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Cool – 시국 선언을 통해 본 가톨릭 평신도 운동의 방향

지난 9월 11일, 한국 천주교 평신도 1만인 시국선언 추진위원회는 2012년 국정원 불법 대선 개입에 대한 사과 촉구와 청와대를 비롯한 책임자들의 책임을 묻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6월 21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등의 단체 시국선언 후, 각 교구별 사제 · 수도자들의 시국선언에 이어진 것으로 천주교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단체 대표자를 포함하여 51명 평신도들의 제안으로 실행되었다.

70년대 중반 이후 이어진 정의구현사제단 중심의 민주화 운동 속에서 평신도는 민주화를 염원하는 사제들의 뜻에 연대하고 협력하는 역할에 충실할 뿐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번 시국선언은 한국 천주교 역사상 평신도 개인들이 중심이 된 최초의 ‘평신도 시국선언’이었으며, 천주교 신앙인으로서 사회적 불의에 1만여 명을 훨씬 넘어 광범위하게 참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이번 선언의 이슈 자체가 국가적 부당함에 대한 단발성의 항의였을 뿐, 이를 통해 평신도들의 힘을 결집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럼 과연 모처럼 결집한 평신도들의 힘을 이어갈 방안은 무엇일까?

이에 이번 시국선언을 통해 앞으로의 평신도 진보운동의 방향과 천주교 신자들의 좀더 지속적인 참여를 어떻게 이뤄낼 수 있을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김근수

핫이슈 1

시국 선언을 통해 본 가톨릭 평신도 운동의 방향

김근수

최근 한국사회 갈등 현장에 천주교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의 모습이 자주 보인다. 천주교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도 주목받는 현상이다. 박근혜 정권 아래에서 천주교의 사회문제에 대한 대응은 이명박 정권 시절보다 두드러지게 활발해졌다. 상대적으로 불교나 개신교등 이웃 종교의 움직임은 적어 보인다. 평신도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눈에 뜨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러나 지난 6월 21일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연합이라는 천주교 평신도단체가 국정원 개혁에 대한 시국선언의 시작을 알렸다. 이를 계기로 각 교구 사제단의 시국선언이 뒤를 이었다. 그동안 사제단의 행동에 뒤따라 협조하는 평신도 역할과는 그 순서가 바뀐 셈이다. 먼저 평신도들이 행동에 나서고 사제단이 평신도의 뒤를 따른 것이다. 9월 11일 한국 천주교 역사상 최초로 1만명이 넘는 평신도들이 서명한 시국선언이 발표되었고 같은 날 시국기도회가 열렸다. 한국천주교회 역사에 새로운 기록이 생기는 날이었다. 그리고 10월 16일 평신도 2차 시국기도회가 열렸다.

평신도들이 충분히 자축할 만한 의미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그 추진과정에서 적지 않은 문제점이 드러나기도 했다. 개혁적 흐름의 평신도단체는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다른 평신도 단체의 참여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평신도의 공식 조직인 평신도사도직 협의회의 협조는 보기 힘들었다. 교구 정의평화위원회를 중심으로 서명운동이 진행되었다. 시국선언 서명에 도움을 준 본당사목회는 드물었다. 전국 규모의 서명운동이었지만 추진과정에서 지역별로 차이가 많았다. 시국선언에 무관심한 본당신부가 있는 성당에서는 시국선언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인터넷 서명으로 적지 않은 평신도가 참여해 주었다.

이번 평신도 시국선언을 계기로 미래의 평신도운동을 추측해본다. 평신도 운동은 천주교 내부 분위기와 직접 관련이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 재임 시기에 교회 내 각 부분에 개혁적 흐름이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흐름에 동조하는 사제들이 늘어날 것이다. 이런 흐름은 평신도 운동에 커다란 도움으로 작용할 것이고 긍정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다. 그 미래의 움직임을 간략하게 예상해 보겠다.

사회교리교육이 본당 차원에서 좀 더 활발해질 것이다. 교구와 전국 규모 차원에서도 평신도에 대한 사회교리 교육이 늘어날 것이다. 교구장과 본당사제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어야 하는 일이다. 사목회 임원이나 관심있는 평신도에게 교육할 수 있는 장소, 강사, 기회가 늘어날 것이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 대한 교육이 강화될 것이다. 한동안 잠잠하던 공의회문헌 교육이 다시 활발해질 것이다. 사제들의 협조, 평신도의 관심이 더욱 기대되는 대목이다.

본당 운영에서 성서교육이 차지하는 비중과 시간이 늘어날 것이다. 성서교육 없이 교리교육이나 사회교리 교육은 효과가 적다. 사제들과 수도자들, 사목회가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할 부분이다. 신심교육보다 성서교육을 먼저 실시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 분위기에서 우리 평신도들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까. 이번 시국선언 과정에서 크게 활약한 평신도들이 앞으로도 평신도운동에서 주축이 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평신도 신학자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그들이 서로 자주 모이고 토론하고 작품을 발표하는 계기와 지면이 늘어나길 바란다.

그동안 평신도운동의 거점으로 공헌해온 우리신학연구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등의 단체가 더 성장하고 활약할 것이다. 평신도가 주도하는 언론, 잡지, 연구소 활동이 점차 증가할 것이다. 평신도가 중심이 되는 학술공간이 늘어날 것이다. 우리신학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월간잡지 <갈라진 시대의 기쁜 소식>이 좀더 커져서 평신도신학의 귀중한 산실이 되길 바란다. 한국 평신도운동 뿐 아니라 한국천주교에서 발행되는 잡지 중에서 가장 크고 신뢰받고 지면으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평신도 단체들이 본당사목회 또는 평신도협의회와 긴밀히 협조하는 환경을 만들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함께 모여서 토론하고 연구하는 계기를 만들면 참 좋겠다. 가톨릭 언론, 특히 평신도가 주축이 되는 언론이 여기서 중심 역할을 하리라 기대된다.

교회법상 평신도에 해당되는 수도자, 특히 여자수도자들과 평신도의 연합활동이 기대된다. 교회 안에 핵심이 아니라 주변부에 처한 신세를 공유하는 그들의 체험과 안목에서 교회개혁에 새로운 자극이 나올 것이다.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고 협력하는 자세가 늘어나길 바란다.

사제들이 성직자중심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평신도의 협조가 절실하다. 사제들과 평신도가 같이 토론하고 교류하는 공식적인 모임이나 계기가 생기길 바란다. 특히 시국선언 국면에서 이런 점이 많이 아쉬웠다. 평신도 시국선언은 국정원개혁을 요구했지만 시국미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은 국정원해체를 요구하였다. 사제단과 평신도단체가 서로 의견을 조율하고 토의하는 모습이 앞으로 기대된다. 정의구현사제단과 평신도 정의구현전국연합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모임, 세미나, 토론회 등 여러 자리가 마련되길 바란다.

일선본당에서 평신도에게 사회교리를 교육시키는 기회에 평신도단체나 인사가 참여하길 바란다. 그런 기회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평신도운동에 헌신하는 사람들과 사제들의 인적 교류도 더 활발해지길 기대한다.

프란치스코 교황 임기에 한국 평신도운동이 크게 활성화될 기회를 맞고 있다. 하느님이 선사하신 이 계기를 평신도들이 놓치기 않길 바란다.

시국선언 제안 동기와 현장 체험을 통한 평신도 운동

이요안

국정원사태와 관련하여 천주교의 시국선언이 석 달 남짓한 기간에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발화는 6월 21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등 8개 단체로부터 비롯되었다. 불길은 교구 사제, 수도자에게도 옮겨 붙었다. 7월 25일 부산교구로부터 시작하여 마산, 광주, 인천, 전주, 대구, 안동, 대전, 원주, 수원, 서울, 제주, 청주, 춘천 그리고 9월 4일 의정부 교구에 이르기 까지 급속도로 번져나갔다. 군종교구를 제외한 한국천주교 15개 모든 교구의 적지 않은 많은 사제와 수도자가 불길에 몸을 던졌다. 8월 26일에는 수도자 4,502인도 이 불길에 함께했다. 9월 11일에는 교구단위 시국선언에서 소외되었던 평신도 11,637인도 이 불길에 가세했다. 한국천주교회 많은 사제, 수도자, 평신도가 비록 장소와 시간은 달랐지만 단일 사건에 한 목소리로 시국선언을 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시국선언 가운데 처음으로 교구 수도자와 사제가 함께 한 광주교구 시국선언은 사제와 수도자가 하느님 안에 한 형제자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 그리고 이 모습은 곧바로 교구단위 시국선언에 평신도도 사제, 수도자와 함께 참여하면 더욱 아름다울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이내 평신도도 당당히 시국선언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나 교구사제가 준비하는 시국선언에 교구 내 특별한 직책도 없는 평신도가 끼어들어 의견을 낼 창구가 명확하지 않고, 최소한 교구 정평위원장의 협조 없이는 교구라는 이름을 걸고 어떤 권한도 부여받지 못한 일개 평신도가 ‘00교구 평신도 시국선언’을 추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고민하던 중에 교회내 공식기구가 아닌 제도 교회 밖의 평신도 사회운동단체에서 주관하면 평신도도 서명자 명단을 작성하여 시국선언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페이스 북을 통해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와 우리 신학연구소 소장에게 이런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8월 22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로부터 평신도시국선언을 준비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천주교 평신도 1만인 시국선언> 서명은 27일 시작되었다. 서명을 본당차원에서 공지하고 받고 싶었다. 그러나 얼마 전 우리 본당에서 열린 교구 정평위 주관 강연이 너무 정치적이었다고 판단하는 몇몇 신자들로 인하여 그 여파가 심상치 않아 하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다. 대신 성당에서는 평소 나름 성향이 파악된 신자들을 위주로 대면 접촉을 통해 조용히 서명을 받았다. 여러 고민을 하다가 우리 남성 소공동체 모임에서도 서명을 받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우리 남성 소공동체 구성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부부가 서명에 함께 참여해 주었다. 서명 막바지에는 평소 자주 연락을 하지 않던 친지나 친척 그리고 옛날에 알았던 타 교구와 타 본당 신자들에게 다방면으로 연락 해 서명을 받았다. 페이스 북을 통한 홍보에도 최선을 다했다.

서명 둘째주일에 교구 정평위 위원장이 사목하는 시골본당에 갔다. 때마침 평신도시국선언 서명을 공개적으로 받고 있었다. 이날 300명 정도 참여하는 주일미사에서 120명 정도 서명을 받았다고 했다. 교회에서 본당과 사제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체감할 수 있었다. 보름 남짓한 기간에 평신도 1만인 서명 목표가 초과되어 9월 11일 예정대로 시국선언과 시국기도회가 열렸다. 역사적인 사건에 함께 참여할 수 있어 감개무량 했다.

15개나 되는 교구가 개별적으로 시국선언을 했다. 그런데 그 15개 교구 시국선언인 명단에 평신도는 단 한명도 없었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라고 한다(교회헌장 9~17). 이는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인 평신도와 수도자 그리고 사제가 그 직분 상 구분되더라도 하느님 안에 동등한 인격을 갖고 상호 존중하며 협력하는 한 형제자매로 활동하라는 뜻과 다름없다. 앞으로 또 이 같은 시국선언이 교구별로 있을 수 있다. 그때에는 굳이 같은 교구의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가 각기 따로 시국선언을 하는 번거로움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번 평신도 1만인 시국선언은 제도 교회 밖에 평신도 사회운동단체가 있어 가능했다. 그들의 공로가 무엇보다 크다. 하지만 1만인 평신도 시국선언 서명자의 반수이상이 교구 정평위나 본당을 통해 서명했다. 이는 제도 교회 밖의 활동도 본당과 교구를 무시하고 할 수만은 없다는 증명이다. 본당, 교구와 교류하고 협력해야 활성화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지금 신앙생활의 중심지인 본당과 교구가 너무 세속화되어 가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제도교회 밖의 사회운동을 지지하고 그 활동에 동참해줄 신자도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지만 그렇지 못하였다는 반증이다. 그런데 세속화 되어가는 교회의 개혁은 의식 있는 사제와 수도자뿐만 아니라 깨어있는 평신도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제도교회 밖에서 평신도 사회운동을 하는 이들도 이제는 본당과 교구활동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그리하여 교구차원은 물론 본당차원에서도 정평위를 조직하고 사회교리강좌와 사회 교리적 강론 그리고 사회교리주간 행사 등이 본당에서 자주 행해지도록 힘을 보태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개혁된 교회의 삶이 사회 개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되어 교회와 사회 개혁을 중단 없이 지속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제도교회 밖의 사회운동단체들이 교구나 본당에 흡수되어야 한다거나 교구가 이들 단체를 공인하고 지도해 주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서로 연대하고 협력해야한다는 뜻이다.

핫이슈 3

사회참여에 걸맞는 실천이 필요하다

이번 평신도 시국선언이 있기 전 내가 후원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교회단체에서도 이에 대한 서명 요청이 있었다. 원래 거절 같은 것을 잘 못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싫다고 거절하였다. 우선 올해에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신문도 제대로 읽지 못해서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여 시국선언에 대한 내용의 전후좌우도 잘 파악하지 못한 마당에 시국선언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국선언을 하는 내용이 뭔지는 알아야겠다 싶어서 만나는 사람들과 기회가 있을 때면 요즘 문제되는 국정원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틈나는 대로 인터넷기사를 검색해보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깐 일상에 묻혀 곧 잊고 말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시국선언이나 정치적인 견해를 밝히는 집회에 이제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가만히 살펴보면 이제는 서로의 입장이 다른 경우에는 한 쪽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서로가 상대방의 주장을 들으려고 하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작년 총선과 대선에서도 부모님과 서로 다른 견해차를 많이 느꼈고, 살짝 목소리를 높이는 갈등도 있었다. 부모, 자식 지간에도 이렇게 서로 하는 얘기가 서로에게 전혀 공감을 주지 못하고 있는데, 내가 시국선언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게 된 이유까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목소리를 높인 들 변화하기를 바라는 상대방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끊임없이 예수님께 여쭈어 보면서 그 방법을 찾아가는 수밖에.

작년 총선을 앞두고 한국사회에서도 녹색당이 창당되었다. 창당 발기인 대회를 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게 될까 하는 회의감이 앞섰는데 헌신적으로 노력하시는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결국 창당에 성공하고 당당하게 비례대표제에 도전하여 후보들을 내세우고, 법으로 정해진 지지율을 득표하지 못하여 바로 정당 등록 취소되고 말았다.

그러나 녹색당을 통해서 결국 사회를 바꾸는 것은 제도와 정책의 변화인데, 이러한 제도와 정책의 변화는 외치는 목소리만으로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정책을 만들어내고 그 정책을 실현시키려는 노력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가능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나도 아는 선배님의 권유로 즉흥적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시민단체의 활동가의 꼬임(?)에 빠져 지역 모임에 엉겁결에 나가게 되어, 작년 3월부터 녹색당 지역 모임을 한 달에 한 번 이상 해나가고 있다. 나는 여기서 이메일, 전화 등으로 연락하여 지역에 계시는 당원들을 지역 모임에 나오게 하는 일을 맡고 있는데, 그것이 참 만만치 않다. 녹색당의 지역모임에 걸맞게 지역 환경 현안 문제를 다루고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끄는 방법을 찾는 것도 어렵고, 60여명의 당원분들께 계속 연락을 드려도 열 명이상 모으기가 쉽지 않다. 그 과정에서 평소에 욕을 하고 우습게보던 기존의 정당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대단하다. 그만한 정당이라도 꾸려나가는 것에는 새털 같은 시간과 노력이 있었겠구나!

지역모임이 모이기 시작한지 일 년이 넘었지만 기껏 열 명 남짓 모이는 모임에서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의 이런 노력으로 녹색당의 정책과 제도 개선이 과연 이루질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꾸준히 하다보면 뭔가 길이 열리겠지 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다. 성령께 도움을 청하면서.

지난달 트위터 계정에서 팔로우하고 있는 어느 수녀님께서 이번 시국선언과 시국미사에 참여한 감동을 팔로워분들과 나누는 트윗들을 보면서 많은 분들이 좋은 시간을 함께 했다고 느낄 수 있었다. 나도 많이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좋은 행사나 시위, 집회 등 여러 사람들이 한마음 한 뜻으로 모인 곳에서 나도 모르게 뜨겁게 올라오는 그런 감동을 많이들 느끼신 것 같다. 좋은 뜻으로 준비하고 좋은 뜻으로 참여한 분들께 주신 주님의 선물이실 것이다. 그런 감동이 짧게 한 순간으로 남는다면 아쉽지 않을까? 그 감동의 느낌을 시작으로 우리의 일상 안에서 무엇이든 긴 실천으로 이어갔으면 좋겠다. 모처럼 뜻을 모은 평신도 시국선언도 이대로 선언에 묻힐 것이 아니라 삶 혹에서 자발적으로 선의를 향한 행동으로 옮겨지길 바란다. 선언 한두 번, 미사 몇 번만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한두 사람의 헌신으로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이제 사람들은 그저 ‘해야한다’에서 ‘왜 해야 하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 그게 무엇인지 평신도 운동을 이끌어가는 지도부의 제안을 기대해본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11월호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