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A –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정치, 사회적 이슈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하는 걸까요?

이현주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정치·사회적 이슈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하는 걸까요?

천주교 신자입니다. 저희 성당의 신부님은 미사 시간에 정치, 사회적 이슈를 자주 이야기하며 신자들의 참여를 권하곤 합니다. 이에 몇 명의 신자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어떤 신자는 신부님께 ‘성당에서는 신앙 이야기만 하라’고 소리치기도 합니다.

평소 사제로서의 생활이 건실한 분이시기에 그분이 하는 말씀에 긍정하고 싶지만 솔직히 저 또한 신부님의 말씀이 거슬릴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매일 뉴스나 신문에서 떠드는 정치사회적 이야기를 성당 안에서까지 해야 하는 건지, 또 신자들이 반발하는 이야기를 굳이 하면서 공식 전례시간을 시끄럽게 만들 필요가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한편으론 신부님의 이야기가 맞는 것 같아 귀를 기울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성당 안에서 고성이 나오고 어쩐지 듣기 거북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지는 않습니다.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갈등은 개신교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정치·사회적 이슈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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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누구냐?”고 누가 물으면 저는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사람 사는 길을 배우는 제자”라고 대답합니다. 남들이 저를 어떻게 보든지 말든지 저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이 ‘생각’ 하나에 근거하여 살아보려고 딴에는 노력해왔습니다. 그러기에 제 앞에 어떤 길이 펼쳐지고 무슨 문제가 닥치든지 제가 할 일은 오직 하나, 스승을 외면하거나 등지는 일 없이 오직 그분이 가르쳐주시는 대로 살아보는 것입니다.

저는 그분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제 생각일 뿐이에요. 누구한테도 동의를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않는…).

“내가 세상의 빛이다. 따라서 너도 세상의 빛이다. 세상에 빛으로 존재하여라.”

빛은 자기를 감추지 않습니다. 일삼아 드러내지도 않고요. 그게 빛이에요. 빛은 끊임없이 제 속에 있는 무엇을 밖으로 뿜어냅니다. 본디부터 외향성이거든요. 제 속으로 들어가는 빛은 없습니다. 빛은 뒷걸음질을 못하거든요. 그리고 빛은 에너집니다. 아마도 태양계에 태양보다 강한 에너지는 없을 거예요. 태양계가 돌아가는 것도, 그 중 하나인 지구에 생물들이 살아가는 것도, 모두가 태양 에너지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적어도 이 태양계 안에서만은 저에게로 쏟아져 내려오는 빛을 거부하거나 피하거나 되돌려 보낼 수 있는 물건이 없을 거예요.

하지만 빛은 누구한테도 자기를 강제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빛을 받아들이게 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지요. 태양으로부터 빛의 속도로 숨 가쁘게 달려온 햇볕이 얇은 나뭇잎 한 장 뚫지 못하고 어두운 그늘을 드리웁니다. 병아리가 눈을 감으면 그 눈꺼풀 위에서 조용히 멈추는 게 빛이에요. 세상에 빛만큼 여리고 부드럽고 섬세한 물건이 있을까요?

질문하신 분은 저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정치 사회적 이슈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하는가?”를 물으셨는데 제가 왜 지극히 개인적인 제 생각을 길게 말씀드렸는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 아마, 이런 말을 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어찌 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그 답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한테서 얻어야 한다.”

위의 제 말에 이의를 달 ‘그리스도인’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있어요. 그리스도인들이 답을 얻어야 하는 ‘그리스도 예수’가 사람들마다 다른 모습으로 보일 수 있고 오히려 그게 당연하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존재에 대한 ‘해석’이 사람들마다 다를 수 있고 실제로 다르다는 말씀이에요. 분명히 그래서 질문하신 분이 속해 있는 성당의 신부님과 몇몇 신자분들이 서로 부딪치는 불상사가 일어났을 겁니다.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저는 신앙고백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저주하고 추방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 슬픈 내력을 돌아볼 수 있었어요. 제발, 이제부터라도 교회에서만큼은 그런 종류의 ‘폭력’이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예, 신앙인이면 마땅히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하여 거리로 뛰쳐나가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무기를 손에 들기도 해야 한다고,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면 영락없이 전사(戰士)로 보이겠지요. 그 사람은 정치 사회적 이슈가 있는 현장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정직한 신앙인의 자세 아니겠어요?

하지만 같은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이 전혀 다르게 보이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 귀에는 “내 세상은 이 세상과 다르다.”는 그분의 말씀이 크게 들릴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성당에서는 사회 정치적 이슈 말고 신앙만 말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는 거예요.

신앙인이 세상을 향해 가질 수 있는 자세의 두 가지 흐름을 거칠게 언급했습니다만, 이 밖에도 수없이 많은 생각과 행동들이 교회 안에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어느 성당에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권하는 신부와 그에 동의하지 않는 신자들이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 반대로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시도하는 신자들과 그들의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 신부도 한 성당에 있을 수 있는 겁니다.

자, 이제 질문에 답할 시간이 된 것 같네요.

저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는”(in the world, not of the world) 태도를 지혜롭게 유지하는 데, 신앙인의 사회참여 문제를 푸는 열쇠가 있다고 봅니다.

사회 정치적 이슈를 외면하거나 기피 않고 참여하되, 세상의 논리와 방법으로 불의에 맞서는 게 아니라, 저 로마 권력 앞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것처럼 하늘의 논리와 방식으로 그것들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분은 세상의 논리와 방식에 동의하지 않고 당신에게 주어진 길을 가시다가 결국은 세상의 논리와 방식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셨지요. 하지만 그것이 마침내 세상을 이기는 하늘의 논리와 방식이었음을 믿고 그렇게 살자는 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 아닌가요?

누구도 물리치거나 거절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하면서 병아리 눈꺼풀의 저항 앞에서도 멈출 수 있을 만큼 여린 저 햇빛처럼, 우리 모두 이 세상을 살면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비결을 터득할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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