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전 – 그림이 그리는 그리움에 물들다

김옥자

자연과 멀어지면 사람은 거칠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태생이 자연이기 때문이지요. 그러기에 자연 파괴 행위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박그림)

산양의 친구로 묵묵히 활동하는 운동가이자 국내 유일의 산양전문가. 1996년부터 전국의 산을 찾아다니며 기록한 ‘산양분포 조사’는 국내에서는 유일한 산양 분포 자료로 산양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반도에 산양이 살고 있는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 설악산 산양을 알리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전국순회를 하고, 원하는 곳 어디든 강의를 다녔다. 산양의 최대 서식지를 위협하는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를 막기 위해 대청봉에서 오체투지를 하고 광화문에서 일인시위를 했다. 산양의 보전을 위해 두만강과 러시아의 현장조사를 했으며 러시아 산양전문가를 초청해 설악산에서 공동조사를 벌이며 국제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도 했다. 산양보다 더 산양을 잘 아는 산양의 친구, 산양을 닮았다는 이야기가 가장 기쁘다는 설악의 산신령 ‘박그림 아우구스티누스’를 만났다.

은어가 놀던 한강의 기억

7남매의 장남이던 그림은 서울 신촌에서 태어났다. 지금이야 온갖 유행을 쏟아내는 젊음의 도시이지만 그때만 해도 신촌은 그야말로 ‘새로운 촌’이었다.

“저 어렸을 때만 해도 지금하고는 완전히 달랐어요. 난지도 샛강 갯벌에서 게 잡고 놀았고, 신촌에서 홍익대를 가려면 서강역에서 기차를 타야했어요. 어머니가 모래내로 1주일간 모아둔 빨래를 하러 가는 날이면 형제들 모두 바구니에 빨래 들고 함께 갔죠. 당시 모래내에는 빨래를 삶던 집이 있어서 거기서 빨래를 삶아 모래내 맑은 물에서 빨고 말리는 동안 우리는 멱 감고, 밥집에서 밥도 사먹고, 옷 다 말리면 개켜서 집에 오곤 했어요. 그땐 한강에서 은어를 잡았어요.

설악산도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그 당시 설악산에 가려면 마장동으로 가서 하루 자고 첫 버스를 타야 산에 조금이라도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버스만 7-8시간 걸렸죠. 지금 케이블카가 시작하는 곳에는 마을이 있었고, 대청봉엔 온갖 식생물이 가득했어요. 그렇게 힘들게 한걸음, 한걸음 대청봉에 올라가면 정상에 대한 존엄성과 외경심에 저절로 무릎을 꿇곤 했죠.”

고3 시절, 우연한 기회 첫 발걸음을 한 설악산은 이후 그림에게 지독한 그리움이 되었다. 이후 그림은 설악산에 수시로 달려갔다. 산에 가면 누구보다 행복했다. 젊은 시절 짧은 공무원 시절을 보낸 그림은 회사에 다니기도, 경영을 해보기도 했지만 40대 중반 결국 설악산행을 결심했다. 그림은 왜 그렇게 산이 좋았을까?

“산이 그리워 못 견디겠더라구요. 이렇게 산 밑에 살면서도 가고 싶은 마음이 막 들면 가야해요. 산에는 설렘이 있어요. 내가 만날 산길, 동물들을 생각하면.”

그림의 말에 옆에 조용히 있던 아내는 ‘TV에서 겨울산만 나와도 가슴이 뛴다며 산에 갈 짐을 꾸리는 걸 너무 행복’해 한다고 말한다.

그림, 설악산에 깃들다

설악산행 결정 후 그림은 꿈 하나를 꾼다. 바닷가 근처 공소에서 뭔가 열심히 하던 꿈이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꿈에 본 공소를 찾느라 산과 바다를 헤매기도 했지만 이내 ‘공소는 설악산이고, 자신이 한 일은 하느님이 만드신 것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림은 처음 설악산에 내려와 ‘청초호를 되살리는 시민의 모임(청초호 유원지 공사 반대 모임. 결국 유원지 공사를 위해 천혜의 바다 호수 청초호는 40%가 매립되었다.)’에 함께 했고 이듬해 ‘설악녹색연합’을 창립해 비로소 설악산 국립공원의 환경 문제만을 위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설악산에 자주 오긴 했지만 설악산의 아픔이 피부에 와 닿은 것은 오히려 환경단체를 창립한 이후였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설악산은 훨씬 큰 상처와 아픔이 있었고, 누구도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현실을 목격했다.

하지만 그런 설악산에서의 생활은 육체보다 정신적으로 더 괴로웠다. 자연히 담배와 술에 의존했다. 워낙 술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설악산에서 그 양이 더 늘었다. 그런 그림을 잡아준 건 아내였다. 어느 날 아내는 이런 식으로 나가면 환경운동도 못하고, 건강도 망치고, 가족도 해체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림은 아내의 말을 듣고 그날로 모두 끊었다.

설악산에서 지낸 지 21년째, 그동안 그림은 설악산의 아픔과 상처를 기록하고 알리는 일, 모노레일 설치 반대, 설악산 세계자연유산 등록 추진, 대청봉 케이블카 설치 반대, 설악산 야생동물학교 개관, 그리고 산양과 희귀 동물의 보존을 위해 일 년의 반을 산 속에서 지냈다. 그런 그림의 행보에 2004년 국민훈장 석류장, 2007년 교보생명 환경상, 2012년 가톨릭 환경상 등이 주어졌다. 모두 환경과 관련해 그 공로를 인정하는 상들이다. 외로운 그림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을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크게 외롭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다만, 간혹 같은 일을 하는 분들 중에 ‘그게 되겠어?’ 하며 쉽게 포기할 때는 좀 섭섭하긴 했어요. 전 그게 ‘일’로만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자기 삶이면 포기할 수 없거든요. 얼마 전에 한 지역 매체에서 인터뷰를 하러 왔는데, ‘만약 케이블카가 놓인다면 어떻게 하겠냐’고 해서 ‘나는 한 번도 케이블카가 놓일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했더니 그래도 ‘만약에’ 하고 물어봐서 ‘나한테 만약이란 건 없다’고 했죠.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21년째 설악산에서 살고 있지만 그간의 활동들은 내가 한 것 같지가 않아요. 그때 그 일은 오늘 이 일을 위해 준비된 것이었구나 할 때도 많구요. 그리고 상을 받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런 상 하나 주고 마는 것보다 환경단체와 활동가들이 일할 수 있도록 정부의 지원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요.”

그림은 단주와 금연 뿐 아니라 생식과 금육도 한다. 그 역시 설악산의 삶 속에서 자연스레 하게 된 선택으로 이전 설악산에서 우연히 보게 된 산양에 대해 공부하면서부터였다. 산양은 설악산에 서식하는 대형 젖먹이동물로 멸종위기종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따로 국가 차원의 보존대책도 활동도 없었다. 민간단체의 연구도 전무. 그림은 자신이 직접 분포조사에 나섰다. 천적을 피해 험준한 바위지대에서 지내는 산양을 찾아다니다보면 취사도구도 불편하지만 그들이 사는 곳에서 밥해먹고 소리 내고 싶지 않았다. 결국 자신이 산에 맞춰야 한다는 생각에 생식을 시작했다. 그림의 생식법은 간단하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생식가루에 염분을 보충하기 위한 된장을 조금 넣고 물을 타서 마시면 끝. 거기에 견과류와 과일 몇 조각이면 충분.

산양 분포조사를 위해 자신의 식습관 모두를 바꾼 그림은 계절도 지역도 안 가렸다. 골짜기며 산줄기며 여름이고 겨울이고 모두 두 발로 돌아다녔다. 분포 조사의 매개는 ‘똥’. 똥 있는 곳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산양 생존 숫자는 200여마리. 그 큰 설악산에 겨우 200여마리다. 한해 수십만 명이 오고 가는 산 크기에 비하면 너무 적은 생존 숫자다.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서식지 보존이에요. 현재 산양 복원센터도 만들었는데 복원보다는 서식지 보존이 먼저인 거죠. 그렇게만 해주면 늘어날 상황인데 지금 추진 중인 케이블카 노선이 지나는 자리가 산양 최대서식지 가운데 하나에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실제 어느 동물이건 50마리 이하로 가면 멸종이라 보고 다시 시작하니 ‘복원’이지만, 지금은 그보다는 많이 서식하고 있으니 마음 놓고 살아가도록 간섭만하지 않으면 되는 거죠.”

완벽한 엇박자 행정이다.

돈독 오른 환경파괴 대마왕국

강원도에서 30% 양양군에서 70% 건설비용을 대는 대청봉 – 오색간의 케이블카 공사는 지난 8월 21일 서울 정부종합청사 국제회의장에서 공청회를 열었고, 9월초 환경부 공원위원회에서 가부간 결정이 난다. 문제는 공원위원회 구성 중 찬성측이 반대 측 숫자보다 많다는 건데, 무지한 정부 측 개발업에 외 과연 누가 케이블카 설치를 찬성하는 걸까? 아니 실제 대청봉에 케이블카를 설치한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은 과연 몇 %나 될까?

“적지 않은 지역민들이 케이블카 설치를 찬성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이익 증대죠. 하지만 안타까운 게 지역민들은 설악산에 기대서 살아온 분들이라는 거예요. 자신을 살게 해준 설악산이 병들었다고 하면 이제라도 설악산 보호에 나서야 하는데 케이블카 놔서 돈 벌어야겠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죠. 병든 어머님 젖을 빨면서 젖 안 나온다고 떼쓰는 아이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자신들은 이미 지금의 설악산과 전혀 다른 설악산을 경험했을 텐데 후손들에게 그때의 설악산은 못 물려줄망정 더 이상의 파괴는 막아줘야죠.”

하지만 실제 경제적인 투자대비 수익구조가 가능할지 의아하다. 상식적으로 케이블카로 산행 흐름이 빨라지고, 현재 동홍천에서 양양까지 공사하는 고속도로(이 역시 환경파괴의 전형이지만)가 2015년 완성되면 서울에서 양양까지 1시간 30분이면 도착. 굳이 숙박할 이유가 없어진다. 세계적으로는 이미 생태관광이 대세다. 느린 걸음으로 오고가면서 지역민들과의 나눔을 통해 여행의 맛을 음미하는데 우리는 반대로 가고 있다. 어느 날 드라마 한편에 나타났다 외지인들의 배만 불려준 정동진이 생각난다. 드라마에서 보여준 한적하고 우수에 찬 정동진 모래는 소란한 도시 카페촌의 장식물로 전락하지 않았나.

케이블카 설치 찬성의 논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장애인과 노약자의 조망권’을 내세우지만 이 역시 목적을 위한 허울일 뿐이다.

“장애인이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삶 속 공간에서의 배려는 없으면서 케이블카 설치에만 그분들을 동원하는 거죠. 그래서 한 장애인 단체에서는 ‘우리를 볼모로 잡지 말라’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어요. 노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왜 설악산에서만 특히 그분들의 조망권을 배려해야 하나요? 또 노인들이 하고 싶은 일이 등산뿐일까요? 스킨스쿠버도 있고 페러글라이드도 있겠죠. 노인은 노인의 삶이 있습니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그간의 삶들을 돌아보고 바라보는 게 정답입니다. 노인 역시 케이블카 설치를 위한 볼모인 것이죠.”

해는 대청봉에서만 뜨는가?

그림은 케이블카 설치가 부결되면 본격적으로 입산예약제 운동을 벌일 생각이다. 입산예약제가 잘 정착되고 나면 생태기행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시설물들을 하나씩 철거해 자연의 모습 그대로 복원하는 프로젝트도 생각하고 있다.

“아름다움을 보고 즐길 권리가 있다면 의무 역시 수반됩니다. 소공원 수용능력 평가인원이 1일 1만5천명입니다. 평상시엔 괜찮지만 봄, 가을 성수기에는 1일 7만 명이 오니까 그걸 줄여야하는데, 모든 곳을 다 적용하기 어려우니 정상 인원을 줄이기 시작해야죠. 10년 정도의 시간을 두고 줄여가면서 차차 정착해가고, 생태관, 산악도서관 등 간접체험이 가능한 공간을 만들어 진행한다면 설악산 원형 복원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유난히 설악산이나 이름난 산이 몸살을 앓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연과 공감하는 방법을 몰라서 상표에 매달리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설악산에 간다고 하면 무작정 가는 게 아니고 한두 달 전부터 계획을 짜보세요. 아예 아이들에게 맡겨보세요. 설레임을 갖고 준비하고 돌아와서 정리하고, 두 달 이상이 행복합니다. 그럼 굳이 유명한 산에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을 통해 내가 느끼는 건 어디서나 마찬가지니까요.

이미 대청봉 중청대피소는 삼겹살집으로 바뀌었어요. 산이 위험하다고 관리사무소에서 전부 데크(나무 난간) 놓고 계단 놓고 하다 보니 너무 편해져서 유원지 갈 사람이 대청봉에 무쇠불판 가져와서 고기를 구워먹죠. 관리공단도 광고하면서 아름다움 보존하자 이러지만 말고, 삼겹살 굽는 것도 보여주면서 이런 것도 바꿔나갑시다 해야 하죠.

외국에는 꼭 필요한 곳에 최소한의 시설만 합니다. 험한 산은 보험을 들어야 해요. 사고 나면 자기 책임이거든요. 우리는 헬기나 119 불러도 공짜니까 꾀병 부리는 사람이 부지기수죠. 평지에 내리면 도망가기 바쁩니다. 관리공단에서도 해외에 가서 공부를 많이 하고 오지만 아무래도 공단보다는 국립공원관리청과 같은 정부 관리기관으로 만들어서 관리를 해야죠.”

언젠가 그림은 ‘해는 대청봉에서만 뜨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이른바 무박산행을 두고 한 말이다. 실제 야간산행이 많은 오색에서 대청봉 구간은 성수기, 밤 12시부터 2-300백대 관광버스가 밀린다. 그 행렬에 한번 끼면 중간에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정상만이 정답이라는 잘못된 등반문화가 가져온 폐해다. 하기는 해외 원정 등의 보도만 해도 과정은 생략한 채 늘 정상정복의 순간만을 보도하니 일반인들도 정상만을 최고로 친다.

그러고 보니 유명 산악인들의 세계최고봉 등반 소식은 들어봤어도 그들이 올바른 산행문화에 대한 안내나 홍보를 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그들은 과연 설악산 케이블카나 산행속도전, 잠들지 못하는 설악산 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이 나서준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될까? 그들 역시 세계최고봉 등반을 위한 첫걸음은 분명 우리의 산이었을 텐데 …… 안타까운 대목이다.

그림을 만나러 갈 때부터 궁금했던 두 가지, 1인 시위 때 입는 초록치마와 ‘그림’이란 특별한 이름에 대해 물어봤다. 초록치마는 ‘저항의 상징’으로 펄럭이는 깃발의 느낌에 자연의 색 녹색을 결합한 것이고, 그림은 한글 이름을 갖고 싶어 재판을 통해 개명한 이름이란다. 워낙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해 1주일에 한 번씩은 꼭 화랑을 찾던 일과 설악산에 대한 ‘그리움’의 의미를 담은 이름이라는데, 치마도 이름도 모두 외부의 시선, 자신 안의 막힘으로 지루한 삶을 사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구나 싶었다. 생각한 바를 결단하는 삶, 부러웠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저는 어쩐지 ‘다 해결해주시리라’는 마음이 있어요. 남들이 천하태평이라고 하는데, 정말 필요한 순간에는 다 해결이 되었어요. 내어 맡김이랄까요? 넘칠 만큼은 아니지만 살아오게 해주셨구요. 앞으로도 걱정이 없는 거죠.”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묻자, ‘설악산에 오지 마세요’라고 한다. 농담 같은 한마디에 그림의 절절한 호소가 느껴졌다.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오지 말라는 것. 대청봉에는 지금도 많은 꽃들이 피어있다. 하지만 정상석 잡고 인증샷 찍는 데 바쁜 사람들은 ‘하늘꽃밭’에 핀 꽃 한 송이 볼 여유가 없어 안타까운 그림이다. 나는 그리고 너는, 우리는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 걸까?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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