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Cool – 성인, 다다익선? – 강석진

강석진

나와 다른 세상의 사람들?

– 21세기 ‘순교 정신’의 재해석

내년이면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여의도 광장(서울 소재)에서 103위 순교자 시성식이 거행된 지 30년째가 된다. 그런데 지금 기억나는 건 교황님이 한국에 오셨다는 것, 수많은 신자들이 여의도 광장에 모여 손에 태극기 같은 것을 열광적으로 흔들었다는 것, 시성식이 끝나고 여의도 광장에 쓰레기가 없었다는 것 등의 기사다. 103분의 순교자들의 삶과 그들이 과연 누구였는지에 대한 기억은 그다지 없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에 왔다는 사실이 그 날의 시성식 보다 더 중요한 기사였던 것 같다.

이후 역사를 공부하고, 특히 한국 교회사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1925년 시복식 이후 여러 교회 잡지 안에서 거의 비슷한 내용들이 반복됨을 알게 되었다. 그 내용인즉, ‘조선 후기 박해 시기’에 있었던 박해자들의 처참하고 끔찍하며 비인간적 고문과 잔혹한 형벌의 강조, 천주교 신자들의 ‘용감한 신앙 행위’ 그로써 103위 순교자들 모두 ‘장하고 장엄함, 탁월한 용맹과 투철하고 놀라운 신앙적 행위, 거룩한 천상적 은총과 감히 근접할 수 없는 영광된 모습’ 등의 수식어와 함께 ‘그들의 죽음’이 칭송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나처럼 신앙심이 부족하고, 인간적인 약점에 쉽게 걸려 넘어지고, 사소한 것에도 참을성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토록 찬란한 영광의 순교자’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고, 심지어 전혀 신앙인답지 않는 모습만 보여 그저 부끄럽게만 생각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 부끄러움이 급기야 ‘우리 순교자’들은 나와 다른 세계 사람이며, 이질적이고, 알게 모르게 거부감을 주는 존재로 다가왔다. 또한 순교자들은 죽음으로 신앙의 모든 질문과 의문에 ‘정답과 모범’을 줌과 동시에 천상에서 승리의 깃발을 들고 계신 ‘개선 장군’의 모습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나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아니 상관이 없다고 하기에는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

언제부터 우리는 순교자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신앙 선조들이 친밀감이 아닌, 내심 깊숙한 이질감을 주는 존재가 되었을까?

장엄해도 너~무 장엄한

조선 천주교회는 1784년 이후 자발적 신앙의 수용 및 1785년부터 정치·사회·문화적인 충돌로 인해 크고 작은 박해의 시기를 겪었고, 1791년 이후부터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를 선택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1831년에 조선 교구가 설정된 후 1836년부터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한 선교사들에 의해 수집됐다. 창설 동기부터 ‘순교 신심’과 깊은 연관이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 선교사들은 천주교 때문에 박해를 받고 죽음을 맞이한 조선 신자들의 시복 시성에 앞장서게 된다. 그리하여 시복시성을 위한 자료 수집을 위해서 당시 순교자들이 박해 앞에서 어떻게 ‘장엄. 거룩하게’ 죽었는지에 대한 자료들이 필요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82명의 순교자들이 1857년 9월 23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한국 순교자 시복조사를 접수하는 법령이 반포되기도 하였고, 그 중에 79명이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Pius) 11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이 후 24명이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복’을 위한 ‘장엄한 죽음의 자료’ 수집에만 급급하다 보니, 정작 소중하고 인간적인 자료들을 놓쳐 버린다. 즉 우리 순교자들이 순교 이전에, 그들은 어떻게 가정을 꾸리며 살았고, 주변 이웃들과 어떻게 지냈으며, 박해를 피해 어디로 갔으며, 무엇을 먹고 마셨으며, 그런 가운데 성사 생활은 어떻게, 믿음살이 생활을 어떻게 이루어 나갔으며, 또한 배교의 유혹을 받지는 않았는지, 혹 받았다면 어떻게 극복했고, 아니 배교를 했다면, 그 때의 심정이 어떠했고, 그리고 다시금 천주교로 돌아가고자 했을 때 어떻게 자신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일련의 진지하고 인간적인 삶의 이야기는 서서히 기억 속에서 다 잊혀 지게 되었고, 결국은 잃어버리고 말았다.

시복시성 대상자들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이며, 우리와 같은 약점과 상처를 갖고, 우리와 같은 유혹에 쉽게 걸려 넘어질 수 있는 분이지만, 그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었고, 선택한 분이었다. 그런데 그 본질적인 이유 역시 인간이기에 체험된 우리 주님의 사랑이 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는 그 소중하고 따스한 인간미 담긴 이야기들을 아직 다 밝히지 못한 가운데 하물며 또 다시 많은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시성을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무슨 뜻 혹은 무슨 의도로 그리들 하는지에 잘 모르겠다.

21세기의 임무, 제대로 된 역사 발굴이 필요하다

이제는 오늘날 우리가 순교 정신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신앙 선조들의 총체적으로 살아있고 생생한 이야기들을 되살리는 작업이 아닐까 싶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우리 선조 모두를 ‘순교자’와 ‘비순교자’, ‘순교자’와 ‘배교자’ 이렇게 이분법적인 잣대로 분류하는 습관을 놓으려는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나라, 우리 모태의 역사를 신앙 때문에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만들어 버리는 꼴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박해 시기의 이야기, 즉 우리 일반의 조상 뿐 아니라 신앙의 조상들, 그리고 ‘순교자’ 뿐 아니라 ‘박해자’, ‘순교자’ 뿐 아니라 ‘배교자’까지도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 더 나아가 ‘배교자’ 뿐 아니라, ‘밀고자’까지도 박해의 상황 전체 구도 속에서 볼 수 있어야겠다. 이렇게 박해시기를 총체적으로 볼 수 있을 때, 아직 발견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순교와 배교의 이야기, 배교와 밀고의 이야기, 밀고와 순교의 이야기가 맞물리면서 하나 둘 이야기가 살아날 것 같다.

현재 또다시 시복 시성을 준비하는 분들의 마음을 이 필자가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을까마는 이제 이 글을 읽는 우리들만이라도 박해시기를 살았던 우리 신앙의 조상들 양반 뿐 아니라 중인, 양인, 천민들까지의 죽음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온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들의 살아온 이야기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비록 우리가 제도권 교회가 앞으로 거행하고픈 놀랍고도 탁월하고 규모가 크고 멋들어진 시복 시성식의 의도에는 감히 근접하지는 못할 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캐내는 순교자들의 이야기 안에서 함께 웃고, 함께 울면서 그들의 마음 깊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박해 시기, 그 당시를 살았던 우리 선조들 모두의 생명, 즉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은 우주와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되살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어쩌면, 진정 순교의 이야기는 ‘장엄한 죽음’의 이야기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 삶 안에서 살아있는 이야기, 즉 날마다 부활하는 부활의 이야기인 것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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