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복음 사이 – 십자가는 어디에나 있다

김선실

십자가는 어디에나 있다

루카 9,23-26

23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의 복음은 그리스도교 신자에게는 핵심적인 실천 사항임에도 어쩐지 실천할 자신이 없어 성인이나 순교자를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모르면서도 십자가가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역사의 십자가, 시대의 십자가, 삶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우리의 이웃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지금 여기 우리의 현실 속에 존재한다.

지난 8월 14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087차 수요시위는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 기림일 : 뛰어난 업적이나 바람직한 정신, 위대한 사람 등의 훌륭함을 말하는 날 – 편집자 주) 선포하는 특별한 자리였다. 1991년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고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에서 처음으로 공개증언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범죄사실을 만천하에 고발한 지 22년이 지났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고통은 개인적인 것을 넘어서는 역사적인 것이다. 식민지 백성이었기에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갔던 우리 민족의 역사적 아픔이고, 전쟁시기에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의 대표적인 사례이기에 여성의 아픔이기도 하다. 수요시위에 참석한 비슷한 연령대의 할머니가 피해자 할머니의 손을 잡으시며 자신을 대신해 고통을 당하신 것이라며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셨다.

피해자 할머니들은 자신들이 겪은 고통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고통이었고, 특히 여성이었기에 더욱 큰 고통을 당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수치심에서 벗어나셨고 당당해지셨다. 이제 할머니들은 말한다. “앞으로 우리와 같이 폭력에 희생되는 여성들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증언한다.”고. 이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세계적인 여성인권 문제가 되었고, 특히 여성에 대한 폭력 근절과 예방에 앞장서는 국제적인 평화운동이 되었다.

지난 7월 내가 활동하는 파트너십 연구소에서는 ‘몸의 지혜를 회복하는 트라우마 치유 워크숍’을 진행했다. 이 워크숍은 Somatic Experiencing이라는 트라우마 치유방법, 즉 몸의 감각을 통해 과거의 트라우마를 다시 다루며 우리의 몸이 지닌 본능적인 치유능력을 회복시켜 주는 것을 배우는 자리였다. 이 워크숍을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사실 이 워크숍은 2002년 가톨릭중앙의료원 파업을 주도했다 해고된 5명의 노동조합 간부들을 만난 후 준비하게 되었다. 산업별 노동조합이 생겨나던 당시, 노동운동의 흐름 속에서 보건의료노동조합에 대한 병원들의 이해부족에서 생긴 파업으로, 결국 책임을 지고 해고될 수밖에 없었던 핵심 간부 5명은 그때의 고통을 여전히 겪고 있다. 물론 아직 복직도 되지 않았다.

참석자 중에는 1970년대 초부터 노동운동을 하는 중에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거나 감옥에 갔던 분들이 많았다. 1980년대 학생운동을 하다 선배의 분신을 지켜봤던 분은 용산참사 때 남편을 잃은 유가족의 치유과정을 보던 중 끝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울면서 자리를 뛰쳐나갔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 과정에서 피해를 당한 분들에게는 명예회복과 보상이 다소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그들의 트라우마와 고통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이날, 70년대 초 대학시절 민주화 운동에 참가했고 광주민중항쟁 때 감옥에 가서 고문을 당했던 분은 위장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입원했다 의식이 혼미해지자 과거 고문을 당했던 상태를 재현하며 고통스러워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트라우마의 영향은 그런 것이다.

트라우마 워크숍은 개인의 트라우마가 결코 개인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자리였다. 우리의 역사와 사회 현실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누군가는 이유도 모른 채 피해자가 되었고, 누군가는 사회의 변화를 위해 스스로 그 고통을 기꺼이 짊어졌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현재 트라우마의 고통을 겪고 있다.

다행히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트라우마 치유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높아지고 있다. 쌍용자동차 해고 사태로 인한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트라우마 치유 과정은 TV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 이번 워크숍의 강사인 유프라시아 니아키 수녀(메리놀수녀회)는 트라우마 치유 과정 속에서 영성이 일깨워진다고 말했는데, 결국 트라우마 치유는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한 갈망이자 노력인 것이다.

가톨릭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역사적 시대적 상황 속 이웃들의 고통을 십자가로 이해한다면 그들의 고통은 바로 우리의 고통이고, 그 고통을 함께 치유하는 것은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충만한 삶을 갈망한다면 이 시대의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겪고 있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것 뿐 아니라 그러한 고통을 야기시키는 사회적 요인들을 변화시키는데 동참해야 한다. 혼자서 십자가를 짊어지는 용기는 없지만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는 용기는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다행히 우리에게는 십자가만이 아니라 부활의 희망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부활의 기쁨을 알려주시지 않았던가!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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