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A – 아이가 성범죄 가해자가 되었습니다.

이현주

Q

살다보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대학생인 아들이 교내에서 한 여학생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지금껏 별다른 말썽이나 사고 없이 지내왔던 아이라 이번 일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경찰서에 앉아있는 아들을 보는 순간 너무나 화가 났지만 한편으론 참 처량하고 가여웠습니다. 아들의 말은 해당 여학생의 옷차림에 호기심이 생겨 순식간에 일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녀석은 인생이 끝난 것처럼 울고, 저 역시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여학생과 여학생의 부모님께 백배 사죄했지만 그분들의 상처는 또 얼마나 크게 남을지 저 역시 딸 가진 부모로써 사죄하고 또 사죄할 뿐이었습니다.

벌써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 현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제가 모르는 아이의 모습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앞으로 아들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지 막막합니다. 부모노릇을 못해 이런 일이 생긴 것만 같아 괴롭습니다.

이제 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얼마나 당황하셨습니까? 참, 사람 산다는 게 그렇습디다. 말씀하신 대로, “전혀 예상 못한 일”이 뜬금없이 닥쳐서 사람을 놀라게 하고 좌절시키고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는지 막막하게 만들곤 하지요.

누군가 인생이란 달리는 열차에 역방향으로 앉아있는 것 같다고 했던데 정말이지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순식간에 스쳐지나가는 ‘현재’일 뿐, ‘과거’는 갈수록 멀어지고 ‘미래’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더군요.

질문하신 분은 아드님이 그런 일을 저지르리라고 상상도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그건 아드님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자기가 그런 일을 저지르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을 거란 말씀입니다. 그랬으니까 “자기 인생이 끝난 것처럼” 울었겠지요.

자, 하지만 아드님이 저지른(?) 그 사건은 문자 그대로 ‘과거지사’가 되었습니다. 앞에서 괄호 안에 ‘?’를 넣은 것은 그 사건을 아드님 혼자서 맘먹고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자기 말대로 그것은 순식간에 “저질러진” 일이었어요. 스스로 주체가 되어 움직인 능동적 행위가 아니라 어― 하는 사이에 저한테서 일어나버린 피동적 행위란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드님한테 아무 책임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대학생쯤 되었으니 자기한테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응당한 책임을 져야겠지요.

하지만 방금 ‘책임’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제가 이 말에 담은 뜻은 지난 일에 연관되어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일을 잘 수습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무슨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로 말미암아 생긴 좋지 않는 결과를 떠맡고 상응하는 벌을 받는다는 뜻으로 “책임을 진다”고 하는데 저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뭐가 잘못되었다 칩시다. 예를 들어 집에 불이 났어요. 그래서 불 낸 사람을 찾아 벌을 주면 뭐가 어떻게 달라진다는 겁니까? 불에 탄 집이 도로 멀쩡해지기라도 하나요?

잘못된 일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그 일을 수습할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책임을 ‘레스폰스빌리티’(responsibility)라 하는데 이는 ‘response’(응하다)에 ‘ability’(능력)를 합쳐서 만든 단어지요. 그러니까 잘못된 일을 제대로 수습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책임자라고 하는 겁니다. 벌을 받는 게 아니라 잘못을 수습하여 그것으로 더 나은 내일을 창조하는 것이 ‘책임’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라는 얘기올시다.

아드님과 부모님이 이런 의미에서 이번 사건에 대한 ‘책임’을 잘 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럼 우리는 이번 사태를 어떻게 하면 잘 수습할 수 있을까요? 달리 말하여, 잘 책임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 뜻밖의 사건을 우리 인생의 걸림돌 아닌 디딤돌로 삼아서 더욱 건강하고 밝은 내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까요?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지난 일을 엄연한 사실로 인정하여 받아들이되 그것에 붙잡혀있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과거’는 달리는 열차의 차창 밖으로 멀어져만 갑니다. 누구도 그것을 붙잡을 수 없어요.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고 다른 것으로 바꿔놓을 수도 없는 게 과거입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는 것이 전부예요. 아니, 우리가 과거에 대하여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과거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지나간 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우리 인생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디딤돌이 될 수도 있는 만큼, 어쩌면 과거에 대한 해석이 과거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아니, ‘어쩌면’이 아니라 ‘당연히’ 그렇습니다. 꿈보다 해몽이란 말이 그래서 있는 것 아니겠어요?

없던 일로 만들 수도 없고 달리 변경할 수도 없는 ‘과거지사’를 인생의 걸림돌로 삼느냐 디딤돌로 삼느냐, 이 중요한 선택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일을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메시지가 담긴 봉투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예, 우리가 그렇다고 보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한테는 그런 거예요.

저도 질문하신 분처럼 예상치 못한 일들을 수없이 겪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 어째서 이런 일을 내가 당해야 하는가? 그럴 때 저는 “하느님, 이게 뭡니까? 왜 제가 이 일을 겪어야 하는 겁니까?” 여쭙지요. 그때마다 그분의 답은 늘 이렇더군요. “네가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그런다.”

그러면 제 머리는 더 이상 있지도 않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지금 여기’로 돌아와서 당장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할 수 있는지를 묻게 되더군요. 그러려면 먼저 제가 겪은 일에 담긴 그분의 메시지를 제대로 읽을 수 있어야겠지요.

주신 질문에 답할 시간이 되었군요. “이제 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물으셨는데, 그거야말로 우리에 대하여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아시고 우리의 현재뿐 아니라 미래까지도 환하게 아시는 하느님께 여쭈어야 할 질문입니다. 당장 진심으로 여쭈어보십시오. 묻기를 기다리셨다는 듯이 분명한 답을 주실 것입니다.

글쎄요, 제 생각에는 시방 하느님께서 질문하신 분과 아드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사랑하는 아무야, 이래도 나를 찾지 않을 테냐? 이제부터 우리 서로 좀 더 깊게 사귀어보자꾸나.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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