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Cool – 길 잃은 ‘선교’의 시대, 평신도 선교사에게 선교를 묻다
길 잃은‘선교’의 시대, 평신도 선교사에게 선교를 묻다
넓은 의미의 선교사는 세례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이지만, 좁은 의미의 ‘선교사’는 교회의 정당한 권위로부터 파견된 성직자, 수도자, 신자로 한정된다. 가톨릭사전에 의하면, 선교사의 임무는 복음을 널리 전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데 있기에 선교에 합당한 품성과 재능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현재 한국천주교회의 선교사는 서울의 가톨릭교리신학원(1958년 10월 정지신학원으로 설립, 1964년 5월 가톨릭교리학원으로 개명)을 비롯하여 대구, 수원, 광주, 부산, 대전 등 각 교구에서 운영 중인 신학원 등을 통해 배출되기도 하고, 골롬반 등 선교회 평신도선교사 양성과정을 통해 파견된다. 양성 경로는 다르지만 일정한 시간 동안 선교사로서 필요한 철학, 종교학, 신학, 교회법, 외국어 등을 공부하고, 교구 사목관련 부서와 성직자들의 도움의 손이 닫지 않는 공소, 해외 등지에서 활동하며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일부 수도회 양성의 경우와 달리 국내 선교사들에 대한 교회의 지원은 열악한 것이 현실. 급변하는 세상과 달리 선교정책에서만큼은 과거 ‘새신자 늘이기’에만 집중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에 10월 전교의 달을 맞아 교회 내 선교 전문인력인 ‘평신도 선교사’들의 목소리를 통해 선교지의 현실과 대안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일시 : 2013년 9월 9일, 월요일 오전 11시 – 오후 1시
참석 : 이경자(골롬반 평신도 선교사 양성 담당, 전 필리핀 파견 선교사), 이선호(춘천교구 강촌본당 공소 선교사), 이춘욱(일원동 에파타 공부방 운영, 전 제주교구 화순 공소 선교사), 이미영(우리신학연구소 연구실장)
진행 : 김옥자(<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 편집장)
안녕하세요. 이렇게 멀리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현재 어디서 활동하시는지, 어떻게 평신도 선교사를 시작하게 되셨는지 본인 소개를 겸해 말씀을 들어볼까요?
이경 : 2000년-2011년까지 11년간 평신도 선교사로 필리핀에서 활동했어요. 지금은 후배 평신도 선교사 양성을 맡고 있구요. 저는 30대 초반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대세를 받으시는 걸 보고 아버지를 따르고 싶어서 영세를 받고 청년회에 들어갔어요.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성당활동을 해도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 있더라구요. 이후 골롬반을 알고 해외 선교사로 파견되어 살면서 가슴속에 비워있던 것이 채워졌습니다.
이춘 : 제주교구 화순공소에서 3년, 정신지체 장애아 시설에서 2년간 평신도 선교사로 지냈습니다. 2008년부터는 본당에서 교리와 성경 가르치고 있고, 저희 집에서 공부방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운 집안의 아이들을 한두 명 데리고 시작했는데 지금은 스무 명 정도가 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젊은 시절, 기자생활을 하다가 정의구현사제단 영향을 받아 세례를 받았어요. 그리고 막연하게 30이 끝나갈 즈음에 50쯤 되면 직장을 접고 남을 위해 살아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가 50때 직장생활을 접고 교리신학원에서 공부하고 선교사가 되었죠. 2002년에 시작했으니 올해로 12년차네요.
선호 : 저는 지금 춘천교구 강촌본당소속으로 광판공소, 추곡공소에서 평신도선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선교사가 된 계기는 1982년에 다른 직장으로 발령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는 신자분이 저를 어느 시골공소로 데려가시더니 이곳에 와서 전교할 수 있겠냐고 물어 보셨어요. 마침 10월 중순이라 들녘에는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었어요. 그때 저에게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루가10,2)는 말씀이 생각났어요. 아무것도 모를 때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하느님께서 제 안에 숨겨진 열정을 불러 일으켜 주셨던 것 같아요. 며칠 동안 고민하며 기도했죠. 그 곳에는 음성 나환자분들이 많으셨는데 그분들과 지내면서 많은 일을 겪었어요. 그때 그곳 본당 신부님을 통해 교리신학원을 알았고, 그게 선교사로서의 시작이었습니다. 강촌에 온 지는 16년 되었구요.
김옥 : 모두 10년 이상을 선교사로 지내셨는데요, 그만큼 많은 경험들이 있으셨겠네요. 그동안 가장 강렬했던 선교체험이라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이경 : 10년 전, 언어도 문화도 모른 채 필리핀에 갔을 때, 처음 방문 나간 집 주인이 당시 27살인 여성이었어요. 남편이 마약 중독자였고, 아이가 둘인 엄마였죠. 18살 때 앓은 소아마비 때문에 늘 누워만 있었고, 집이라고 해봐야 천장도 없이 열악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갔던 분이 그 여성의 상처를 보여준다며 등과 엉덩이를 보이는데 코를 찌르는 냄새에 욕창으로 등과 엉덩이가 다 짓물러서 뼈가 까맣게 보이고 거기에 개미가 돌아다니더라구요. 그걸 보고 집에 와서 밥을 못 먹었어요. 그리고 며칠 후 기도하다가 어느 순간 제 자신에게 수치심이 확 일어났어요. ‘도대체 난 여기 와서 뭐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죠. 선교하겠다고 와서는 열악한 환경의 대상자들을 보고 그걸 회피하고 싶어하고 화를 내고 있다니 창피한 경험이었어요. 그 이후로 환자방문을 많이 했습니다. 그분이 제게 선교방향을 제시해준 거죠.
이춘 : 저는 처음 선교사로 제주도에 가서 ‘일’을 했어요. 얼마나 일을 많이 벌렸는지 신자들이 ‘어디가 공소고 어디가 본당이야’ 할 정도였죠. 어느 순간 이건 아니다 싶더라구요. 그러다 저한테 세례 받은 여학생의 아버지가 우울증과 버거씨병으로 아무도 안 만나고 바닷가에서 낚시만 하고 지내는 걸 봤어요. 그래서 소주 한 병 갖고 가 그분과 같이 술 먹고 이야기도 하고 족욕도 했어요. 처음에는 그분이 ‘왜 나한테 잘해주냐’며 거부감을 보였어요. 그래서 제가 ‘나한테 교리를 들은 아이의 아버지신데, 이렇게 지내니 그 애가 걱정하고 슬퍼한다. 난 그 애가 웃고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거’라고 했죠. 지금은 그 가족이 모두 웃으며 행복하게 지내요. 그 일이 제게는 선교사로 어찌 살아가야 할지 비로소 알게 해 준 계기였죠.
선호 : 처음에 전교회장으로 생활하면서 가장 많이 느낀 건 ‘무력감’이었어요. 한 집에 4남매가 있는데 모두 장애가 있어서 집에만 있고, 혼기가 넘도록 결혼도 못했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제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더라구요. 처음 전교회장으로 갔었던 공소에서 나병을 앓던 형제분이 재주도 많고, 똑똑하고, 외모도 훤칠했는데 나병 때문에 사회생활을 못하고 겨우 조금의 농사에 의지하여 생활하셨어요. 그분을 보면서 절망감과 서글픔을 느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밥 먹고 거리낌 없이 지냈어요. 근데 그런 모습을 좋아하시는 걸 보고 허물없이 함께 하는 게 중요하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평신도 선교사에게 선교의 길을 묻다
김옥 : 가장 강렬한 기억이 선교사로서의 신원을 강고히 해 준 거 같은데요, 여기서 궁금해지는 게 교회에서 말하는 선교와 선교사님들이 생각하는 선교란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 싶은데요.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선교는 어떤 걸까요?
이경 : 골롬반 평신도 선교사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삶을 나누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전, 한국에서 아주 자신감 있게 잘 살았어요. 그래서 필리핀에 가서도 잘 살 수 있을 거다, 그들을 위해 뭔가 도와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전혀 달랐어요. 제가 도움을 받았죠.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도 머리로 이해했는데 필리핀에서 가슴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어요. 환자들을 만나면서 하느님을 경험하고 겸손해질 수 있었어요. 결국 선교는 무슨 큰일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 안에 들어가 그들의 것을 배우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사는 삶이라 생각해요.
이춘 : 영세를 받게 해주는 게 먼저가 아니에요. 같이 살아주는 게 중요한 거죠. 그 사람의 고통을 그냥 함께 하고 같이 사는 거죠. 지금도 전 공부방 아이들에게 먼저 성당 가자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같이 지내다보면 먼저 가자고 해요. 결국 선교는 신자 많이 불리기가 아니고, 선교사도 가서 일하는 게 아니라 같이 살아내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선 : 강촌본당의 공소구역은 5개면에 걸쳐있으며 공소지역이 꽤 넓어요. 춘천시도 있고 홍천군도 있거든요. 그곳에 다양한 분들이 사시는데 아무래도 관광지가 함께 있다 보니까 펜션을 하는 분들이 꽤 되세요. 반면 농사짓고 어렵게 사시는 분들도 많으시죠. 그런데 주로 서울이나 도시에서 오셔서 펜션을 하는 분들이 시골 분들을 보며 느끼고 배우시더라구요. 선교사로 살면서 이곳에 사시는 분에게서 저도 많이 배우고 살고 있구요. 한편 주위에 딱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에요.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어요. 하지만 제가 그분들의 버팀목, 지게 발 역할이라도 하자. 슬픔이 있으면 함께 나누고 기쁨이 있으면 함께하자 생각해요. 예전에는 신자 숫자가 너무 스트레스였어요. 좀 더 신자를 늘려야 하지 않을까 마음 속 갈등이 컸죠. 하지만 이제는 양적인 증가가 문제가 아니라 제가 매일 만나는 신자 한 분 한 분이 소중하고 그분들과 잘 지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경 : 한국사회는 정말 너무 일 중심이에요. 제가 필리핀에서 돌아와 느낀 것은 우리나라 많은 사람들 얼굴에 표정이 없다는 거였어요. 저도 처음에는 필리핀 문화를 접하곤 일할 것만 보이더라구요. 그 사람들은 아무 불편함이 없는데 저만 답답한 거죠. 그러다 보니까 피곤해지더라구요. 나중에는 그분들 문화에 익숙해졌고, 이제는 한국 사람들이 저를 보면 답답해해요.
김옥 : 정말 우리는 너무 일을 많이 하죠. 직장에서 자기 휴가 쓰는 것도 눈치 봐야 하는 게 한국사회인데요, 너나없이 치열하게 살 것을 독려하는 우리 문화 탓인 거 같아요. 그러고 보면 해외 선교 역시 그 문화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일 거 같아요.
경자 : 저희 골롬반은 한번 파견되면 기본적으로 3년을 그 곳에서 머물러요. 3년간 큰 사업보다는 그 지역에서 필요한 작은 일들을 지역 사람들과 함께 하며 그 곳의 사회와 문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죠. 예를 들면 저는 지역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가정방문을 하고 아이들을 공소로 초대해서 동화책 읽는 모임을 했어요. 그리고 좀 친해지고 나서는 학교 못가는 아이들하고 팔찌나 목걸이도 만들어서 팔았죠. 워낙 가난하고 배우지 못해 기가 죽은 이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필리핀에서의 선교였어요.
현실적인 어려움
김옥 : 저는 선교사 하면, ‘급여는 얼마나 받으시지?’ 하는 질문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데요, 물론 경제적인 것 말고도 어려운 문제들이 많으시겠지요?
이춘 : 사실 경제적인 문제가 크긴 해요. 특히 교육비 부담으로 아이들이 어릴 때는 선교사로 지내기가 어렵죠. 요즘 나이 드신 분들이 은퇴 이후 선교사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이유가 커요. 구체적으로 제가 처음 선교사로 갔던 2004년 기본급이 45만 원에 3개월에 한번 보너스 받아서 월급이 60여만 원 정도였는데 강 주교님이 주교회의 때 현실화시키자 해서 100% 인상하고 성무비 좀 합해서 100만 원 정도를 마지막 월급으로 받았어요. 아마 지금은 조금 더 올랐을 텐데요. 그나마도 광주나 제주교구는 월급이 있는데, 원주는 재정이 안 좋아 절반 정도이고, 안동은 살 집만 주다가 지금은 20만 원 정도 주는 걸로 알고 있어요. 해당 교구의 재정상태도 영향을 미치죠. 춘천도 조금 주는 걸로 알고 있고, 서울, 의정부, 수원은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한창 아이를 키워야 하는 세대가 오기는 어려운 구조죠.
하지만 저는 평신도선교사들이 지금보다 더 가난해지면 어떨까 생각해요. 왜냐하면 사실 받는 월급만큼 제약이 오거든요. 그래서 이제는 안동교구 같은 곳에서 지원 없이 신자들과 철저하게 섞여서 살고 싶은 마음도 들어요.
이미 : 2004년 봄 주교회의 춘계총회에서 4대 보험 가입 등 평신도 선교사들의 처우를 개선키로 결의한 바 있고, 이후 광주대교구에서 전국 교구에서 처음으로 평신도 선교사들의 신원과 자격, 임명, 임금 등 17개 항으로 이뤄진 ‘평신도 선교사 규정’을 공포하기도 했어요. 교황청전교회 한국지부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작년 한 해 동안 교황청 전교회 한국지부에서 국내 5개 교구(원주, 청주, 마산, 안동, 제주)에 평균 4천만 원 정도씩 총 2억 정도가 보조되었더라구요.
이경 : 골롬반 같은 경우는 골롬반에서 아이들의 고등학교 때까지의 교육비를 포함한 생활비를 지급해줘요. 칠레에서 5년째 살고 계신 부부가 계시는데 아이들 교육비보다 현실적으로 아이들이 겪게 될 정체성의 혼돈이 제일 걱정이죠.
김옥 : 골롬반은 그래도 아이들 교육비를 보조해주니까 좀 나을 것 같은데 우리나라는 현실적으로 지원이나 보조를 받기가 어려우니, 뭔가 대안이 있어야 할 텐데요.
이선 : 초창기에는 그래도 젊은 분들이 많았어요. 그래서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별로 고민도 안 했어요. 혼자 몸이니 괜찮다 하는 생각과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마음으로 투신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거 같아요. 서울 가톨릭 교리신학원 졸업생들이 모여서 만든, 한국순교성인선교회에서는 제주교구, 광주교구, 춘천교구, 안동교구, 전주교구, 마산교구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월 1회 선교사후원회 미사를 하기도 하는데, 선교사로 지원하는 선교사는 사명감으로 뛰어 들어간 것이고, 2004년 주교회의 이후 조금 달라져서 최저생활비 지원을 받게 되었지만 어려움은 여전하죠. 요즘 대두되는 문제는 노후문제에요. 동정녀 선교사로 사셨던 자매님은 은퇴하시여 연세가 80이 넘으셨는데 그분의 노후가 막막해요. 우리끼리 양로원을 만들자 어쩌자 이야기는 많이 해봤지만 솔직히 해답도 대안도 없는 게 현실이에요.
이춘 : 만약 교회에서 보장을 해준다 해도 위험한 것이 그렇게 되면 서로 하겠다고 경쟁을 할 거고, 그럼 또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거예요.
이경 : 국내에서는 신학원에서 자격증이 나오니까 무조건 나가는데, 실은 재양성이나 체계를 갖춰가는 게 필요한 게 아닌가 싶어요. 필리핀에는 2년에 한번 국내외 선교사들이 모여 3박 4일간 나눔을 하고 정보교환을 하는데 담당주교님까지 있죠. 하지만 우리나라는 교리신학원에서 해마다 많은 사람이 배출되지만, 실제 선교사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환영도 못 받으면서 사제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이 많은데, 그 이유가 ‘평신도’이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필리핀은 아주 환영받거든요. 교구에서 편드레이징(Fundraising : 후원금 모금) 전문가를 초대해서 어떻게 후원회원을 모을 수 있을지 교육도 하고요.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거든요.
김옥 : 그런 모임을 하고 나면 굉장히 에너지가 충만해지겠는데요. 국내에서는 선교지에 대한 지원이라고 하면 ‘해외’만 생각했지, 국내는 사실 이슈가 되지도 못하는 게 현실이죠. 해외 선교사는 어떻게 양성되나요?
이경 :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관심자 모임을 1년 정도 갖아요. 지원 동기도 보고, 가능성도 보고, 우리 선교 영성에 맞는지 보죠. 면담, 신체검사, 심리검사를 거쳐 저희 선교 영성 안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면 9개월 동안 공동체 생활에 들어갑니다. 그 기간에는 선교사로 살면서 필요한 여려가지 공부와 실습을 하게 되는데 영어공부와 임상사목교육(CPE)등도 포함되죠. 그 사이 두 차례, 서로 평가시간을 갖고 두 번 다 통과되면 파견해요. 파견 절차는 홍콩에 있는 평신도 선교사 중앙 리더십과 골롬반 선교회 참사 의원들의 승인 후 총장 신부님으로부터 발령을 받죠. 발령은 3년이고 3년 후에 4개월 본국 휴가 중에 다시 식별을 하고 재파견 되구요.
김옥 : 현재 파견 인원은 얼마나 되시죠?
이경 : 1990년 처음으로 정식 파견된 이후 24년 되었는데요, 현재 우리나라 선교사는 11명이에요. 2011년에 4명 이후로는 없었고, 내년에 파견예정을 두고 3명이 교육중이죠. 파견된 후에도 가족문제, 노후문제 등 현실적인 문제들로 떠나는 사람들도 많아요.
선교와 복음화의 차이
이선 : 2000년 희년 때 로마에서 세계 평신도 선교사 대회가 있었어요. 그때 저도 참석했는데 교황님께서 각국 선교사들을 축복해주셨고 또한 한국 팀으로서 전통공연도 했어요. 그런데 그 곳 분위기는 우리나라 상황과 완전히 달랐어요. 해외에서는 평신도 선교사에 대해 인정을 해줘요.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고, 남녀노소가 다양하고 다이나믹하고 개성있게 표현을 잘하더라구요. 우리나라에서도 2002년에 교황청 전교회 주체로 국내 선교사들이 모이는 ‘평신도 대회’가 있었는데 그때 모였던 선교사들이 자신의 어려운 현실에 대한 어려움만을 너무 토로했는지 개최한 지 2회로 그치고 말았어요. 우리도 너무 성급하게 어려움을 분출했고, 교황청전교회에서도 힘들어서 중지되었지만 참 안타까운 일이죠. 지금이라도 교황청전교회에서 그런 역할을 계속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큽니다.
김옥 : 교황청전교회에 탄원서라도 넣어볼까요? 현재 국내 선교사는 몇 분이시죠?
미영 : 한국 천주교회 통계에 따르면 작년 국내 평신도 선교사는 65명이던데요. 이선호 선교사님이 활동하는 춘천교구는 이 통계에 빠져있어요. 평신도 선교사에 대한 파악이나 관리가 잘 안되니 교회 공식 통계에서 집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춘 : 교리신학원에서 매년 100명이 졸업을 하지만 현장에서 활동하는 분은 10%도 안 되죠. 65명이란 건 공소 위주의 파악일 거예요. 경찰, 교도, 군사목도 많은데 사정은 공소보다 더 열악하죠. 그래도 경찰사목은 담당 신부님의 지원이 좀 있다고 하는데, 군 사목은 완전히 자기 돈으로 하세요. 의료사목도 그렇고요. 선교사의 활동은 보다 적극적이고 다양할 필요가 있어요. 저만해도 선교사라는 자부심으로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거든요. 물론 교리신학원에서 공부하는 게 스스로의 재교육차원에서 공부한 걸로 생각하자는 면도 있죠.
김옥 : 혹 선교사들 중에도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어떻게 대처하시죠?
이춘 : 일부 튀는 분들이 있어요. 개인적인 비즈니스를 위해 선교사의 타이틀을 이용하는 분들이죠. 그런 경우에는 교회나 신자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주는데, 사실 그래도 어떻게 제지할 방법은 없어요.
이경 : 골롬반에서 중간점검의 기간을 주는 것처럼 국내 선교사들도 그런 기간이 필요할 거 같아요. 주기적으로 같은 일을 하는 분들이 모여서 나눔을 가지는 건 어떨까요?
김옥 : 주관할 수 있는 단체가 있음 좋을 텐데요.
이춘 : 교리신학원에서 동창회를 만들긴 했지만 그 정도 규모로는 한계가 있죠. 지금은 각 교구마다 선교사 양성 기관이 있기도 하구요.
김옥 : 가톨릭은 하나의 믿음, 하나의 조직인 거 같지만 실제론 지방자치라 오히려 힘을 받기에 더 어려운 거 같아요.
이미 : 남미나 아시아, 아프리카의 경우 주교님들이 평신도 선교사의 관리를 직접 선교사 양성에서부터 파견, 재교육, 이동까지 책임지는데 비해, 한국 천주교회는 2012년 말 주교회의에서 담당하던 평신도 선교사 지원 사업을 교황청 전교기구 한국지부로 이관하기로 결정했어요. 실질적으로 책임을 안 지고 있으니, 떠넘겨 버린 느낌이 크죠.
이경 : 아마 우리가 말하는 선교와 (한국)교회가 말하는 선교의 차이도 있겠죠. 교회의 선교가 신자 수 늘리기라면, 저희가 말하는 선교는 복음화에 더 가까우니까요.
이춘 : 얼마 전, 한 성당에서 의뢰가 와서 선교에 대한 강의를 했는데, 본당 신부님은 제 생각과 달랐나 봐요. 저는 복음화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강의 후에 신부님이 당신 기대랑 달랐다고 하더라구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본당신부님들이 세례 신자 수에 신경을 쓰실까, 신부님들의 인사 평가시스템이 있다면 그런 것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김옥 : 교회 역시 실적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걸 보면, 정말 이들이 예수님을 따르려는 그리스도교인들인가 싶기는 합니다. 그러고보니 선교사들의 하루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궁금한데요.
김선 : 공소 같은 경우, 교회유지에 필요한 사무적인 일은 기본이고, 24시간 대기체제로 동네의 모든 희노애락에 참여하죠.
이춘 : 모든 일에 도움을 드리죠. 한번은 배달 일을 부탁받은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좀 어이가 없었다가 생각해보니 내게 허물없이 편하게 다가온다는 게 얼마나 좋은가 했어요.
이미 : 교회에서 소공동체운동을 하고 싶어하지만 잘 안되는 게 일상에서 함께 해 줄 분들이 없어서 잘 안 되었던 건데, 평신도선교사들이 도시공동체를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하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춘 : 공동체와 가까워지는 데는 아이들이 가장 좋은 연결자인거 같아요. 아이랑 지내다보면 부모들이 자연스레 참여하고 그러다보면 가정에까지 변화를 주더라구요.
이경 : 저는 그런 활동들을 반드시 교회하고도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교회의 도움이 꼭 필요하거든요.
김옥 : 새삼 선교사로서의 마음을 여쭤보고 싶은데요.
선교가 필요한 새로운 오지, ‘도시’
이경 : 저는 모든 평신도가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선교에 대한 개념도 좀 바뀌면 좋겠어요. 우리 안에서 선교사 하면 신부, 수도자만 있는 줄 알아요. 작년에 선교사의 날 행사에 가보니 팜플렛에 숫자는 있는데 평신도 선교사들의 이름은 빠져 있더라구요. 사진도 평신도 사진은 없고요. 우리가 정체성을 가지고 꾸준히 하면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해요.
춘욱 : 솔직히 교회의 변화는 별로 없을 거 같아요. 사도 바오로처럼 12사도에 안 들어가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선교를 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할 거 같고요. 전 개인적으로 공부방을 통해서 ‘도시선교’의 방법을 만들어가려고 해요. 예를 들면 시장선교인데 유통업을 하시는 분들은 성당에 나오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아무도 그쪽에 신경들을 안 쓰죠. 그래서 평신도 선교사는 제도권에서 기대할 게 아니라 계속해서 그런 후미진 곳, 도시의 후미진 곳을 찾아야 할 거 같아요. 어차피 도시화가 되었기에 이제는 도시가 오지에요. 제가 사는 강남만 해도 부자들이 있는 만큼 그들의 뒷바라지 일을 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분들의 자녀들은 소외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교리신학원에서도 선교에 대한 거창한 환상을 심어줄게 아니라 도시의 후미진 곳을 실습할 수 있게 해주면 좋겠어요.
이선 : 도시가 오지라는 말도 맞지만 요즘 시골은 젊은 사람들이 다 떠나고 노인들만 있는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서 또 다른 오지가 되고 있어요. 노인 복지 쪽에 문제가 많아요. 외로움은 물론이고, 노인들끼리 갈등도 많으세요. 그걸 중개해주는 역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시골에서 혼자 사시는 노인들을 유심히 보고 있어요. 앞으로는 그쪽으로 관심을 쏟아야겠다고 생각해요.
이미 : 한국 천주교회 통계를 보면 10년 전에는 공소가 1,000곳이 넘었는데, 지금은 800여 곳으로 줄어들었어요. 하지만 오늘 말씀 들어보니 도시에서도 공소처럼 필요한 곳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한 가지 은퇴하신 분들이 선교사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혹여라도 선교사가 시간이나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분들이 하는 것처럼 인식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젊은 사람들은 해외에서 선교 단기체험을 하러 가기도 하는데요. 관심있는 분들은 자기 삶의 방향을 정하기 위해서라도 몇 달간의 단기체험을 통해 자기 신앙이나 진로를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선호 : 끝으로 하나의 바램이라면, 교황청 전교회에서 이름 없이, 소속 없이 활동하는 선교사들을 찾아서 파악을 좀 해주면 좋겠어요. 각 교구에 선교사 파악 요청 전문을 보내면 파악할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김옥 : 오늘 여러분의 말씀 들으면서 현실적인 어려움에 답답한 마음도 들었지만 예수가 말한 ‘선교’의 본질이 과연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함께 살아주길 원했던 일’이었고, 그런 면에서 예수가 파견한 제자들이 바로 여러분이셨구나 하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긴 시간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