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마실 – 교회, 진실을 향한 투쟁

한상봉(가톨릭 뉴스 지금 여기 편집 국장)

얼마 전 이대희 감독의 애니메이션 <파닥파닥>(2012)을 봤다. 횟집 수족관에 갇힌 채 바다로 탈출하고 싶어하는 고등어의 이야기다. 수족관의 지배자인 ‘올드넙치’는 양식장 출신이면서도 바다 출신이라고 신원을 숨긴 채, 엉터리 바다 수수께끼를 내면서 다른 물고기들을 지배한다.

수족관의 물고기들은 “죽은 놈은 죽은 놈이고, 산 놈은 또 먹고 살아야지” 하며, 살아남는 것만을 최고로 가치로 인정하며 살아간다. 여기에 ‘파닥파닥’이라는 별명이 붙은 신참 고등어 한 마리가 진입한다. 끊임없이 바다를 향해 탈출을 시도하는 ‘파닥파닥’과 동행하면서 ‘연대의식’에 눈을 뜬 놀래미는 그와 함께 바다를 꿈꾸고, 이내 킹그랩에게 연대를 청하려다 순교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횟감이 될 뻔한 ‘올드넙치’가 횟집 세상의 아수라를 발견하고, 자기 대신에 횟감이 된 고등어를 생각하며 바다로 향한 탈출을 시도하고 성공한다.

여기서 바다를 예수가 선포했던, 그리고 살았던 ‘하느님 나라’라고 말해도 좋겠다. 고등어는 줄곧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리지만 비웃음만 산다. 한편에 바다(진실)를 본 세상이 있고, 다른 편에 바다(진실)를 외면한 세상이 있다. 이처럼 교회는 오랫동안 예수에 관한 진실을 외면해 온 건 아닐까? 예수라는 젊은이가 어떤 세상을 살았고, 왜 죽었는지 곰곰이 따져 묻지 않은 채, 그에게 ‘그리스도’라는 거창한 왕관을 주고, 그가 꿈꾸지 않았던 교회를 세상에 심어놓고, 수족관 세상 밖에 모르는 다른 물고기들 사이에서 군림하며 제 이기심을 채우는 건 아닐까?

교회가 선포한 교리의 대부분은 ‘시대의 산물’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가 되어버린 교리를 반복하며, 진실을 덮어두는 건 아닐까? 불가사리의 발이 50개라는 ‘올드넙치’의 말이 믿을 교리로 둔갑해 있는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예언자’들의 진실을 향한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신학을 한다는 것,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묻혀버렸던 진실, 아니면 어떤 기억들을 다시 되살리는 작업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느님과의 관계, 예수와의 관계, 교회와의 관계 안에서 자기부터 바라봐야 한다.

커뮤니케이션 하시는 하느님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당신 백성과 생동하는 관계를 맺으신다. 그분은 신비에 머물지 않고 인간에게 말을 건네신다. 소통하고 공감하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인간은 야곱처럼 그분과 싸울 수 있고, 또 반드시 싸워야 한다. 아무리 신심이 깊더라도, 일생을 하느님께 바치더라도 이러한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분과 다투어(커뮤니케이션하여) 그분을 알기까지 ‘쉼’이 없기 때문이다.

바알신이나 여타 다른 신을 만족시키는 일은 하느님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수월했다. 고대의 신들은 그저 제물을 원했고, 성과와 그에 따른 보상이라는 분명한 인과율을 내세웠다. 그들을 숭배함으로써 건축, 관광 같은 경제활동이 살아났다. 그래서 유일신 야훼를 거부한 것은 다름 아닌 은장이와 조각가들이었다. 그러나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은 세상의 이익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분은 당신의 형상을 세워 제사를 올리고 제물을 바친다고 만족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근사한 선물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우리의 전부를 바라신다. 속마음을 내어놓으라고 요구하신다. 그분은 당신의 동반자요 연인인 인간에게 최고의 것을 바라신다. 까다로운 사랑이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놓인 매체, 예수는 나에게 누구인가?

도로시 데이가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스캔들)였기 때문에, 교회에서 예수만 떼어낼 수 없다”고 한 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 예수의 체현(體現)이 교회라 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예수의 일부, 더 정확히 말해서 ‘또 다른 예수’여야 한다. 그래서 예수 이해는 곧 교회에 대한 이해가 되고, 교회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예수를 알아야 한다.

내가 발견한 예수는 고대 근동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 중 하나였으며, 유대종교 안에서 평신도였다. 나는 예수를 굳이 ‘혁명가’나 ‘현자’라 부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실상 그분은 민중적 지혜를 통해 혁명으로 나아간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저 단순히 현자로만 남았다면 십자가에 매달려 죽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또한 혁명가라 부르지 않는 이유는 그에게서 ‘어떤 권력을 향한 의지’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혁명이란 민중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전복적 싸움을 전제로 하지 않는가.

예수는 인간의 마음을 매만졌으며, 그를 만난 사람은 그 눈길만으로도 치유되었음을 ‘믿는다’. 그분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어떤 이들은 ‘지상에서 천국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 기억이 훗날 그리스도교 신앙을 낳았다. 그러나 예수는 치유자에 머물지 않고 상처의 본질로 전진했으며, 그 본질의 중심에 ‘하느님 없는 권력의 무자비함’이 놓여 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고행의 길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했으며, 거기서 무력함으로 무력한 자들을 섬기는 최고의 형식인 ‘죽음’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영성은 ‘주님에 대한 사랑’일 뿐 아니라 ‘벗에 대한 사랑’이다. 그분은 ‘주님’이 되고자 하지 않았고, 그저 섬약하고 슬픈 눈동자를 가진 이들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고 싶었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우리들의 친구’로 죽었다. 여기서 우정이 발생한다.

하느님이 우리의 친구일 뿐 아니라 연인이기를 자청하신다면, 그래서 연인의 눈높이에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셨다면, 가장 남루한 모습으로 그처럼 남루한 인간에게 말을 건네고 아파하시고 상처를 매만져 주셨다면, 마침내 연인을 위해 목숨을 내주셨다면 그 사랑의 깊이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그 한가운데서 우리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전달하시는 매체가 예수임을 새삼 발견한다. 그러니, 예수 안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을 볼 도리가 없다.

교회는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낸 예수를 전하는 매체인가?

예수는 세상에서 철저하게 낙오된 사람들을 쫓아다녔다. 사회에서 내팽개쳐진 이들에게 다가가고, 초대하며, 연대한다. 이를 두고 예수는 “아버지께서 그리 하시니 나도 그리 한다”고 전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증거는 예수 자신에게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실상 예수를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이들의 삶을 통해 드러날 수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행업이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실패한 예수의 매체로 남을 뿐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되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다. 예수가 선포한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다급한 전갈이다. 예수는 지금 여기서 무조건 하느님 나라를 살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이는 미루어질 수 없는 복음적 요청이다. 권력과 부를 누리고 있는 자들은 수수방관해도 살만한 세상이지만, 학대받는 이들과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은 지금 당장 구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예수는 이들을 대변해서 ‘복음’을 선포한다.

그러나 교회는 역사적으로 “슬퍼하는 자는 ‘장차’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전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다고 예고했지만, 교회는 최후의 날이 유보되었기에 그동안 교회가 하느님 나라를 대신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진의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예수에게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과연 예수 안에 드러난 하느님 또는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하느님처럼 예수의 자리로 내려앉는 것이다. 예수처럼 가난한 이들의 자리로 내려앉는 것이다.

교회는 그동안 수많은 신학과 교설과 문헌을 통해 ‘스스로 하느님이심을 비우시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선포해 왔다. 그러나 그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거룩한 피를 뿌리셨기에, 그 덕분에 우리는 예수가 받았던 삶의 방식을 다시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것처럼 행동한다. 고생은 예수가 하고 행복은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누린다. 하느님께서 버렸던 왕관을 교회가 다시 집어쓰고, 예수가 버렸던 호칭을 교회에서 다시 부른다. 바오로가 폐했던 율법을 교회법으로 다시 받아들이고, 예언자들이 폐했던 제사를 교회가 다시 봉헌한다. 이로써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이 예수의 제사상이 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부가 아니다”라고 호소하는 교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 진실을 향한 투쟁은 거듭돼왔고 항상 살아 있었다. 최근 한국 천주교회에서 강정문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신학적 성찰을 내놓은 강우일 주교 같은 경우가 우리가 덮어두었던, 삭제하고 싶어하던 예수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킨 예다. 강 주교가 ‘신앙의 재구성’을 강조하는 것은 아마도 제주 강정 해군기지 문제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고, 보필하던 김수환 추기경의 사목 태도에 깊은 감화를 받은 탓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것 역시 밖에서 주어진 자극일 뿐, 강 주교 자신의 신앙체험이 예비되어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만사를 뛰어넘어 ‘예수’에게 주목하는 태도다. 이럴 때 예수라면 어찌했을까? 예수의 제자라면 응당 스승 예수와 운명을 나누어 가져하기 때문이다. 그의 영광뿐 아니라 십자가도 역시.

그런데도 성직자들, 심지어 신자들조차 “만일 예수가 나였다면” 하고 묻지 않는 것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미사전례를 행하고, 성체조배를 하고, 묵주기도에 열성을 드리지만, 정작 성경에 드러난 예수에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 생각에 대해 개별적이고 고유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지금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그분과 견주어 생각하지 않는 한, 그 기도가 나와 하느님, 나와 예수가 전한 하느님 나라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신비와 예언의 통합을 위하여

헨리 나웬이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에서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그리스도인의 길’로 제시한 것은 ‘신비’와 ‘혁명(예언)’의 통합이었다. 그는 회심을 ‘혁명의 개인판’이라고 확신하며 “진정한 혁명가는 모두 그 마음속에서 신비가가 되라는 요청을 받고 있으며, 신비적인 길을 걷는 사람은 인간사회의 환상적인 속성을 벗기도록 소명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이 두 가지는 우리를 ‘무력한 신앙’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관상’과 ‘활동’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많이 언급되어 왔지만, 신비와 혁명의 통합이라는 문제는 관상과 활동의 ‘방향’을 내포하는 질문이라는 점에서 시대의 징표와 관계가 깊다. 신비는 우리의 무의식까지도 침범할 수 없는 중심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혁명(예언)은 그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발언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신비가가 혁명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만사만인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 하느님이 특별히 고통 받고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망설일 틈이 없이 투신하게 된다. 연인을 향한 ‘두려움 없는 사랑’이 그를 현장으로 내닫게 만든다. 무력한 신앙은 사라지고 생동하는 신앙으로 거듭난다.

상념에 빠지거나 묵상에 잠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통의 현장’을 직접 제 눈으로 보는 일이다. 가서 보고 만지고 느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비참한 처지에 놓인 목숨들이 소문이나 기사나 사물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생명’으로 여겨져 사랑하게 될 것이다. 가슴 아프게 될 것이다. 끌어안아주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내 안에 이미 고여 있는 사랑을 길어 올릴 줄 알게 될 것이다.

그분을 만나러 가자, 내 서늘한 눈매로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하느님 그분을 면전에서 뵙기 위해서다. 우리가 만나야 할 그분은 도처에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분을 알아볼 눈매를 지니고 있냐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세포를 열어 그분을 알아 볼 시선을 간직하는 삶, 그것만이 우리가 하느님의 매체로, 예수의 매체로,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는 매체로 살아갈 방법을 던져준다. 복음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다만 우리 눈이 흐려져 복음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엉거주춤한 자리에 대한 미련 때문에, 또는 게으른 기도 때문에, 결국 나 자신 고유한 길 안에서 예수를 만나지 못한 까닭에 우리는 스스로 그분의 진실을 드러내야 하는 매체임을 잊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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