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중매 – The 이완용s, 2013

차진태

‘설 모’와 ‘테러 모’라는 영화를 봤다. 씁쓸했다. 이 영화들이 관객들의 호평을 받아 흥행할 것이라 생각했고, 실제로 흥행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회비판적인’ 영화들이 흥행할 수 있는 건, 그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가진 현실순응적 태도, 달리 말해 현실극복의 가능성에 대한 어떤 ‘두려움’ · ‘비겁함’과, 그로 인해 갖게 되는 현실극복에의 막연한 ‘환상’ · ‘기대’ 때문이 아닐까? 영화의 성공은, 사람들이 갖고 싶어하는 현실에 없는 것을 보여주는 데서 비롯되지 않는가.

‘두려움’과 ‘비겁함’에 대해 비난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으리라. 따라서 대의민주주의 아래 선거는 비밀투표로 진행되어야만 한다. ‘민주주의’란 상당부분, ‘비겁함’에 대한 긍정이다. 그래도 전근대에 비해 문명화된 근대 민주주의 체제의 사람들이 훨씬 역동적이고 ‘당당하지’ 않느냐고? 조선이 낳은 대선비 남명 조식 선생(1501-1572)은 일명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에서 임금에게 “큰 고목이 백 년 동안 벌레에 먹혔다”고 직접 글을 올렸다. 조선 후기 동학농민운동(갑오농민혁명)에서 민중들도 일본군의 무수한 총탄 앞에서 당당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한국 사람들은 정말 엄청나게 비겁하지 않은가? 스스로 비판하는 것들에 대해 말없이 바꾸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말로 실컷 떠들면서 자신이 이렇게 비판도 할 줄 아는 똑똑한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는 데 급급하고 자기 예찬이나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도, 온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한 자신의 ‘자리’가 조금이라도 침해될까 전전긍긍해 하면서. 이것은 사실, 나를 향한 질문이다. 그러니까, 이 책 <이완용 평전>은 그저 그렇고 그런, 너무나도 순종적이고 말만 많은 한국 사람들(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완용 평전>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이 땅에서 일어났던, ‘비겁한 겁쟁이들이기에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들’이 국사를 좌우하면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냉정한 평가다. 자기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인 여자(명성황후)와 조선 전체의 파멸을 부르는 정쟁을 하는 시아버지(대원군), 그 사이에서 조용히 나라를 팔아넘긴 겁쟁이 왕(고종)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정부 대신이라는 자들이 강대국들에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던 세태 속에서 그나마 나라의 개화와 왕실의 보존을 위해 힘쓰던 한 조선 선비(이완용)가 본격적으로 매국의 길에 걸어들어 가게 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과연 이완용과 같은 유형의 인간은 어떤 유형의 인간인가? 오늘날 그러한 유형의 인간은 어디서 만날 수 있는가? 이완용은 매우 똑똑했고 말수가 적었다. 그는 결단력이 있었고 사고방식이 유연한 편이었다. 그리고 야망이 있는 자였으며, 사후에 자기 재산의 상당 부분을 조선총독부를 통해 ‘사회에 환원’ 하기도 한, 속칭 ‘대인배’였다.

요컨대 이완용은, 오늘날 ‘모범적인 성공’을 했다고 평가받는 사람들이 가지는 덕목을 두루 가지고 있었다.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를 모두 거친 이완용이 기회주인자인가? 그렇다. 하지만 ‘기회주의’라는 것은 오늘날 ‘사고의 유연성’이라고 하여 훨씬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단어가 아닌가. 세계화 시대에 앞장서서 세계의 리더가 되자. 리더가 될 수 없다면 앞장서서 리더의 졸개가 되자. 리더가 바뀌면 바뀐 리더를 따르자. 힘 약하면 어쩔 수 없잖아. 그게 뭐 어때? 이완용은 솔직했고, 더욱 솔직하게 자신의 야망을 실현했다.

그렇다면 이완용의 무엇이 가장 큰 문제인가? 법학도로서 나의 문제의식은 ‘글 읽을 줄 아는 자’의 비열함에 대한 것이었다. 작년 대선 직전, 국정원 댓글 사태에 대해 경찰에서 다급하게 무혐의라며 TV를 통해 수사 내용을 발표하던 그 순간, 한국에서 ‘법’을 조금이라도 안다고 생각한 어떤 사람도 그것이 ‘아무런 의심을 가질 여지가 없이 타당한’ 행태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도 조용했고, 너무나도 평온하게 투표는 진행되었다. 나는? 나는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완용들’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완용은 당신처럼 똑똑하고 나처럼 평범하다. 그리고 이완용들이 판치는 세상을 만들어두고 있는 나는 한 명의 방조범이다. 그래서 이 책, <이완용 평전>을 당신과 나누고자 한다. 언제까지 영화나 곱씹으면서 2013년 여름 오늘,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라고, 거짓말하며 도망치고 싶지는 않으므로. 더 이상 TV에 이완용들이 나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므로.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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