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복음사이 –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가?

김선실

삶과 복음 사이’는 복음 해설 코너로, 성경과 생활이 주제가 되어 어떻게 힐링할 것인지 생태, 심리, 영성, 파트너십 등 힐링의 주제로 쓰이는 모든 차원으로 이야기하는 자리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역시 시대의 화두가 될 힐링을 통해 여러분의 가슴에 촉촉한 단비를 내려드리고 싶다.

내적 충만함으로 기쁘게, 인간과 세상에 대한 연민으로 파트너십의 실현을 꿈꾸고 실천하는 삶을 지향한다. 특히 교회와 사회 안에서 여성의 존엄성 회복을 위한 일에 투신해 오고 있으며 한국파트너십연구소에서 파트너십을 함양하는 프로그램을 기획•진행하고 있다.

4월의 말씀 ․ 요한 20,19-31

오늘 복음의 첫 부분에서는 제자들의 두려움이 진하게 전달돼 온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요한 20,19). 그들이 ‘주님’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분이 극형인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니 그럴 만도 하다. 예수님께서 붙잡혀 돌아가실 때까지 복음서에 기록된 제자들의 행적을 보면 그들의 두려움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신 직후 베드로는 세 번이나 자신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부인한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는 현장에도 사랑하시는 제자만 그 자리를 지켰다(요한 19,26).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성들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골고타 현장에서 예수님의 처절한 임종을 지켜보고 있을 때 제자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와 여성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알렸을 때 제자들은 믿지 않았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은 채 문을 닫아걸고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안에 있는 두려움! 나는 그 실체를 너무도 확연하게 느끼고 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광고가 영락없는 내 모습이다. 장롱면허 4년에 자동차를 운전하며 “택시도 버스도 무섭지만 나는 내가 제일 무섭다”고 고백하는 광고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두 달 전, 3년 만에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자동차 사고 후 폐차를 하면서 운전을 하지 않다가 다시 운전을 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운전할 생각을 하면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 14년 전 처음 운전을 배울 때도 그랬다. 운전학원에서 연습 도중 다른 사람이 브레이크 대신 액셀레이터를 밟아 사고가 나는 것을 본 후로는 운전석에 앉을 때마다 수없이 브레이크를 확인하곤 했다. 때로는 운전하기 전날이면 실수하는 꿈이나 길을 헤매는 꿈을 꾸기도 했다. 여러 번 운전을 한 후 차츰 괜찮아지기는 했지만 늘 초보운전자 같은 심정이었다. 특별히 두려워하는 것이 없는 내게 유독 운전에 대한 두려움은 당혹스럽다. 그러나 그것이 내 실존의 모습이다.

그동안 <파트너십을 향한 여정>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사람들이 지닌 12가지의 주된 태도에 대해 탐구해 왔다. 그 중 ‘회피’는 표본조사 결과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태도로 그 이면에 있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인간관계가 잘못될까 두려워서 해야 할 말도 하지 못하고, 갈등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채 상황을 회피한다. 실수할까 두려워 책임을 맡지 않고 때로는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실수를 상상하며 힘들어한다. 그룹으로 프로그램을 할 때마다 우리 내면에 있는 감정들이 어떻게 우리의 말과 행동을 좌우하는지 성찰하게 되는데, 특히 내면에 있는 두려움을 직시하고 대면하는 작업이 가장 어렵고 그것을 이겨내는 것이 가장 큰 과제임을 깨닫게 된다.

신문을 펼치면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두려움이 보인다. 우리 사회 안에 만연한 두려움! 가난에 대한 두려움, 왕따와 폭력에 대한 두려움, 전쟁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인한 숱한 사건들이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자리 잡은 이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오늘의 복음은 또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 선포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두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고 부활을 직접 확인한 제자들은 그제야 기뻐한다. 그야말로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스는 예수님을 뵈었다는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하고, 8일 후 토마스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 다시 예수님이 나타나시어 상처를 보여주자 비로소 “저의 주님”이라고 고백한다.

베드로가 진작 예수님의 수난예고와 부활을 제대로 알아들었더라면 그렇게 두려움에 떨며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 것이다. 제자들이 진작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막달라 마리아와 여성들의 말을 믿었더라면, 토마스가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었더라면 더 일찍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가?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마지막 말씀을 남기셨다. 믿지 못하는 것, 즉 불신은 우리의 두려움을 부추긴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할 때, 친구나 동료를 믿지 못하게 되었을 때, 우리 사회를, 이 세상을 믿지 못할 때 우리의 내면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된다. 내 자신이 지닌 두려움은 무엇인가?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두려움은 무엇인가? 그 실체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는 성찰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두려움을 떨쳐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끊임없이 자기와 타인에 대한 신뢰를 다져가며 내적 충만함을 채워가는 지난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길고 깊은 호흡으로 자신의 내면을 우선 예수님께서 주신 평화로 채우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을 믿고 모두의 평화를 빌어줄 때 차츰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을까!

이제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내 자신을 믿고, 다른 운전자들을 믿어 봐야겠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와 함께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일상 속 부활의 기쁨은 이렇게 두려움을 떨치며 다가온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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