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중매 – 터널 끝에서 나와 만나다

고은지

터널 끝에서 나와 만나다

서른 하고도 몇 해를 타박타박 밟아 살면서, 어느 순간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이 멈춰 버렸다고 느낀 적이 있다. 스물아홉 고개에서 서른을 타 넘어가는 일 년이 그랬다. 일상에서 타인과 자녀, 동료, 친구, 연인으로 관계를 맺고 그럭저럭 지내 왔던 삶이 순간, 온통 무너져 내렸다. 6년을 충직한 친구로 지내 오다 서로 그 이상의 관계를 원한다는 것을 확인한 달콤하고 황홀한 순간, 2주 만에 그는 연락을 끊고 자취를 완전히 감춰 버렸다. 숯 조각으로 심장을 지져 낸 느낌이었다. 회사는 소리 없이 점점 내려앉았다. 파도가 모래성을 조금씩 씻어 내리듯 뭉그러지다가, 문을 닫을 지경까지 되자 동료들은 전적으로 내게 기대 왔다. 마음에 단단히 자리하던 자존감이라는 뿌리가 뽑혀 나가기 일보직전이었다.

부모님은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결혼, 아이, 안정. 어릴 때부터 마치 표준 생활양식처럼 교육 받은 삶의 관문을 좇아 ‘평범하게’ 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드라마와 영화가 담아내는 여성의 모습도 현명한 아내, 신데렐라나 캔디, 아니면 악녀다. 알파걸이 아니면 비련의 여주인공. 다른 이의 연인을 뺏거나, 뺏기고 눈물짓다 복수하는 여성. 결혼은 인생길에 마주하는 선택인데,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다 몇 년 후엔 왜 결혼일까. 한국 사회는 여성성이란 무엇인지, 왜 여성임을 자랑스러워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 적도 없으면서 빨리 엄마가 되라고 나를 떠밀었다. 엄마도 행복한 적 없으면서 딸에겐 결혼하라니.

일을 마치고 돌아와 씻는 둥 마는 둥 하고 침대에 누우면, 하루 동안 꾹 참았던 생각과 감정의 조각이 마음을 찔러 댔다. 베개로 입을 막고 마냥 울었다. 내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나는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게 뭔지, 왜 여성에게만 참으라고 하는지……. 생각과 생각이 소용돌이가 되어 나를 휩쌌다. 퉁퉁 부은 눈으로 일어난 아침, 식구들이 먼저 출근하고 혼자 남은 집에서 세수를 하다가, 밥을 입에 넣다가, 옷을 입다가, 거울을 보다가 ‘끄윽’ 하고 울음이 터져 나오면 한바탕 또 통곡했다. 슬픔을 위로하는 건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울음뿐이었다.

시간의 힘을 믿고 캄캄한 터널 같은 하루하루를 버텨 내던 날, <여왕과 야성녀>라는 책을 만났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지울 수 없었던 의문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성경도 시대 ·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이해하라고 하지만 구약은 남성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민족 투쟁의 역사고, 신약에도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여 대하거나 성역할을 구분해 제시하지 않는가. 그 안에 등장하는 여성도 수없이 고통 받는다. 아이를 낳지 못해 웃음이 사라지거나(사라), 남편에게 버림받거나(하가르), 남성(시동생, 시아버지)에게 기만당하거나(타마르), 민족과 함께 죽을 위험에 처하거나(에스테르), 아들의 죽음을 지켜본다(마리아). 예나 지금이나 왜 여성의 삶은 이토록 신산할까. 자유와 독립을 갈망하지만 아이와 밥에 얽매여 살아가는 여성에게,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내적 힘을 가졌는지 탐색할 기회란 요원한 걸까. 희생자 역할을 맡아 자기를 낮추며 살아가는 게 여성성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여성을 깎아내리는 말에 상처입고 표준화 된 몸의 기준에 맞추려 애쓰면서도, 여자 ‘됨’과 여성이 가져오는 풍요와 사랑에는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경제활동을 하여 돈을 버는 행위보다 가치 없게 평가되는 엄마 ‘됨’은 어떻게 받아들였던가. 한 남자를 사랑하고, 그의 아이를 잉태하여 열 달 몸에 품고 있다 세상 밖으로 내어서 사랑으로 기르는 ‘모성’의 위대한 가치를 시장 경제의 논리로 계산하여 돈이 되지 않는 행위로 치부하지는 않았을까.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여성의 원형은 한 여성으로 세상에서 살며 겪을 수 있는 고통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겪어 내고 스스로 발 딛고 선’ 여성성을 담담히 그려 낸다. 자기 삶을 소중히 여기고, 결단을 내리며 남성과 자기를 탓하지 않고 변화시키기 위해 애쓴다. 그렇게 되기까지 고독과 무력감에 허우적거리면서도, 스스로 여성이라는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슬픔을 지나 온 성경 속 여성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아무데서나 흐느끼고, 때로는 기지를 발휘해 남성의 권위를 뛰어넘는 모습에 깔깔거리면서 내 안에 있는 야성과 권위, 사랑과 화해하고 다시 자기를 믿게 되었다.

빙산을 바닷물에 녹이듯 한 남자를 떠나보내고, 결혼과 어머니 ‘됨’을 너르게 품어 안아 선택지로 남겨둘 만큼 너그러워졌다. 회사는 결국 문을 닫았고, 갈 곳 없는 백수가 되었지만 터널의 끝에서 한 여성을 만났다. 훨씬 안온해 진 ‘나’라는 여성을. 어쩌면 내게 찾아온 그 터널은, 여성으로 세상에 단단히 뿌리내리기 위해 주어진 ‘빛’이 아닐까.

사회와 관계에 의해 부여받은 역할이 격심하게 흔들리고 나서야, ‘여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탐색할 내면의 눈을 깨우게 되었겠지. 전통과 교육과 사회가 주입한 가치관은 그만큼 높고 두꺼운 벽이었고, 뛰어넘는 데는 고통이 필요했다. <여왕과 야성녀> 속 성경의 여성들은 용기와 지혜로 그 벽을 훌쩍 넘었다. 이제 힘들고 지칠 때마다, 다시 벽과 마주할 때마다 이 책을 읽는다. 길동무가 되어 버린 여성들과 마주할 때마다 슬며시 인사를 건네면서.

고은지. 청소년 관련 일을 하고 있으며, 스스로 집이 되어 길 위를 흐르며 환대하는 삶을 위해 분투하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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