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Cool – 성인, 다다익선? – 이미영

이미영

죽음보다 삶을 기억하는 순교 영성

한국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성인의 수가 네 번째로 많은 나라이다. 한국 교회사 관계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순교의 사례는 최소한 2,000여 건에 이르고 무명의 순교자까지 추정하면 1만 명에 이르니,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의 삶과 신앙을 발굴하고 복원하기 위한 순교자 현양 사업과 시복시성 운동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 교회 안에서는 순교자 현양 대회나 성지순례를 통해 순교자들의 ‘죽음’을 기억하지만, 그 죽음에 이르게까지 된 ‘삶’은 잘 와 닿지 않는다. 강석진 신부의 지적처럼 현재의 순교 신심이 과거 비범한 신앙 선조들의 특별하고 비장한 죽음을 감탄하는데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가들은 초기 교회부터 신자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된 순교 신심이 ‘죽음’보다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성숙한 신앙이었다고 주장한다. 초기 교회 천주교 신자들은 직접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명하는 순교를 잠시의 순교로 규정하고, 일상생활을 통한 신앙의 실천과 희생을 평생의 순교로 여기는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갔다. 박해와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현실에서 체험하고 증거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였지만, 그러한 때가 온다고 하더라도 평소에 신앙적 삶이 잘 훈련되어 있지 않다면 증거자가 될 수 없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편, 순교를 요구한 시대적 배경은 배교자들을 일방적으로 탓하기만 어려운 복잡한 현실도 있었다. 대규모 박해를 촉발하게 된 교황청의 ‘조상 제사 금령’은 전통문화와 충효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 질서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조치였다. 이 때문에 많은 신자, 특히 양반계층 신자들은 자의 또는 타의로 배교하게 되었지만, 그들이 지닌 본래의 신앙과 복음적 삶까지 포기하였는지는 논란이 많다. 작년 가을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설립 60주년을 맞아 ‘순교’를 주제로 한 제1회 국제심포지엄에서 심상태 몬시뇰은 이런 교회의 잘못된 정책에 등을 돌렸을 뿐 복음적 진리를 저버리지 않고 진실되게 살아간 이들에 대해 교황청은 사과하고 이들의 신앙 역시 복원되고 공경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우리의 순교 영성을 새롭게 해석하도록 요청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신앙 선조들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천주교 신앙을 서구의 선교사가 전해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 공부하며 받아들였다는 독특한 출발도 자랑스럽고, 철저한 유교 신분제 사회에서 평등의 복음을 현실 속에서 실현한 모습도 놀라우며, 고문과 처형이 극심했던 박해시대를 이겨내고 신앙을 지켜낸 그 굳건함에는 절로 숙연해진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가 아직 ‘신앙의 증거자’가 아닌 ‘사랑의 실천’으로 기억되는 복자나 성인을 배출하지 못했다는 조광 교수의 뼈아픈 질책이나, 민족과 인류를 위해 헌신한 인물보다 신앙의 증거에 투신했던 교회 내 인물을 우선하여 시복 추진하는 데 대한 황종렬 박사의 우려는 지금 우리 교회가 지닌 순교 영성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순교의 의미를 죽음의 여부보다 신앙을 따르는 삶으로 확장시켰던 선조들의 순교 영성을 우리는 어떻게 이어가야 할 것인가? 오늘날의 한국사회는 목숨을 내걸고 신앙을 지켜야 하는 박해상황은 아니지만,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협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도전은 끊임없이 더 강력하게 이어지고 있다. 박해자들이 원했던 것이 순교자들의 목숨이 아니라 그들을 설득하여 저항을 멈추게 하는 일이었음을 기억해 보면, 삶과 신앙이 따로따로인 우리의 현실은 어쩔 수 없음을 핑계로 수시로 배교하는 삶에 회유되고 있지 않은가 돌이켜보게 된다. 복음적 진리에 어긋나는 현실을 마주하였을 때, 과연 우리는 자유롭고 용감하게 신앙의 삶을 증거할 수 있을까? 이는 일상에서 순교 영성을 살아가며 성숙한 신앙을 단련시킬 때 가능할 것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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