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연의 시대읽기 – 신자유주의와 탈식민성

김항섭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신자유주의와 탈식민성

스스로 책임지는 사회

작년 11월 에스비에스가 창사특집으로 자본주의 문제를 진단한, <최후의 제국(The Last Capitalism)>이라는 시리즈물을 방영한 적이 있는데, 총4부작 가운데 그 첫 회분인, <프롤로그-최후의 경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미국 시엔엔(CNN)의 한 토론 프로그램에서, 진행자가 론 폴 미국 텍사스 주 하원의원에게 “의료보험이 없는 사람이 병이 나서 치료비가 비싸게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하죠?”라고 묻자, 론 폴은 “그게 자유입니다,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죠.”라고 대답하고, 방청객들은 이에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진행자가 다시 “그럼 돈이 없고 의료보험 없는 사람들은 이 사회가 죽도록 내버려둬야 하나요?”라고 묻자, 론 폴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방청객들이 대신 “예”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속된 말로 ‘돈 없는 사람은 죽어도 싸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 원리이다. 그래도 공개방송에서 드러내놓고 발언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그렇게 아무런 거침이 없이, 그것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외친다는 것은 이 원리가 그저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그들의 삶에 깊숙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의 가장 극악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적 원리가 이미 우리 몸에 하나의 DNA처럼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나라, 특히 1997년 IMF 경제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이 구체화되면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그냥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래서 사회과학자들은 우리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리키는 말로, ‘87년 체제’에 이어 ‘97년 체제’를 이야기한다.

글로벌 스탠다드

이 ‘97년 체제’를 이끈 것은 한 마디로 집약하면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말이다. 신자유주의와 더불어 유행하기 시작한 이 말은 어느 사이엔가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낙후된’, 또는 ‘비효율적인’ 문화나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최고의 지침 또는 척도로 자리 잡았다. 따라서 그 누구도 이 지침이나 척도를 소홀히 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형국이 되었다. 그럴 경우 ‘구태’, ‘무능력’, ‘소아병’, 심지어는 무서운 이념의 딱지까지 붙었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문자 그대로 옮기면 ‘세계적인 표준 또는 기준’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서구, 더 구체적으로 미국의 역사와 이해 속에서 형성된 표준이나 기준에 지나지 않는다.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미국 듀크대 교수인 미뇰로(Walter D. Mignolo)의 표현에 따르면, ‘로컬 히스토리’가 ‘글로벌 디자인’으로 둔갑한 또 다른 사례일 뿐이다.

글로벌 디자인은 특정한 로컬 히스토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어느 순간 헤게모니(우두머리의 자리에서 전체를 이끌거나 주동할 수 있는 권력. ‘주도권’)를 장악하면서, 자신의 특수한 역사와 이해를 보편적 가치로 위장해 세계를 장악하고 관리하는 프로젝트와 같은 것이다.

첫 번째 글로벌 디자인은 1492년에 시작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주축이 되어 ‘그리스도교화’라는 기치 아래 이베리아반도에서 무슬림과 유대인을 추방하고, 아메리카를 정복하고 식민화했던 것이다.

두 번째 글로벌 디자인은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을 주축으로 ‘문명화’라는 기치 아래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식민화했고,

세 번째 글로벌 디자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주축으로 ‘개발과 근대화’라는 기치 아래 세계적 주도권을 행사했다.

이처럼 글로벌 디자인은 세계사 속에서 그리스도교, 문명, 근대화 등으로 이름만 바뀌고, 권력의 주체만 바뀔 뿐, 그 논리나 구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나 글로벌 스탠더드는 이러한 글로벌 디자인의 또 다른 판본, 즉 네 번째 판본일 뿐이다.

이러한 글로벌 디자인 아래서, 유럽과 미국의 특수한 역사와 이해는 보편적인 가치나 척도가 되고, 그리고 보편적인 가치나 척도로서 미국과 유럽 밖의 여타 로컬 히스토리들 위에 군림한다. 단지 군림할 뿐만 아니라, 다른 로컬 히스토리들을 판단하고 단죄하며 지배하고 파괴하였다. 그렇게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의 문화와 전통은 낙후되고 미개한 것으로 낙인찍히고, 그들의 전통 종교는 우상숭배나 미신으로 치부되면서 자기 땅에서 유형을 당하는 존재가 되었다. 문화나 종교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인종 자체도 서구의 백인을 중심으로 서열화 되었다. 이런 식으로 16세기 스페인 신학자 세뿔베다(Juan Gines de Sepulveda)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말하는 짐승’으로 규정하면서 인간과 동물 사이에 자리매김하였다.

학문이나 지식의 영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계체제론으로 유명한 월러스틴(Immanuel Maurice Wallerstein) 뉴욕주립대(빙엄턴) 교수에 따르면, 1850년부터 1914년, 또는 1945년까지, 전 세계 학자와 학문의 95% 이상이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미국에서 나왔다(어떤 기준으로 이런 집계를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리고 이처럼 서구의 특정 지역적 관심사에서 형성된 특수한 학문과 지식은 비서구 세계로 전파되면서 보편적인 학문으로 자리매김하였고, 많은 비서구 지식인들은 이 보편적 학문을 척도로 삼아 자기 나라의 문제들을 해명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상황에서, 인도출신으로 미국 시카고대학 교수인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에 따르면, 비서구 지식인들은 최소한 두 개의 일상적인 종속성을 경험한다.

“제3세계 역사학자들은 자신의 저작에 유럽 역사학자들의 저술을 인용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유럽 역사학자들은 이에 대해 답례해야 어떤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답례를 하지 않고도, 다시 말해 비서구 역사에 대해 몰라도, 지적 작업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고, 그 작업의 질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3세계 역사학자들은 유럽 역사학자들과 동일한 수준의 또는 대칭적인 무지를 내보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구식’이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자’로 보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환영을 쫓는 경주

이처럼 늘, 보편성을 가장한 서구의 로컬 히스토리를 쫓는 비서구적 현실에 대해, 멕시코의 노벨상 수상자인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현재를 찾는 것은 지상 낙원을 찾는 것도 아니고, 시대를 뛰어넘는 영원성을 찾는 것도 아니다. 실제 현실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라틴아메리카인들의 경우 그 현재가 라틴아메리카에 있지 않다. 우리의 현재는 다른 나라 사람들, 다시 말하면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들이 살았던 시간이고, 뉴욕, 파리, 런던의 과거이다.”

비서구의 현재는 비서구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서구의 현재는 늘 서구의 과거를 모델로 삼아 그것을 좇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의 과거, 유럽의 과거를 좇는 삶, 그것이 비서구 세계 사람들의 현실이다. 그럼 서구의 과거를 보편적 척도로 삼아 수백 년 동안 이를 좇아온 비서구 세계의 현실은 뭔가 소기의 성과가 있었는가? 다시 말하면 그 보편적 척도에 얼마만큼 다가갔는가?

브라질 출신으로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 교수인, 주앙 세자르 데 카스트로 호샤(João Cesar de Castro Rocha)는 결코 그 척도에 다가설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환영을 쫓는 경주”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브라질 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근대성에 대한 물음과 추구였다. 즉 경제발전, 사회정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른바 강대국의 최신 경향을 따라잡으려는 열망이었다. 브라질 문화사는 환영을 쫓는 경주처럼 보인다. 목표도 명확하지 않고, 그래서 목표 달성도 여의치 않은 경주 같다. 게다가 이 경주에서 제아무리 빨리 달린다고 할지라도 앞선 주자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 쉼 없이 달린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한발 늦게 도착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쉼 없이 달려도 늘 한발 늦는’ 이 경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 경주가 우리의 경주가 아님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특수성을 보편성으로 위장하는 서구중심주의가 마련해 놓은 덫에 지나지 않음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쉼 없이 달려도 늘 한발 늦는’ 경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부질없는 경주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그 경주라는 판 자체를 진지하게 뒤집어 보는 것이다.

글로벌 디자인의 관점에서 보면,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다. 미국과 유럽이 자신들의 특수성을 보편성으로 포장해낸, 또 다른 새로운 문명 형식이다. 일부에선 신자유주의가 끝났다고 한다. 그리고 다양한 대안적 목소리들을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대부분 신자유주의를 경제 문제로 보는 접근들이다.

그러나 1492년 이후 세계사적 차원에서 진행되어 온 글로벌 디자인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신자유주의의 극복은 없다. 왜냐하면 설혹 신자유주의가 그 수명이 다했다고 하더라도, 글로벌 디자인은 또 다른 판본으로 탈바꿈하여 비서구 세계에 또 다른 경주를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탈식민성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요즘 세상에 웬 식민지 타령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서구 국가들에서 정치적, 군사적 지배로서의 식민주의는 끝났지만, 그 식민주의적 지배 논리로서의 식민성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친일 문제가 여전히 논란거리가 되고 있고, 독립 국가에 버젓이 미국의 군사기지가 존재하고, 미국이 전시작전권을 돌려주겠다는데, 그 환수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문화적, 학문적 식민성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신자유주의 문제는 경제 문제를 뛰어 넘어 수백 년 동안 진행되어 온 글로벌 디자인의 극복, 서구중심주의의 극복, 식민성의 극복이라는 보다 더 긴 안목에서 바로 봄으로써 문제의 근본적인 뿌리를 추적하고, 이를 통해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들을 모색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근대나 서구의 언저리에서가 아니라, 서구적 보편성에 짓눌려 있는 우리의 로컬 히스토리를 복원함으로써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김항섭

우리신학연구소 이사장이며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이다. 학문의 깊이와 넓이에 어울리지 않게(?) ‘요리하는 것과 학생들과 허물없이 어울리기’를 즐겨하는 때론 엄마 같고 때론 소년 같은 …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9월호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