계교회의 슬픔일 수 있으며, 우리 한국교회의 불행이 될 것이다.

새로운 시복과 시성을 위해 노력한다면, 당연히 이미 시성된 이들을 모범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이 더욱 많아져야 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그 ‘무수한’ 순교자를 배출했다고 자랑하면서도, ‘순교자가 아닌 복자’나 ‘성인’을 하나도 배출하지 못했다면, 이는 분명 문제가 있는 일이다. 어찌 보면, 우리 스스로가 그 성인들을 본받으려 하는 데에 집중하기보다는, 순교자의 시복과 시성에 너무 큰 비중을 두고 있지는 않았나 생각된다. 죽은 성인을 빛나게 하는 것은 살아 있는 우리의 양심이며 행동이다. 이웃과 겨레와 인류를 위해 드러내야 할 우리의 뜨거운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양심이나 신앙에도 문제가 있다. 이것이 오늘날의 큰 문제이다.

한편, 우리나라는 인구의 90% 가까이가 가톨릭신앙과는 무관한 존재들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성인관(聖人觀) 전통적 동양의 성인관이다. 이들에게 우리의 성인을 설득하기 위한 장치가 현재로는 거의 없다. 이 상황에서 시성식이 집안잔치에 그치지 않으려면, 우리 인구의 90%를 설득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어쩌면 성인이란 한자어보다는 차라리 성자(聖者)라는 용어가 한국사회에서는 더 가톨릭적인 단어일 수도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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