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운동의 영성을 찾아서 – 개인성화와 교회 쇄신을 향한 지성적 운동, 꾸르실료 운동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실

개인성화와 교회 쇄신을 향한 지성적 운동

꾸르실료 운동

“먼 동 틉니다. 잠을 깨세요.

동쪽 하늘에

주님의 은총이 가득한 이 새벽

안녕 하세요.

안녕 하세요.”

기억에 어렴풋한 성가 “마냐니따”의 일절이다.

초등학교에 채 들어가기도 전 꾸르실료를 다녀오신 아버지께서 불러주시곤 하던 노래였다. 마치 부활의 신 새벽을 경험이나 한 듯, 아버지의 눈빛은 이 세상에 있되 더 먼 곳을 응시하는 듯했고 목소리의 간절함 때문이었는지 아직도 난 이 노래를 기억하고 지금도 간간히 흥얼거리곤 한다. 그 뿐이랴. ‘비밀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도 아버지는 들어보지도 못한 ‘이상한’ 나라 말로 “데 꼴로레스”라는 제목의 노래를, 박자를 맞춰주는 이도, 함께 부르는 이도 없는데도 혼자서 열정에 차서 불러주시곤 하셨다. 그 이상한 나라 말이 꾸르실료라는 교육과정에서 불리는 노래라는 것을 안 것은 내가 결혼을 하고도 당시 아버지 나이 쯤 되어서였지만, 이국적이었기에 더욱 어린아이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꾸르실료는 내게 그렇게 알려졌고, 아버지의 모습과 거의 오버랩되면서 마음 깊은 곳에 비밀스럽게 남아 있다.

이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오듯, 40여년을 뛰어 넘어 오늘의 꾸르실료를 설명하고 발전적으로 무엇인가를 제안하는 글을 청탁받고 책상 앞에서 오래도록 머뭇거린다. 개인적인 얘기가 되지 않을 것이라 믿지만, 마음속에 간직한 것을 꺼내서 분석하고 평가하는 일이 기껍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주어진 여건상 피하기는 너무 늦은 듯 하여 발걸음을 재촉해본다.

꾸르실료, 평신도 재교육 운동

<한국가톨릭대사전>은 꾸르실료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스도교의 참된 정신과 생활을 사회 속에 구현하려는 목적으로 3일간 행해지는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의 교육’(Cursillo de Cristianidad). 평신도 재교육 운동이며, 일종의 신앙 부흥 운동이다. 꾸르실료는 인종, 국적, 피부색, 교육 수준,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다른 수십 명의 참가자들이 보통 3박4일 동안 한자리에 모여 15개 안팎에 달하는 과목의 강의를 들으면서 서로 토론하고 기도하며 형제애적인 사랑을 체험해 나가는 교육 방식을 취한다.”

다른 여러 신심단체에 비해 꾸르실료는 평신도 재교육에 그 중심을 두고 있음이 두드러져 보인다. ‘평신도’라고 하더라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지도자로서 본당 사제의 추천을 받은 자로 한정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레지오 마리애나 빈첸시오에 견줄만한 주요 신심 운동이라고 하더라도 두 단체의 회원이 되는 과정과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새로 회원이 되는 인원이 30-40여명의 남녀 평신도를 한 팀으로 제한하고 있고, 또 프로그램을 공개하지 않고 철저히 비공개로 이루어진다는 점 등에 대해 ‘엘리트주의’니 ‘비밀결사’니 등의 여러 말들이 있어왔으나 이는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먼저 꾸르실료의 교육내용과 과정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로 한다.

간략한 역사와 교육 내용

이 운동은 1940년대 스페인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후안 에르바스 주교는 많은 지성인이 고민에 싸여있고 불우 청소년들이 비행과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목격하게 되면서 이들에 대한 영적 치유를 고민하던 중 특수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가톨릭 운동에 지식과 경험이 많은 사제들과 평신도들을 뽑아 방법을 연구하게 하였고, 그 프로그램의 하나로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a)로 성지 순례를 준비하면서, 순례 안내자들을 위한 단기 강습회를 실시한 것이 꾸르실료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순례자 지도자의 꾸르실료’가 실시되었으며, 이를 수정 보완하여 1949년 1월 ‘그리스도인 생활의 꾸르실료’가 탄생되었다. 점진적인 발전 끝에 1965년 즈음해서 완성이 되었고, 몇 년 뒤인 1967년 한국 천주교회에 진출하게 되어 1967년에는 서울, 1969년에 부산 등지에서 남녀 평신도 지도자를 대상으로 실시하게 된다. 1970년부터는 서울, 대구, 광주, 부산, 전주, 인천, 마산 등 7개 교구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꾸르실료 한국 협의회’라는 전국 조직체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그 뒤 꾸르실료는 레지오 마리애, 빈첸시오 등과 더불어 ‘본당에 없어서는 안 될’ 신심운동으로 괄목할만한 성과와 성장을 이루어냈다.

교육면에서는 크게 보아 꾸르실료는 예비 과정, 3일간의 교육, 생활 속에서의 실행과정 등 3단계로 나눈다. 예비 과정에서는 참가자들과의 만남과 교제의 기회를 마련하고 2단계는 3일간의 실제 교육, 3단계는 꾸르실료를 거친 선배(꾸르실리스타라고 불림)와 함께 일 년에 한번 ‘울뜨레야’라는 이름 아래 대회를 갖는 단계로 이루어진다.

이 가운데 핵심은 역시 둘째 단계인 3일간의 교육에 있는데, 이 때 참가자들은 격리된 상황 안에서 서로를 도와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체험하도록 하는 과제를 부여받는다. 참가자들은 보통 사제와 평신도로 구성되는 팀에 의해 지도되는데, 평신도 참가자의 경우 원래는 인종, 교육적 배경, 경제·사회적 위치가 다른 사람들로 구성하게 되어 있다.

교육의 내용을 좀 더 살펴보면, 형제애와 친목을 위한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의 식사 및 여가 시간에 비해, 엄격한 훈련으로 알려져 있는 5개의 묵상과 5개의 토론이 과제로 주어진다. 이런 신학적 주제를 평신도의 구체적인 삶에 적용하도록 요청하고 이를 그룹별 토론을 통해 그 결과를 발표하게 한다. 여기에 더해 교육 일정 가운데 공동체 미사, 묵주 기도, 성체 조배, 묵상, 십자가의 길 같은 전통적인 신심 행위도 또한 중요하게 자리매김 된다. 격리된 공간과 그룹단위의 작은 모임, 그 안에서의 내밀한 나눔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친교를 가능한 깊이 깨닫게 하고 집약적이고도 강렬하게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3일간의 교육과정을 마친 이들은 ‘꾸르실리스타’로서 연례적으로 실시하는 울뜨레야(“전진하자! 힘을 내자!”라는 뜻의 스페인 말로 산티아고에 있는 성 야고보 사도의 묘소를 참배하러 가던 순례자들이 여행 중에 자주 외쳤던 말이라고 함)에 참가해 이들이 거친 3일간의 교육 때 받았던 감격을 다시 불러일으켜 더욱더 강고한 신앙으로 일상에 재투신 하도록 요청받는다.

“꾸르실료는 체험을 해 봐야 한다”

꾸르실료 한국 협의회 초대회장인 문창준 씨는 <경향잡지>와의 인터뷰(1970년 10월)에서 꾸르실료를 직접 체험한 뒤에 자신의 삶에 근본적인 차이가 생겼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원래 ‘구교우’ 집안에서 옛날식 신앙생활로 만족하고 있었습니다만, 꾸르실리스타가 된 후에는 과거의 기계적인 것에서 탈피하여 ‘신앙이란 이런 것이다’는 이론적인 공부도 하면서 신앙생활이 크게 달라지고, 또 생명을 가져왔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를 끄는 것은 그가 말하는 신앙의 새로움이란 ‘이론적인 공부’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대목이다. 이는 그가 세계적인 흐름 가운데 미국의 예를 들면서, “(꾸르실료 운동 방식)이 전근대적인 방법이 아니라 20세기 후반기에 있어서 크리스찬 생활에 일대 부흥을 일으키는 활력소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우리도 그렇게 믿고 있”다고 말하는 데서도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그도 그럴 것이 꾸르실료가 한국에 들어온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나고 불과 2년밖에 안된 시점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신앙은 그저 <교리문답>을 외우고 찰고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던 한국천주교회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이론적인, 신학적인 물음과 이를 ‘공부’를 통해 답해나가는 방법은 매우 낯선 것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꾸르실료의 선구적 역할과 기여는 한국천주교회 신자들에게 늘 배우고자 하는 열정을 부여하는 데 있어 큰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그로부터 30여년을 훌쩍 건너 뛰어 1999년 당시 꾸르실료 한국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던 유양수씨도 문창준씨와 비슷한 말을 전한다. 그는 스페인에서는 일상적인 피정을 꾸르실료라 했는데 한국에 도입되고 나서 본래의 의미가 조금 왜곡된 측면이 있고,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도입기부터 문제가 된 ‘비밀주의’ 또는 ‘똑똑한 사람들만 어울리는 집단’ 등으로서 이는 당시 10만 꾸르실리스타가 각고의 노력해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에게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원을 점검할 수 있는 공부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신앙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은총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되고 기쁨 또한 커질 것”이라고 믿는다고 강조한다.

꾸르실료 운동의 이상과 현실

‘비밀결사’나 ‘엘리트주의’, ‘끼리끼리’ 등이 꾸르실료 운동 도입 초기부터 쏟아진 비판이었고 지금까지도 이를 극복해내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고착화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 데서는 꾸르실료 주체의 책임과 문제도 분명히 짚어야 한다. 평신도 참가자가 다양한 인종, 교육적 배경, 경제·사회적 위치가 다른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꾸르실료 운동 정신에 부합하기 위해 문호를 더 개방하라는 말에 대한 문창준 회장의 다음과 같은 답변은, 초기라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좀 궁색해 보인다. “문호는 언제든지 개방되어 있습니다만, 3박 4일을 가정과 직장에서 떠나 살아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든지, 또는 건강이 허락지 않는다고 하면 참가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코 우리가 문호를 폐쇄해 놓고 있는 건 절대 아니란 걸 알아주십시오.”

그러나 비밀이든 공개든 또 타인이나 다른 그룹에게 문을 더 여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더 근본적이라고 보이는 것은 꾸르실료 운동의 이념과 그것의 실천 사이의 괴리에서 보인다. “이 운동은 이상, 순종,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창설 이념으로 하여 종래 강조되던 계명의 신심에서 은총의 신심으로의 전환을 촉구하며, 동시에 현대 교회가 안고 있는 제반 환경을 개선하고 사도직 활동의 다양화로 개인의 성화와 교회의 쇄신에 활력소가 되고자 노력한다.”(한국가톨릭대사전)

앞에서 꾸르실료에 대해 해온 우리의 논의가 사실과 다르지 않다면, 꾸르실료 운동의 이념은 평신도의 신앙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신앙 및 신학) 공부를 하고 이를 통해 개인 성화를 추구하는 동시에 이를 사회로 확장하며, 현대 교회의 문제를 직시하여 이를 개선함으로써 교회가 ‘시대의 징표’를 읽고 그것을 추구해 나가도록 교회의 쇄신에 투신하는 일이다. 이는 “꾸르실료 운동의 목적은 그리스도인 각자가 자신의 공동체의 환경과 문화를 복음화 하는 것,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고 나누는 데 있”다고 정리한 유상수 회장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런데 문제는 꾸르실료가 그렇게 하지 못해 왔고, 앞으로도 지금의 관성대로라면 그 이념을 실천하기 어려워 보인다는 데에 있다.

꾸르실료 운동의 사회적 확장을 위해

‘지금의 관성대로라면’이라는 단서를 붙인 데는 가능성을 전면 부인했을 때 돌아올 화살을 피하려는 잔꾀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꾸르실료’, ‘꾸르실리스타’, ‘울뜨레야’, ‘데 꼴로레스’와 같은 생소한 말과 그에 바탕한 신앙행위에서 아무런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본당이나 교구의 다른 신자나 신심단체와 자신을 구별 또는 차별하는 꾸르실료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다면 변화나 발전을 기대하기란 어렵지 않겠냐는 물음이요 재고하면 좋지 않겠냐는 제안이기도 하다. 한국인의 심성과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전통에서 나온 종교성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영성이 과연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더욱이 평신도 지도자 양성이 꾸르실료의 주요 목표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면 과연 누구를 위한 지도자 양성인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꽤 심각한 주문으로 받아들여도 좋겠다.

이상과는 다르게 꾸리실료 참가자 가운데 가난한 이가 들어갈 틈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상황을 더 어둡게 한다. 물론 이는 중산층화 및 상업화의 극단에 서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한국천주교회 전체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꾸르실료 운동만을 따로 떼서 보기에 어려움이 따른다는 데에 수긍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본당 사제의 동의나 추천이 없으면 참가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책임의 상당부분은 교회 구조와 성직자에게 있다고 해도 과히 지나친 말은 아닌 듯도 하다. 그럼에도 교회 쇄신을 통한 사회의 성화를 목표로 하는 꾸르실료의 이념이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면, 꾸르실료 운동이야말로 현 교황이 교회의 ‘환골탈퇴’를 주문하고 있는 듯이 보여지는 이 변화의 시기에 교회쇄신을 위한 적극적이고도 효과적인 운동의 주체로 나서야 된다고 생각된다. 누가 보더라도 꾸르실료는 그만한 인적자산을 이미 축적해 놓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평신도 재교육’이라는 꾸르실료의 성격에서 드러나듯이 꾸르실료 운동은 한 번의 감동적 체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되돌아가려는 끝없는 ‘회심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회심을 개인의 삶과 사회적 모든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실현해 나가고자 하는 소명이야말로 꾸르실료 운동 자체와 나아가 교회를 쇄신하는 데서 중추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 자기 소명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깨달음, 곧 ‘지적 회심’이요, 그 지적 회심은 그리스도의 가시적 표지로서, 곧 성사로서의 자기 모습을 상실해가고 있는 교회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 나아가는 꾸르실료만의 원동력으로 독특한 공헌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변화는 내부에서부터 시작하기에, 바로 그 만큼의 책임이 꾸르실료 운동의 주체에게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꾸르실료 운동은 한국 교회가 서 있는 변화의 자리의 한 가운데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꾸르실리스타가 15만 명을 넘어 선 2013년 현 시점에서 일반인이 꾸르실료 웹페이지에도 자유롭게 들어갈 수 없는 현실이나 꾸르실리스타의 활동을 ‘가정과 교회에서 충실한 봉사자’만으로 묶어 둔다면 꾸르실료 이념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사실을 깊이 성찰하는 데서 쇄신은 시작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10월호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