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전 – 그래서 와니와 준하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김옥자

가수는 노래로 말하고,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고, 화가는 그림으로 말한다. 그럼 영화제작자와 감독은? 당연히 영화지~ 그래서 살펴보니, <해피엔드>, <와니와 준하>, <질투는 나의 힘>, <귀여워>, <분홍신>, <후회하지 않아>, <올드미스다이어리>,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은하해방전선>, <색화동>, <귀여워>, <탈주>,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 <의뢰인>을 제작했고 <소년 소년을 만나다>, <친구사이?>, <사랑은 100℃>,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를 감독했다. 허~ 개인적으로 넋 놓고 보던 영화에서부터 사회적 이슈가 된 영화까지 참 주제도 골고루 다양하게 만들었다

영화감독이자 영화사 ‘청년필름’ 대표, 성소수자 인권 운동 단체 ‘친구사이’ 대표, 대한민국 역사상 첫 동성애 커플 결혼식의 주인공, 일상의 재기발랄, 생각의 창의력, 활동의 조율감으로 누구보다 당당하고 밝은 남자, 김조광수! ‘게이라서 행복한’ 베드로를 만났다.

소꿉장난의 리더, 광수렐라~

김조광수. 부모님의 성을 모두 쓰는 베드로는 소꿉장난을 좋아한 좀 특이한 남자애였다. 하지만 보통 엄마 아빠 역할 놀이가 아닌 신데렐라, 백설공주, 인어공주 등 동화 주인공의 결혼식을 진행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해피엔딩이 맘에 들어서였을까? 서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3번 옮겨 다녔고,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반에서 늘 1,2등을 하면 살짝 입맛이 없을 수도 있었으나 늘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으로 가는 곳마다 인기 폭발! 초교 4학년 때는 이른바 독서모임을 조직, 친구들끼리 가지고 있는 책을 돌려 읽고 감상도 나누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베드로, 신나게 놀고 재미있게 어울리는 베드로에게 더할 수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면서부터 이른바 TV도 있던 베드로네는 아랫동네에서 윗동네로 이사를 갔고 독서 모임마저 탈퇴한 베드로는 새로운 윗동네 친구들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처음 경험한 우울한 시간들 중에 숨통이 트인 건, 어느 날, 동네에 이사 온 형제와 친하게 지내면서부터였다. 둘 다 준수한 외모에 싹싹한 성격으로 동네 사람들의 호감을 샀고 베드로가 싼값에 과외까지 받았던 형제와의 만남은 독서모임의 후속처럼 이어져 베드로의 마음과 생각을 훌쩍 자라게 했다. 하지만 두 형제와의 만남은 오래가지 못했다. 베드로가 학교에 간 사이 두 형제는 이사를 가고 말았는데 알고 보니 두 사람이 형제가 아닌 연인사이임을 안 동네 사람들이 이사를 종용했던 것. 사람들은 형제들을 ‘사람들에게 병을 옮기는 나쁜 호모들’이라 했다. 베드로가 처음 접하게 된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었다.

희한한 건 그런 우울한 시간 속에서도 타고난 ‘끼’는 어떻게 해서든 분출되는지 초중고 내내 학교에서 열리는 학예회 등의 행사는 늘 베드로의 지휘 아래 진행되었고, 대학에 가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인문대학생회장과 학원자율화추진위원장을 하는 등 사람을 이끄는 역할은 계속 주어졌다.

아들 편에 서야 되겠구나

가족과의 관계는 어땠을까?

“어릴 때부터 전 유독 엄마랑 사이가 좋았어요. 형제는 형 하나 여동생 둘이 있는데, 예전에는 엄마랑 손을 꼭 잡고 다녔어요. 엄마는 저하고 다니는 걸 좋아하셨어요. 형은 그냥 보통 남자라 엄마랑 쇼핑이라도 가면 그만 집에 가자고 보채곤 했지만 저는 엄마랑 같이 물건도 골라주고 의논도 하고, 무거운 걸 못 드는 딸들과 달리 짐꾼 역할도 해주고 하니까 좋아할 수밖에요. 그러다가 제가 스스로 게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엄마가 궁금한 부분들에 대한 대답을 못해 엄마를 피하게 되면서 사이가 벌어졌죠.”

성소수자의 경우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이야기하고 나면 자신은 후련해질지 모르지만 자신이 갖고 있는 짐을 부모에게 떠넘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특히나 베드로의 경우 천주교 신앙을 가진 부모님께 말씀드리자니, 자신이 믿는 종교에서 죄라는 동성애를 아들이 한다고 하면 ‘내 아들이 죄인이구나’ 하고 괴로워하실까봐 못했다. 하지만 엄마와의 사이가 점점 더 멀어지자 결단을 내렸다.

“엄마는 역시 저를 잘 알고 계셨더라고요.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엄마가 제 동생에게 ‘오빠, 혹시 동성애자인 거 아니니’ 하면서 한번 물어보라고 하셨다는 거예요. 뭐 그럼에도 눈치 채는 것과 확인하는 건 다르죠. 사실을 알고 나서 많이 힘들어하셨어요.

고해성사 할 때마다 아들이 죄인이라고 고백을 해야 하는 건지도 고민이셨지만, 제가 기자회견하거나 TV에 나오면 같이 레지오 활동하시는 아주머니들이 ‘어머, 댁의 아들 아직도 호모유?’ 하신대요. 그분들은 동성애를 병이라고 보고 아직도 못 고쳤다고 생각하셔서 진심으로 걱정하시는 거죠. 그래도 그런 소리는 듣기 싫잖아요. 그래서 엄마가 저한테 너 TV 안 나오면 안 되냐‘고 하셨는데 그때마다 전 또 ‘엄마도 게이 아들 있는 것에 대해 커밍아웃 해야 해’라곤 했죠.

그러다 엄마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셨대요. ‘내가 왜 힘들까?’ ‘우리 아들이 힘들 거 같아서, 행복하지 않을 거 같아서 힘들다’ ‘그럼 아들은 왜 힘들지?’ ‘사회적 편견이 있어서 힘들다’ ‘그럼 나는 사회적 편견이 있는 사람인가, 없는 사람인가?’ 했는데 ‘아! 내가 사회적 편견이 있었구나’ 하셨대요. ‘그럼 편견이 있는 사람 편에 설 것인가, 아들 편에 설 것인가’ 하셨고 ‘당연히 아들 편에 서야겠다’ 하신 거죠. 그리곤 ‘내가 아들의 그런 면을 부끄러워하면 안 되겠구나’ 결론을 내리셨구요. 그러기까지 몇 년 걸리셨지만 그 후론 편해지셨죠.”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출신 게이

참 그럴 것 같지 않은 곱상한 외모를 지닌 베드로는 학생운동권 출신이다. 데모하느라 한양대 연극영화화를 무려 10년이나 다니기도 했지만 학생 시절 학생회장에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간부도 했으며 감옥살이는 물론, 고문이 얼마나 인간을 나약하게 하는지도 처절히 경험했다.

대학 1학년 때 한 선배와 독일 국영방송 NDR이 만든 광주학살 다큐멘터리를 본 이후 평생 혁명가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 과격한 운동권 선배, 골수 운동권이 되었다. 하지만 베드로는 운동을 하면서도 그 자리를 즐길 줄 아는 천상 재주꾼이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개사곡을 만들고 시위를 준비하면서 선전 프로그램 만드는 건 다 베드로의 일이었다. 당시 베드로가 개사한 노래는 이런 식이다.

“제이~ / 아홉시 뉴스에 제이~ / 그대 모습 보이면, 난 오늘도 조용히~ 도끼로 TV 찍네! / 제이~ 난 너를 증오해~”

1000명이 넘는 친구들 앞에서 노래와 율동을 하며 박수치며 환호할 땐 짜릿했고, 즐겁게 투쟁하는 게 기뻤지만 한편으론 반혁명 세력으로 규정된 동성애의 현실 때문에 우울한 시기이기도 했다.

베드로는 작년에 출판된 ‘김조광수 감독의 성소수자 인권운동 서적 <나는 게이라서 행복하다>’에서 스스로를 ‘죽을 때까지 민주화 운동을 할 사람’이란 표현을 했다. 그가 생각하는 민주화운동은 어떤 걸까?

“다양한 생활 속 운동이죠. 이제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고 봐요.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쿠데타로 정권이 뒤바뀔 일은 거의 없다고 봤을 때 사회 속 소수자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게 지금 시대의 민주화 운동이겠죠.”

과연 그가 대표로 있는 청년필름은 우리나라에서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고, 노조가 생긴( 그것도 대표가 직접 하라고 해서) 최초의 영화 제작사다. 과거 영화산업이 어려웠던 시절, 영화계의 관행은 같이 노력해서 성과가 생기면 나눠 갖는 구조로 따로 월급제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없어진 영화인들의 조직 ‘영화인 회의’에서 ‘영화제작환경개선위원장’을 하며 영화인들의 월급제를 이야기했고 자신의 회사에서 먼저 시작했다. 자신이 특출나서라기보다 논의과정에서 먼저 시작한 것뿐이라지만 세상 모든 일이 원래 ‘시작’이 제일 어려운 법이다.

다행히 지금은 영화산업노조가 있고, 2주급제 월급제가 실시되고 있다. 다소 특이한 2주급제는 후불제인 월급을 떼이는 경우가 있어서인데 그래선 안 되겠지만 만약의 경우 2주급만 떼이는 게 낫겠다 싶어서다.

“가끔 제작자 협회에 가입되어 있지 않는 회사들이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경우들이 있는데 영화일 하는 분들이 먼저 자기 권리를 숙지하고 스스로 요구해야 해요. 무작정 사람을 믿어서도 안 되겠구요.”

또한 자신이 소수자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소수자의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소수자의 권리를 위한 운동에도 적극적이다.

“저는 소수자라서 다행이고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요. 만약 평범한 이성애자 남자로 살았다면 지금과 달랐겠죠. 저랑 학생운동 열심히 했던 사람도 나이가 들면서 ‘옛날에는 말야’ 이러면서 권위적으로 변한 사람들이 많거든요. 저는 소수자이기 때문에 겪는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을 문제라고 인식했고 문제라 인식하는 순간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을 하게 된 거죠.

뭐 안 좋은 면도 있긴 해요. 얼마 전 더 테러라이브 감독이 저한테 영화 만들 때 목적의식 좀 버렸음 좋겠다며 영화가 너무 계몽적이라는 거예요. 영화감독으로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지 않고 퀴어 영화만 만들어서 그러는 건데, 맞아요. 하지만 저 역시 목적의식이 있어서죠. 전 1년에 한편씩 꾸준하게 영화를 만들었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인데 왜냐면 제가 아니면 우리나라에서는 1년에 퀴어영화가 한편도 없을 때가 있거든요.

결혼식도 마찬가지였어요. 사실 양쪽 식구끼리 오붓하고 행복하게 할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 결혼식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사회적으로 한 발짝 나가는 쪽을 선택한 거죠. 그것이 주는 힘든 부분도 있지만 정말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고, 나로 인해 사회가 한 발짝 나갈 수 있다면 행복하겠다 그렇게 생각했고, 선택이 주는 중압감, 의무감으로 힘든 것과 반대로 그것이 주는 행복감이 더 커서 그걸 택한 거죠.”

사랑하는 아들, 좋은 오빠!

배우가 되고 싶어 들어간 연극영화과였지만 베드로는 배우가 아닌 제작자가 되었다. 배우가 되기엔 외모나 키 등 외적조건이 부족하다는 교수의 지적이나 당시 성소수자로서 닫힌 삶을 지내느라 연기자의 큰 덕목이 ‘자신을 확 드러내지’ 못하며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연출자로서의 삶도 끌리지 않았다. 당시 연출하는 이들이 좋아하는 예술 장르보다 대중적인 장르가 더 끌리기도 했지만 연출자가 좋은 영화를 잘 만들 수 있게 여러가지 환경을 조성하는 역할을 하는 제작자가 맞을 거 같았다.

“제가 외향적인 성격으로 사람들과 잘 어울리기도 했지만, 제작자에게 가장 큰 덕목이 사람사이의 조율이거든요. 몇 십에서 몇 백 명이 같이 일하는 것이라 사람의 장단점을 잘 파악해야 보완할 수 있는 사람끼리 이어줄 수 있고, 사람 볼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하거든요. 연출자는 외골수적인 면들이 있어서 그런 건 어렵죠. 근데 그렇게 10년 정도 제작자 역할을 하고 나니 연출을 해보고 싶더라구요. 저는 처음에 삼각형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어느 날 보니까 사각형도 아니고 동그라미가 되어 있기도 했구요. 그래서 감독에 도전했고, 지금까지 세 편의 장단편 영화를 찍었죠. 재미있는 건 그 영화들은 다 제 경험이 바탕이 된 것이었어요.”

지금이야 자신감과 자존감이 굉장한 베드로지만 그 역시 오랜 기간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냈다. 커밍아웃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떨까?

“제가 좀 고집이 있어서 제가 하고 싶었던 건 대체로 다 하고 살았죠. 소풍 가기 싫으면 절대 안 갔고, 연극영화과를 갈 때도 부모님이 반대하시기에 단식투쟁 끝에 쟁취했어요. 학생운동할 때도 친구들은 숨겼는데 저는 부모님께 이야기했어요. 친구들은 다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부모님도 설득하지 못하면서 누굴 설득하겠나’ 싶어서 부모님께 말씀드렸죠. 뭐 당장 나가라고 하셨죠. 그래서 두 말 없이 ‘네’ 하고 나와서는 학교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부모님이 오라고 할 때까지 안 들어갔어요. 당장이야 어려워도 부모님이 인정하는 민주화운동을 하고 싶더라구요. 그때 생각은 앞으로 대국민 설득이 필요할 텐데 내 가까운 사람도 설득하지 못하면 어렵겠다 싶었어요. 결국 부모님이 인정해주셨고 이후에는 편하게 활동할 수 있었어요.

커밍아웃 할 때도 동성애자인 걸 내가 못 받아들이는 게 고민이었지 알리고 나서는 편했어요. 하지만 커밍아웃은 누구에게나 힘든 문제에요. 강요할 문제가 아니죠. 하지만 권유는 하고 싶어요. 확실한 건 하는 순간 훨씬 행복해져요.

엄마는 제가 이야기해줘서 고맙다고 하셨어요. 그러시면서 나중에 돌아가신 후 내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걸 알았다면 정말 후회가 되었을 거라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그것도 모르면서 아들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했으면 얼마나 슬펐겠냐시며 죽기 전에 이야기해줘서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하시는 거예요. 커밍아웃 안했으면 들을 수 없는 이야기죠.

과정은 힘들었지만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도, 사회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도 하면 좋겠다 싶어요. 여동생들도 전에는 가족 중에 동성애자가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하고 쉽게 내뱉던 말들이 있었지만 오빠가 그렇다는 걸 알고 나서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지적해준다는 거죠. 그러면서 오빠 덕분에 변했고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해요. 나의 커밍아웃이 주변을, 세상을 변하게 한 거죠. 물론 이렇게 편견이 많은 나라에서는 너무 힘든 일이에요. 혹 부모 없는 고아라면 안 힘들까 싶겠지만 더 소외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절대 강요할 수는 없는 거죠.”

힐링 성공회~

베드로는 요즘 또 한편의 퀴어영화와 자신의 결혼식 영화 제작, 내년에 20주년이 되는 친구사이의 행사 준비로 바쁘게 지낸다. 얼마 전부터는 성공회 성당에 다니는데 스스로 동성애자라는 걸 인정하면서부터 멀어진 신앙을 다시 키우고 싶어서다. 개봉을 앞둔 <로빈슨주교의 두 가지 사랑>이란 영화를 통해 성공회가 동성애에 대해 긍정적인 것에 마음이 놓였기 때문인데 매주일 미사에 가는 게 전부이지만 가톨릭과 거의 같은 전례예식에 함께 평화를 빌며 따뜻하게 웃어주는 신부님과 신자들이 있어 마음이 편하다.

“<로빈슨주교의 두 가지 사랑>에서 동성애와 동성결혼을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해야 하느지를 토론하고 결정하는 과정이 나와요. 전 그 장면을 보면서 그런 문제를 토론할 수 있는 교회, 사회라는 것에 대해 정말 큰 감동을 받았어요. 주교들과 평신도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표결에 부치는데 투표가 끝나고 함께 10분 동안 기도를 해요. 아 저 모습이 신앙이구나 했어요. 원하는 결정이 나왔다고 환호하거나 안 나왔다고 화내지 않는 모습, 우리 교회도 자기가 생각하는 걸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영화에서는 토론 후에도 동성애를 죄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여전히 죄라고 해요. 그 중 한 사람은 자기는 여전히 로빈슨주교의 친구지만 신앙적으로는 여전히 죄라고 서슴없이 말하더라구요.”

베드로는 요즘 결혼이 주는 편안함과 안정감으로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롭고 행복하다. 또한 무엇보다 양쪽 가족들이 자신들을 서로의 가족으로 인정해주는 모습이 신기하고 기쁘다. 결혼을 했으니 혼인신고는 당연한바, 혼인신고 소송도 진행 중인데 국제적으론 같은 법적 싸움이 모두 승리한 터라 아주 힘들지는 않을 거 같다. 또 만약 원하는 판결을 받지 못하더라도 과정이 승리하는 싸움을 위해서 당사자인 두 사람부터 지치지 않고 계속 해나갈 생각이다. 또한 베드로는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쭉 철없이 즐겁게 살 계획이란다. 현재 맡고 있는 친구사이 대표나 서울 엘지비티영화제 집행위원장, LGBT 센터 건립 일도 열심히 해나갈 생각이지만 무엇보다 토크쇼를 진행해보고 싶은 꿈이 있다.

가톨릭 신자는 자기 세례명의 성인을 닮아간다는 속설이 있다더니 과연 베드로는 어부가 틀림없다. 단 자신이 취하기 위한 어부가 아닌 살리기 위한 어부. 동성애자들, 아니 수많은 소수자에게 펼쳐있는 차별과 불평등의 바다에서 좌절하지 말라고, 힘내고 내 손을 잡으라고 손을 내밀고 있는 베드로, 어부 베드로에게 응원의 그물, 박수의 그물을 보낸다. 짝짝짝! 베드로 힘내~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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