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복음사이 – 하나님은 누구 편이신가?

김홍한

예수께서 자캐오를 보시며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19,1-10

옛날 중국의 제자백가 중 兼愛(겸애)를 주장한 墨子가 있었다. 겸애란 차별 없는 사랑을 말하는 것인데 이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내 부모 남의 부모를 차별 되게 사랑해서이고 내 자식 남의 자식을 차별되게 사랑해서 라는 것이다.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면 세상을 평화할 것이라는 것, 언뜻 들으며 그럴 듯하지만 허황된 이야기다. 사람으로서는 공평한 사랑을 할 수가 없다. 아니 하나님도 그것은 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자손을 더 사랑하셨다. 그들이 더 의로워서일까? 성품이 더 착해서 일까?, 더 똑똑해서 일까? 성서를 아무리 보아도 그들이 더 의롭고, 더 똑똑하고, 더 선하다는 근거는 없다. 오히려 더 악한 모습들이 수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사랑하셨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극도로 미워하셨다. 거침없이 저주를 퍼부으셨다. 반면 대표적인 압제자라 할 수 있는 로마군인들에게는 관대하시고, 대표적인 착취자라 할 수 있는 세리들에게도 관대하셨다. 창녀들에게도 관대하셨다.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관대하셨다. 그들을 비난하시는 말씀이 성경에는 거의 없다.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고 칭찬하시는 말씀들 뿐이다.

나름대로는 경건하게 살려고 하고 선을 베풀면서 살려고 하는 이들, 율법에도 충실하고 자기 자신에게도 충실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책망의 말들 뿐이요 누구나 죄인으로 인정하는 이들에게 대해서는 구원을 선포하시니 예수님의 사랑이 보편적이고 공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도대체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의 기준이 무엇일까? 그것은 약함이다. 예수님은 약자를 사랑하시는 분이다. 단지 약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예수님은 사랑하신다.

약자에도 종류가 있다. 정치적 약자가 있고 경제적 약자가 있고 신체적 약자가 있고 종교적 약자가 있다. 예수님 시대에 정치적 약자는 종이나 노예들, 경제적 약자는 물론 가난한 사람들이다. 신체적 약자는 병자들, 소경이나 귀머거리 같은 장애인들일 것이다. 이러한 정치, 경제, 신체적인 약자들에 대한 배려에는 누구나 공감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종교적 약자들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케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다. 자케오는 세관장이니 정치적으로 강자다. 돈이 많으니 경제적으로도 강자다. 비록 키가 작았지만 나무위에 올라갈 수 있는 건장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약자다. 종교적 약자다. 유대인들에게 사정없이 죄인으로 매도되는 종교적 약자, 그래서 예수님은 자케오 편을 들어 주셨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죄인임에 틀림없다. 그녀가 부자인지 어떤지는 관계없다. 그녀가 모든 사람들에게 죄인취급 당한다는 그것 하나로 그녀는 약자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간음녀의 편을 들어 주셨다.

로마군대 백부장을 크게 칭찬하고 그의 청을 들어 주셨다. 식민지 백성들에게 점령군 장교라니 결코 약자가 아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 땅에 주둔한 일본헌병대 장교와 같다. 그러나 그도 역시 유대인들로부터 사정없이 죄인으로 매도되는 종교적 약자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백부장의 편을 들어 주셨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죄인 취급을 당하는 종교적 약자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 편을 들어 주셨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사안에 따라서, 시각에 따라서 옳고 그름이 달라지는 것이 허다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 유익하면 선으로 여기고 나에게 해를 끼친다면 악으로 여긴다. 선과 악의 판단이 이러하니 오히려 선악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내가 생각이 어리고 신앙이 어렸을 때는 나름대로 옳고 그름을 구별하고 선과 악을 구별하려 하였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그것이 헛갈린다. 선이 선이 아니고 악이 악이 아닌 경우가 허다한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께는 선과 악이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아래 있는데 어찌 악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사랑은 선하고 옳은 이에게 향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이는 언제나 약자였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이도 그리해야 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나는 옳다”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교만이다.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에게 거침없이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들이다.

강자와 약자가 갈등관계에 있을 때 약자가 오히려 옳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자 편에 서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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