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마실 – 탐욕과 치유의 (불)편한 동거

경동현 우리 신학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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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과 치유의 (불)편한 동거

  • 기업적인 교회, 테라피적인 교회를 넘어 –

오늘날 현대인들은 탐욕과 인색함에 관대하다. 우리는 탐욕을 ‘이윤의 극대화’로, 인색함을 ‘절약정신’으로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세상에 살고 있다. 중세 시대의 교회는 탐욕과 인색함을 ‘7개의 대죄(七罪宗)’, 즉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죄이자 악습을 만드는 죄 가운데 하나로서 엄격하게 다스렸다. 중세 귀족들은 돈을 버는 행위에 대해서는 관대함과 너그러움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가치’를 추구했지만, 17~18세기에 시민혁명이 일어나면서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 신흥 자본가들은 ‘이윤 자체’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탐욕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전환되던 시기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 신흥 자본가와 그리스도교 칼뱅주의의 관계를 다루며 자본주의 정신을 도출했다. 원래 칼뱅주의는 탐욕을 합리화하지 않고 오히려 ‘금욕’을 강조했지만, 베버는 칼뱅주의가 금욕을 통해 축적된 자본이 재투자되어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종교적 동기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훗날 영국과 미국에서 한발 더 나아간 칼뱅주의는 금욕 대신 ‘은총’과 ‘상업적 성공’을 위한 ‘보증 공식’으로 변질되어 버렸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 자리에서는 ‘탐욕’을 미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치유’ 역시 돈벌이가 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성찰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의 부제로 붙인 ‘기업적인 교회, 테라피적인 교회를 넘어’라는 제목은 일본의 가수이자 환경운동가인 오자와 켄지가 쓴 ≪기업적인 사회, 테라피적인 사회≫(서현사, 2012)에서 ‘사회’를 ‘교회’로 바꿔본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기업화’, ‘상품화’되는 사회에 대한 대항마로 ‘테라피’, ‘힐링’, ‘치유’ 사회를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오늘날의 기업화된 사회에서 ‘기업’과 ‘테라피’ 양자는 짝을 이루어, 테라피가 기업적인 사회를 지탱해주는 버팀목 역할에 충실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의 관점에 기대어 우리 교회와 우리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팍팍해져만 가는 세상,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

‘한 나라에서 일어나는 생산 활동의 모든 것을 합계한 것’을 뜻하는 GDP(국내총생산)는 우리 사회의 경제 성장 정도를 가늠하는 잣대로 쓰이곤 한다. 그런데 이 기준이 참 교묘한 것이, 어머니가 가족의 식사를 만들거나 교회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활동 하는 것은 GDP계산에 들어가지 않는다. 반면에 돈 주고 고용한 요리사가 식사를 만들거나 사회복지사가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면 그것은 GDP로 계산된다. 요리는 요리사, 청소는 가정부, 아기는 베이비시터, 고민 상담은 카운슬러에게 맡겨 따로따로 해체되어 진행되면 그 나라는 경제가 성장한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하게 됐다. 또한 자동차 공장에서 만들어진 자동차는 GDP에서 성장으로 계산되지만 생산 과정에서 나온 화학물질이 물을 오염시키는 것은 GDP에서 마이너스로 계산되지 않는다. 아무리 물과 공기를 오염시켜도 뭔가를 만들어 내면 그건 ‘성장’이라는 말이다. 돈(자본)의 가치만을 인정하는 자본중심주의와 어쨌든 눈에 보이는 경제성장이 필요한 성장지상주의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민영화(privatization)’라는 말도 참 교묘한 말이다. ‘민(民)’이라는 글자가 들어가서 민주주의의 ‘민’이 연상되기 때문에 좋은 뜻 같지만 실상 이 용어는 민중과 민주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제대로 쓰려면 ‘사기업화’, ‘사유화’라고 해야 하는데 그리되면 사람들이 경각심을 갖게 되므로 민중들을 속이기 위한 방편임이 분명하다. 공공기관 민영화의 핵심은 국민을 손님으로 대한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국민을 손님으로 대해주세요.’ ‘무엇이든지 사고파는 것으로 생각하세요.’ 그리고 ‘정부와 관공서, 학교와 보건소와 도서관 등 국민을 위한 시설은 기업처럼 운영하세요.’라고 말한다. ‘손님으로 대한다’라고 말하면 좋은 말처럼 들리지만 손님이라는 입장은 그리 복음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레스토랑의 손님은 돈을 낼 때에는 손님으로 대접받지만 돈을 지불하지 못하면 쫓겨나는 입장으로 바뀐다. 그래서 국민을 손님으로 대하는 것의 의미는 국민을 약하게 하고 권리를 줄인다는 의미이다. 본당이나 교회기관에서 신자들이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라 손님으로 대접받거나 대접받기를 원한다면, 교회의 ‘사기업화’, ‘사유화’에 대해서 한 번쯤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자본중심주의와 성장지상주의가 삶을 지배하고,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조차 사기업화해 공공의 영역이 훼손된 사회에서 고립되고 소외되며 고통받는 이들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용산에서 불 타 죽은 철거민, 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며 공동체가 파괴된 강정마을 주민들, 정리해고된 쌍용차 노동자들, 밀양의 송전탑 건설로 피해를 입는 농민들이라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의 현장을 살피기에는 각자의 삶이 너무나 바쁘고 고독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삶의 휴식과 치유만을 필요로 한다. 이를 두고 오자와 켄지는 현대사회를 “불평등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패턴, 기계를 멈추지 않고 기계가 만드는 아픔만을 완화시키는 테크닉, 그 테크닉에 근거한 테라피적인 사회”라고 규정한다. 테라피적인 사회의 맥락에서 교회를 본다면 교회의 자리는 어디쯤 있는 걸까?

순례, 피정 열풍과 테라피적인 교회

대한민국은 걷는 중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마라톤이 유행이었는데 요즘엔 올레길, 둘레길 등 곳곳에서 걷기가 각광을 받고 있다. 걷기 열풍과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는 성지순례나 피정의 증가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2011년 주교회의 미디어팀에서 발표한 최근 7년간 7~8월 피정 통계에 따르면, 전국 교구 주보에 안내된 휴가철 피정 프로그램 수는 6년 사이 3배 가량 증가했고, 피정의 집 숫자도 약 1.5배 증가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일상의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 소음을 피해 도망칠 뿐 아니라, 이런 도피를 영적 갈망으로 보려는 욕망이 생겨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욕망은 치유 상품에 대한 소비욕망인가, 아니면 보다 근본적인 것인가? 몇몇 전문가들은 순례나 피정이 인기를 끄는 것을 두고 ‘영성 쇼핑’에 불과한 것이라 치부하기도 한다. 교회 생활의 근본을 이루는 이상이 순례객이나 피정객들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순례나 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현재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부정하지 않고, 다만 ‘영적인’ 환경에서 그 삶의 방식을 되풀이할 뿐이다.(세라 립턴, “아메리칸 스타일로 영성을 쇼핑하는 곳, 수도원”,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 Archive, 2011)

‘영성 쇼핑’ 현상은 결국 신자유주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한다. 일상에서 벗어난 순례나 피정이 일상을 다시 견디게 해주는 해독제, 피로 회복제로만 기능하는 한 우리가 신자유주의와 맺은 파우스트의 거래는 깨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공고해지기 때문이다.

치유사명은 어떻게 돈이 되는가?

치유는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다. 성서는 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는 곧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봉사라고 증언하고 있다(마태 25장). 그래서 초대 교회 때부터 환자들을 위한 기도와 성사를 강조하였고, 환자들을 위한 의료활동과 자선사업을 실천해왔다. 지금도 교회는 많은 의료시설과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교회의 전통적인 치유사명 영역에 ‘전문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새로운 소비 시장을 형성한 치유 산업의 등장이다. 치유문화와 그로 인한 일상의 변화는 최근 명상, 마음 수련, 자기 치유, 테라피, 우울증 관리 등 정서 관리와 관련된 치유산업의 급성장과 긍정적인 태도가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현상에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제 행복, 성공, 웃음, 친절 등의 긍정적 정서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이 되고 있으며 슬픔, 우울, 무기력, 나태, 절망 등의 부정적인 정서를 가진 사람들은 치료, 돌봄, 정서 관리 산업의 주요한 소비자로 부각되고 있다. 시장만능주의는 이렇게 사적 감정까지도 소비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어 버리면서 인간의 소비 욕망을 부추기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치유자본, 감정자본화 현상이 우리 사회의 권력관계와 경쟁 구조, 사회생활에서의 성공과 실패, 사회적 배제와 불평등의 문제를 모두 개인의 자아나 인간관계의 갈등과 관련된 문제로만 제시한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사회 문제의 구조적 결함을 찾기보다는, 개인적인 변화를 통한 사회 변화를 꾀하며 부의 양극화와 무한 경쟁으로 와해되는 사회 공동체에 관심을 쏟기보다는 개인과 핵가족의 안녕과 행복 추구에만 집중하도록 하는 담론을 만들어내고 있다.

치유산업의 등장에 교회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사목의 주된 내용인 ‘영적 돌봄’이 바로 치유산업이 만들어 낸 치유, 정서 상품들과 현상적으로 겹치는 부분이 많아 신앙까지도 소비하는 우를 범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치유자본의 성장은 사람들의 정서, 감정의 문제를 의료 문제로 보게 만들고 있다.

치유 상품이 아닌 공감과 연대로 사회적 관계망 복원하기

치유산업의 성장 이면에는 공동체적 돌봄과 연대, 사랑 등 사회적 관계망이라는 가치가 거래되는 상품으로 바뀐 현실과 이러한 서비스 산업에서 소외된 이들, 정서적으로 거부감을 갖는 이들의 영적 갈증 현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 갈증 현상은 피로회복제와 같은 임시방편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망의 복원을 통해 풀어야 한다.

우리 삶의 가장 불길한 징조는, 모두가 서로를 위로하기 바빠 아무도 조언하거나 충고하지 않고 그로 인해 사회적 관계망이 붕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계망의 복원은 십계명 문자 그대로의 표현처럼 ‘하지 않음’의 금령이 아니라 내 이웃의 삶에 더 끼어듦으로 그 가능성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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