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중매 – 행복? 지금 여기, 아직 아니!

고은지

“어?” 2013년 9월 26일, 몸을 가누기도 힘든 지하철 안이었다. <행복의 정복>의 표지를 넘기는 순간, 작은 종잇조각이 툭 떨어졌다. 살그머니 눈치를 보며 바닥으로 손가락을 뻗어 종이를 집어 올렸다. 고속버스 표였다. 2010년 2월 4일 오후 다섯 시 이십 분에 강릉에서 동서울로 향하는.

이 책을 샀던 날, 밤새 울어 붕어마냥 퉁퉁 불어 터진 눈을 하고 강릉행 버스에 올랐다. 지금은 갓 돌 지난 아이 엄마인 친구와 실연의 상처를 바다에 토해 내려고. 청승, 궁상, 찌질함의 삼박자가 어우러진 연애사를 늘어놓으면서 경포대 바닷가에서 꺼이꺼이 울었다. 한 손에는 소주 병, 한 손에는 손수건을 틀어쥐고서.

남녀상열지사에 누구라서 답을 말하랴. 벌겋게 달아 오른 눈에 잔뜩 쉰 목소리만 얻은 채 서울로 쫓기듯 올라가야 했다. 다음날은 월요일이었으니까. 출근하는 날이자 돈 버는 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 활동을 통해 생계와 품위 유지를 위한 소득을 창출하는 날. 두 개의 전공을 가지고도 먹고사니즘과 역마살을 극복하지 못해 세 번째 옮긴 직장, 네 번째 실연에 대한 상실감으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행복의 정복> 이라는 제목을 보고 이끌리듯 버스 터미널 구내 서점에서 이 책을 샀다. 행복이 세상에 있긴 한 거냐면서, 행복 따위 그냥 꺼져 버리라고 중얼거리면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는, 그래도 행복해지고 싶다고, 남들처럼 한 회사에서 진득하게 자리도 잡고, 집이든 사람이든 기댈 언덕도 마련하고, 나도 한 번 잘 살아 보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외치고 또 외쳤다.

그런데 삼 년 반이 지나서 왜 다시 손에 쥐었을까. 그때와 마찬가지로 ‘행복하지 않다’는 마음의 아우성 때문이었다. 네 번째 옮긴 직장에서 삼 년 반을 일하면서 못내 안도했고, 호기롭게도(!) 다섯 번째 실연을 그럭저럭 갈무리 해 가는 과정이었다. 좌충우돌 이리저리 들이 받고 혼자 상처 받았던 혈기도 많이 수그러들어 이제는 좀 살 만 한가 싶었더니. 너무 숨이 죽었는지 흐물흐물한 배춧잎처럼 일도, 연애도, 취미도 다 재미없어졌다. 분명 내면에 귀를 기울이면 행복해 진다고 해서 마음공부다, 요가다, 피정이다, 심리학책도 보고, 일상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찾으려고 애써 왔는데.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행복, 당신은 누구시기에! 버트랜드 러셀이라는 철학자는 어떤 능력자이기에 행복을 ‘정복’했다고 말하는가. 절박한 호기심이 나를 책 속으로 안내했다.

러셀은 다른 시각으로 행복에 다가가는 법을 이야기한다. 내면으로만 파고들어 자기 연민을 키우기보다 세상 밖으로 시선을 돌려 이웃과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귀를 기울이고 능동적으로 관심을 가지라고. 현대 산업 사회가 시민에게 강요하는 안정과 불안함에서 벗어나 내 안으로 억눌러 둔 역마살과 혈기, 열정을 다시 꺼내어 모험하고, 도전하고, 공유하고, 연대하라고. 행복은 개인의 내면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파랑새 이야기를 과감히 부정하고 지금 자신의 어떤 점이 행복으로 가는 길을 방해하고 있는지 치열하게 질문하여 그 진실이 아무리 불쾌한 것이라도 직시하여 자기 삶을 구축해 나가라고.

러셀이 이 책을 쓰던 당시 사회에서도 가족 간의 차이와 갈등, 실업과 노동자의 권익, 연애와 실연, 권태로운 업무는 마찬지로 존재했다. 나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여 걱정하고 두려워하거나, 다른 이는 나와 달리 문제가 없다고 경쟁하고 질투하거나, 자기 연민이나 피해 의식에 허우적거리지 말고 폭넓은 관심사와 튼튼한 현실 인식으로 행복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떨치고 나서기로 마음을 정했다. 이 글을 맺은 후, 몇 시간 있으면 아기 새처럼 몰려들 청소년들에게 지금 밀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동해 바다에 흐르는 물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대로 암기하는 국민연금에 드리운 그림자는 무엇인지 이야기 해 줘야지.

내 연애의 흑역사를 묵묵히 들어 준 친구가 있었듯, 나도 누군가의 마음 상함과 상실에 공감하고, 안부를 묻고, 격려해야지. 천직을 찾아 이리저리 부유하기보다 천직을 만들어 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지. 행복은 지금 여기에 있지만, 아직 내게 완전히 오지 않았다. 하지만 ‘톰 소여’처럼 모험하며 사는 소년이고 싶었던 내 안의 열정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언젠가 찾아올 행복을, 결코 놓치지 않고 ‘정복’ 하겠다고 다짐한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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