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마실 – 공(公)을 사유화하지 말라

박승옥

지금 여기로 걸어 나온 십계 7계명

공(公)을 사유화하지 말라

최형묵

성서가 말하는 소유권

“도둑질하지 못한다.” (출애 20,15)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 (출애 20,17)

십계명의 이 내용은 모종의 소유권을 전제로 하는데, 통상 배타적인 소유권 관념이 희박한 성서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이 계명이 전제하는 소유권의 의의는 무엇일까?

성서는, 고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생활 및 생산수단인 땅에 대한 소유권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땅은 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진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레위 25,23).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땅에 대한 경작권만을 갖고, 그 경작권은 가문 단위로 세습되었다. 그것은 점유권에 해당할 뿐 오늘과 같은 배타적 소유권과는 달랐다.

땅이 하느님의 것이라는 성서의 정신은 땅 뿐 아니라 땅 위 모든 물질에 해당한다. 땅에 대한 소유권의 부정은 모든 피조물의 공유 정신의 구체적 표현이며, 이러한 정신은 소유권에 기반한 인간의 지배를 부정한다. 세상 만물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을 말하는 성서의 입장은 그 어떤 형태로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부정한다.

이는 예언자들이 수없이 되풀이해 강조하는 ‘정의’(쩨다카) 개념에서도 분명히 확인된다. 성서의 정의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원상 복귀시키는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을 위하여 불의한 재물이 되돌려져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는 곧 차별적 소유에 의해 축적된 재산 그 자체가 불의하며 모든 사람의 생존을 위한 것으로 되돌려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축복하는(루카 6,20) 반면 부자들을 저주하는(루카 6,24) 예수의 말씀 또한 같은 맥락이다. 이런 축복과 저주는 재물의 소유 여부 자체가 아닌, 그럼으로써 가난한 자와 부자가 나뉘는 관계를 두고 한 말이다. 초대교회가 재산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지향하였다는 것(사도 2,43-47; 4,32-37)은 바로 그와 같은 성서의 일관된 정신을 따른 것이었다.

이처럼 배타적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성서 전반의 맥락에 비춰볼 때 여기서 전제하는 소유권은 매우 제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노동을 통해 삶을 꾸려갈 것을 명시하는 성서의 입장에서 최소한 자신의 삶을 책임 있게 꾸려가기 위한 조건으로 노동을 통해 얻은 소산에 대한 처분의 권리를 인정했다고 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런데 성서에서는 그 노동 소득에 대한 자유로운 처분권도 공동체의 이익과 사회적 약자를 위해 본질적으로 제한을 받는다. 십일조 규정은 바로 그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결국 성서 전반을 통해 볼 때 제한적으로 인정되는 소유권마저도 공동체의 보존과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데 근본 의의가 있는 것이지 배타적 소유권을 옹호하는 데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소유권에 앞선 노동권

성서는 오히려 소유권에 앞선 노동권을 중시한다. 창조 이야기는 하느님의 ‘일’과 인간의 ‘일’을 유비(맞대어 비교)적으로 이해함으로써 하느님과 인간이 동반자적 관계임을 보여 준다. “야훼 하느님께서 아직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던 것이다.”(창세 2,5)라는 구절에서 하느님과 인간은 상호 조응하는 관계이고, 이 관계로 말미암아 세상의 만물이 생성된다. 이 협력관계를 매개시키는 것이 ‘노동’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노동을 통해 자신을 펼치시며 인간은 그 노동을 통해 하느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한다. 노동을 통해 결합된 이 관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만 머물지 않고, 만물을 생성시키고 그 생성된 것들의 생명까지도 온전히 보존시키는 역할을 한다.

성서는 하느님에 의해 긍정된 노동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규정을 제시한다. 기본적으로 강제노동 상태에서 해방된 출애굽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구약성서의 법전들에서는 노동과 휴식,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여러 규정을 두었다. 강제노역과 과중한 조세의 부담으로부터의 해방, 노임의 정시 지급, 노동소득을 강탈하여 자유인을 노예화할 수 있는 이자의 금지 등은 자신의 몸으로 일하며 살아가는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구약성서의 법정신은 예언자들을 통해 예수에게도 계승되었다. 예수가 스스로의 몸으로 노동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의 처지에 기본적인 관심을 두었다는 사실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또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참된 안식을 선포함으로써 육체를 소진하는 노동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했다.

하지만 그것이 창조적 활동으로서 생명을 살리는 노동의 근본적 의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역설적이게도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는 인간의 존엄을 강조함과 동시에 생명을 살리는 노동의 참 뜻을 환기시킨다. 안식일에도 노동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안식일의 참뜻과는 상관없이 단지 율법을 어겼다는 이유만으로 죄인 취급을 받을 때, 거꾸로 예수는 안식일에도 노동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생명을 살리는 노동의 근본적 의미를 환기시켰다.

소유권과 노동권의 확립

소유권과 노동권은 근대 이후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며 그 기본 개념이 확립된다. 시민혁명을 통해 신앙과 양심의 자유, 사상과 정치적 표현의 자유와 더불어서 개인의 생명권, 재산권이 중요한 가치로 확립되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구체적인 내용으로서 재산권이 옹호가 되었지만 자본주의 체계가 완전히 확립되면서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권리를 제약하는 문제점이 드러났다.

본래 로마의 물권법에서 유래하는 재산 소유권은 물건에 대한 소유자의 절대적 처분권을 뜻하는 것이었을 뿐 인간에 대한 소유 및 지배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체제에서 노동시장이 그 구성 요소가 되면서 재산 소유권이 사실상 인간에 대한 지배까지 포함하기에 이른다. 노동력과 그것을 지닌 사람이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자본 소유자가 사실상 노동자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본래 재산 소유권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므로,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재산 소유권은 엄격하게 물건에 대한 권리로만 한정되어야 할 필요가 제기되었다.

그에 관한 국제적 규범 역할을 하는 <세계인권선언>은 제22~27조에 걸쳐 사회적ㆍ경제적 권리의 내용으로 사회보장, 노동, 자유로운 직업선택,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정당한 보수, 노동조합의 결성과 가입, 휴식과 여가, 적정 생활수준(의료, 음식, 의복, 주택, 무상교육 등 포함)에 대한 권리를 규정한다. 그 중 특히 노동삼권(단결, 단체교섭, 단체행동)은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권리로 국제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기본권으로서 노동권의 보장은 노동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상응하는 생존조건을 확보하는 데 그 근본 의의가 있다. 노동자는 그것을 통해서만 사용자와의 관계에서 계약의 실질적 자유와 평등, 그리고 노사 대등 결정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본권으로 사적 재산의 소유권이 보장되는 현실에서 두 기본권이 충돌을 빚는 사태가 발생한다. 애초 노동권의 형성 자체는 소유권의 행사가 인신을 제약하는 노동시장의 상황에서 이뤄진 만큼 두 기본권이 항시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결국 소유권과 노동권을 동시에 인정하는 현대 자본주의국가의 법체계 안에서 두 권리주체가 법적으로 동등한 관계를 형성하여 평형을 이루는 것은 가장 이상적인 관계인 것이다.

노동권보다 소유권의 편을 드는 한국의 법리

오늘날 소유권과 노동권의 충돌이 새삼 문제가 되는 것은, 한편으론 노동권 보장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추세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소유권에 기반한 경영권 행사의 배타성을 내세우는 경향에서 비롯된다. 특히 경영권의 행사가 재산의 처분과 관련된 고유한 소유권에 한정되지 않고 인사관리의 영역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경영권과 노동권은 충돌하게 된다. 이로써 오늘날 노동권과 소유권의 충돌 문제는 노동권과 경영권의 충돌 문제로 구체화된다.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경영권은 기업 운영에 관한 사용자, 곧 소유권자의 고유한 권리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그에 대한 이해는 나라마다 다르고 그 실체를 확정하기 어렵지만, 발전한 국가들 사이에서는 전반적으로 노동자의 경영참여가 확대되는 보편적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그러한 상황에서 경영권의 배타적 경계 설정은 결코 자명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경영권이 헌법이나 노동관계법 등에 명시되어 있지 않음에도 그것을 헌법상 소유권 보장 조항에 근거한 법적 개념으로 확립하려는 법리가 실질적인 위력을 발휘한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대법원은 ‘구조조정의 실시 권한은 경영권에 속한다’는 추상적 언명으로 대응하다 2003년 한국가스공사 사건에서 결정적으로 이른바 경영권을 헌법상 기본권으로 인정, 그에 대항하는 파업권의 행사를 전면 부정하는 법리를 채택했다.

사용자의 배타적 권리로서 경영권의 법적 실체성을 인정하는 법리가 현실적으로 노동권과 충돌하는 경우는 원만한 단체교섭의 결렬로 파업과 같은 단체행동으로 이어질 때이다.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의 전형으로서 파업은 형법상 업무방해죄에 해당하는 것으로 불법시 된다. 외국의 경우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을 불법시하는 법률은 19세기말이나 20세기 초에 폐지된데 반해, 일본 형법을 모체로 한 대한민국 형법에는 위력업무방해죄라는 형벌규정이 있어 이를 통해 사실상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을 범죄로 처벌하고 있다. 또한 이런 법리는 파업 노동자들 뿐 아니라 이른바 공모공동정범 법리에 의해 파업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연대하는 세력에게까지 적용된다.

한국 법원의 경영권 보장의 법리는 명백히 노동권을 제약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파업을 형법상 범죄로 간주하는 법리에 민법상의 손해배상 책임까지 부과하는 현실은 노동권을 극도로 제약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과제로서 경제민주화

성서의 입장에서 소유권은 제한적으로 인정될 뿐 배타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제한적으로 인정되는 소유권도 노동 소득에 대한 처분의 범위 내에서 인정되고, 또한 그것이 생존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노동권을 보호하는 성격을 지닌다. 성서는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를 소유권에 앞서는 권리로서 보장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경영권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경영권이 독립적 실체성을 갖는 것인지 확정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한국의 현실에서는 그것이 소유권에 기반한 사용자의 고유한 권리로 인정되지만, 성서의 입장에서는 노동권을 우선하여 경영권 행사에 제한을 가하고 이로써 충돌을 조정하는 것이 정당하다 할 수 있다. 성서의 입장은 공동체의 온전성을 보전하는 방법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권 보장을 우선한다. 그러므로 피조세계 전체의 보전과 연관성 면에서, 오늘날 기업의 사회적 책임 및 환경적 책임과 더불어 현대 기업 경영의 문제를 성찰해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경제민주화가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지만, 주로 재벌 규제 내지는 개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독점 자본의 폭력성을 규율한다는 점에서 재벌에 대한 규제가 경제민주화의 한 내용은 분명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소유권과 노동권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역사적 조건들 안에서 자본과 노동의 동등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다. 그 동등한 관계를 형성하는 요건은 자본의 소유권 주장의 절대성을 제한하고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수행되는 노동의 몫을 정당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로 대안적인 교회 공동체를 꿈꾸고 있다. 이론과 실천, 신학과 목회의 통일을 지향하며 교회 밖의 여러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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