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연의 시대 읽기 – 안녕들 하십니까??

김항섭(우리신학연구소 이사장, 한신대 교수)

‘안녕하십니까?’

: 민주화세대의 무기력과 무관심을 질책하는 소리

요즘 ‘안녕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사회 전반을 흔들어 놓고 있다. 서울의 한 대학생이 붙인 대자보에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사람들이 호응하면서 하나의 사회적 물결을 이루고 있다. 특히 대학의 게시판은 연일 이런 유의 대자보로 도배되고 있다. 이런 대자보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80년대의 교정에 서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단지 과거를 반추하기에는 가슴 한 켠을 짓누르는 답답함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이처럼 ‘안녕하십니까?’라는 일상적인 인사말이 우리 사회 전체의 안녕을 묻는 말이 되었음은 우리 사회가 단편적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병들어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병들어 있는 현실 앞에서 우리의 양심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했음을 질책하는 목소리이리라.

흔히 요즘 젊은이들은 풍족하게 자라 세상 물정도 모르고, 지나치게 이기적이며, 사회적 관심도 비판의식도 없다고 개탄한다. 동료 교수들하고 술 한 잔 기울일 때도 곧잘 듣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그런 젊은이들이 자신의 성을 벗어나, 우리 사회 전체의 안녕을 묻고, 그동안 무기력하고 무관심했던 우리의 양심을 질책하고 있다.

90년대 민정 이양 이후 다소 진전되던 민주화가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면서 중단되거나 오히려 역행하였고, 그러면서 다양한 유형의 사회적 갈등과 문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현 정부는 이러한 갈등과 문제에 귀 기울이고 해소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불통과 고압적이고 일방적인 태도로 일관하면서, 밀양, 강정 등지에서 사회적 갈등을 더 키우고 첨예화시켰다. 급기야는 국정원의 대선 개입 정황이 구체적으로 포착되면서, 현 정권의 태생 자체가 의문시되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러한 현실이 젊은이들에게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잉여 인간’이 운위되던 상황에서 취업 전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대학생들은 갈수록 악화되는 이러한 사회적 갈등과 불통의 현실을 어떻게 인지했을까? 대자보 물결을 보면, 그것이 나와 무관한 현실이 아니라, 바로 내가 당장 살아가야하는 현실임을 깨달으면서, 답답한 마음을 가누기 힘들었던 것 같다.

따라서 현재 대학가를 물들이고 있는 대자보 물결을 이해하려면, 오늘날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에 좀 더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몇 년 전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우석훈과 박권일이 쓴 『88만 원 세대』에서 비롯된 이 말은 대학 문을 나서는 젊은이들이 직면해야 하는 적나라한 현실을 잘 드러내주었다. 다시 말하면 저임금노동으로 착취당하고, 대부분 비정규직 일자리라 노동 시장을 떠돌아다녀야 하는 참담한 현실을 말이다. 이후 젊은이들이 처한 이러한 현실을 지칭하는 많은 용어들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것이 ‘삼포세대’이다. 젊은이들이 이러한 경제적 현실 때문에, 연애, 결혼, 출산 등 세 가지를 포기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러한 참담한 표현으로도 부족한, 오히려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사치로 느껴지는, ‘잉여 세대’라는 말이 등장했다. 88만원 세대는 저임금이고 불안정한 노동환경이지만 그래도 고용이 되었다. 그러나 이젠 고용 자체가 불가능해진, 이 사회, 이 체제로부터 배제된, 버림받은, 남아도는 존재, 즉 ‘잉여 인간’이 대학문을 나서는 젊은이들에게 주어지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잉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고용되어야 하고, 따라서 현재 대학은 취업 전쟁 중이다. 대학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육부는 이 비정상적이고 비인간적인 현실을 외면한 채, 대학을 더욱더 취업 전쟁터로 내몰고 있다. 몇 년 전 ‘반값 등록금 투쟁’이 거세졌을 때, 교육부는 이 등록금 투쟁을 피해가려고 의도로 대학구조조정을 본격화하였다. 교육부는 경영, 경제, 회계, 법률 관계자들이 다수 포진된 대학구조조정개혁위원회를 중심으로 시장의 논리를 본격적으로 가동하면서 대학을 평가하고 단죄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가장 비중 있는 지표로 등장한 것이고 취업률과 재학생 충원률이었다.

그러면서 대학은 취업 준비 학원으로 바뀌고, 재학생을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가 해당 학문의 경쟁력이 되어버렸다. 대학생들은 이러한 시장판에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내면화하면서 취업은 대학의 화두가 되어버렸다. 신자유주의적 경제 체제하에서 완전 고용이 포기되고, 일정한 노동인구만을 필요로 하는, 그러면서 이른바 잉여 인간을 양산한다는 비판적인 지적은 있어 왔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 우리 젊은이들의 현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일찍이 기성세대가 경험하지 못한, 참담한 현실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기성세대, 특히 80년대 민주화운동을 경험했던 우리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을 들여다보기보다는 80년대를 기준 삼아 그들의 사회적 무관심을 질책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80년대 민주화를 경험했던 세대는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볼 때, 민주화 세대는 ‘진보’라는 화려한 표식을 여전히 과시하고 다닐지라도, 대사회적으로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발언을 아끼지 않을지라도, 대학 안에서는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의 시장 논리적 대학 구조 조정 앞에 꼼짝 못하고 있거나, 심지어 점차 대학 입학자가 감소한다는 현실에 숨어 교육부의 시장 논리적 구조조정의 충실한 주구가 되어가고 있다.

어쩌면 젊은이들이 현실에 무감각하고 무비판적인 것이 아니라, 민주화 세대가 그들의 움직임, 그들의 현실에 둔감했던 것은 아닐까?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번졌던 촛불 시위만 해도 그렇다. 거기서 민주화 세대가 한 일은 무엇인가? 각기 개인의 안녕에 칩거해 있다가, 촛불 시위를 보고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자신의 안녕으로 되돌아가버리지는 않았는지 묻고 싶다.

그 많은 촛불들은 어디로 갔는가? 88만원의 비정규직 노동자마저 사치가 되어 버린 잉여 세대의 ‘안녕’ 앞에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안녕하십니까’ 대자보 물결은 젊은 세대의 자아 반성도, 사회적 관심도 아니고, 기성세대, 특히 민주화 세대에게 다그치는 물음이다.

가톨릭에서는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항의하는 ‘평신도 1만인 선언’을 계기로, 그동안 각기 흩어져 개인의 안녕에 안주해 있던 사람들을 끌어 모아 사회적 안녕을 묻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기에도 젊은이들은 없었다. 역전의 용사들(?)이 다시 모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톨릭 대학생이나 청년들과 소통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다면, 또 다시 사회적 안녕에 대한 물음은 개인의 안녕에 묻혀버릴 공산이 크다.

‘안녕하십니까’ 대자보 물결을 단순히 젊은이들의 사회적 문제의식이라는 측면에서만 바라보지 말고, 젊은이들이 처한 참담한 현실을 좀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공감하려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특히 민주화 세대가 과거의 경험에서 만들어낸, 그래서 기억에만 존재하는 그런 척도로 젊은이들을 재지 말고, 그들의 눈높이에서 그들과 함께 고민하고 아파하면서, 지금과 다른 세상을 꿈꾸려는 의지와 노력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김항섭 : 우리신학연구소 소장을 역임했고, 현재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신대 종교문화학과에서 종교학을 가르치고 있으나, 갈수록 인문학의 입지가 좁아지는 현실에서 고투하고 있고, 자본주의의 어설픈 개혁이 아닌 근본적인 변혁을 일구고 있는 남미 안데스 지역의 원주민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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