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돋보기 – 평신도의 이름으로 교회와 세상의 개혁을!

황경훈(아시아 평화 연대 센터장)

평신도의 이름으로 교회와 세상의 개혁을!

올해 새롭게 연재하는 ‘지금여기’ 돋보기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기사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기사를 월별로 하나를 선정해, 돋보기의 역할처럼 크고 깊게 보는 자리이다. ‘지금여기’라는 말은 평신도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귀한 표현이지만, ‘지금여기’가 ‘구원이 실현된 세계’라는 뜻으로 새겨져, 현실에 안주하게 되어 반동적 지배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는 꼴이 되어버릴 위험이 있다. 따라서 ‘지금여기’는 곧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종말론적 긴장을 유지한 채, 한편에서는 이 기사의 좀 더 확장된 의미를 살펴보고, 다른 한편에서는 ‘교회에 약이 되고 세상에 밥이 되는’ 지금여기의 정신이 고여 썪지 않도록 도전과 과제를 던져 주기를 희망한다. 선택된 기사는 전문을 실을 수도, 또는 필요한 부분만을 실을 수 있으며 글을 쓸 때마다 이를 밝히기로 한다. 이번 기사는 후자가 되겠다. 다룰 기사는 아래와 같다.

가톨릭행동, 첫 시국미사 “소녀 대통령은 안 된다”

“교회 안에도 불의에 저항하는 그리스도인과 독재자 그리스도인이 있다”

박상훈 신부 “우리도 나자렛 예수라는 원칙으로 돌아가자”

 

대한문

▲ 대한문 앞에 모인 600여 명의 신자와 시민들

성탄을 이틀 앞둔 23일, 천주교 신자들이 대한문 앞에 모여 “우리는 안녕하지 못하다”고 외쳤다.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정의 · 평화 · 민주 가톨릭행동 추진위원회’가 ‘가톨릭 신자 여러분,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봉헌한 시국미사에는 600여 명의 신자, 수도자, 시민들과 40여 명의 사제가 참여해, 박근혜 정권에 대선 개입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민주주의 회복을 염원했다.

강론에서 박상훈 신부(예수회)는 “세상이 좀 더 인간적이고 살만한 곳이 되기를 바라는 희망이 부질없는 것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 때까지는 불과 1년도 걸리지 않았다”면서 “세상이 살 만하다고 믿는 사람들, 스스로 안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제 대통령이거나 그의 비서실장, 새누리당 국회의원, 재벌 회장이거나 검찰총장이거나 대법원 판사, 조중동과 종편의 주인 등 한 줌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 신부는 철도 파업 문제에 관해 대통령이 “당장 어렵다는 이유로 원칙 없이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간다면 우리 경제 · 사회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 발언을 언급하며, “대통령 말대로 우리는 지금 정말 어려우므로, 나자렛 예수라는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예수는 “하느님의 진실이라는 관점에서 철저히 각성된 사람, 하느님이 남용되는 현실에 대해 눈을 부릅뜨고 지켜봤으며, 지배하고 억압하는 거짓을 세상에 드러낸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중략)

이날 자유발언에서 성염 전 교황청 한국대사는 “지난 11월 24일부터 28일까지 로마를 방문했다”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첫 번째 권고문 <복음의 기쁨> 가운데 두 구절을 낭독했다.

“<복음의 기쁨> 182항에는 ‘우리 사목자들은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가 요구하는 모든 자리에서 발언할 권리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83항에는 ‘그 누구도 우리 성직자들에게 사회생활과 국가생활은 접어놓고 마음의 평화만을 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염 전 대사는 (중략) “문둥병자를 직접 손으로 만져 낫게 하신 예수님처럼, 대한민국에서 정의와 민주, 자유와 통일을 위해 문둥병자, 종북주의자 취급을 받았던 이들에게 달려가 그들을 만지고 끌어안았던 신부님들이 자랑스럽다”며 “이 신부님들을 종북 좌파라고 부르는 이들은 앞으로 10년을 지켜보라. 많은 이들이 이 종북 좌파들 때문에 가톨릭에 입교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성염 전 대사는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소녀 대통령은 안 된다”고 일갈했다. 성 전 대사는 “대통령이 무슨 문제만 있으면 발끈해서 ‘가만히 안 둔다’며 국민에 엄포를 놓고는 다시 숨어버린다”면서, 박근혜 정부는 “이처럼 너무나 유약한 정권”이라고 비판했다.

신학자 김근수 씨도 발언에서 ‘교회 안에 두 진영이 있다. 불의에 고통당하는 가난한 이웃을 돕는 그리스도인이 있고, 자신들만 나라를 지킨다고 자만하는 그리스도인 독재자들도 있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을 언급하며, “흔들리지 말고 정의로운 길을 가자”고 당부했다. 김근수 씨는 자신에게 내년 소원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물러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혁적인 추기경님이 탄생해서 서울대교구장을 맡는 것”이라고 했다.

시국미사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와 함께 왔다는 대학생 김태윤 씨는 “우리 사회가 역행하고 있는 듯하다. 종교계가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다는 건 무언가 크게 문제가 있는 사회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씨는 “이곳에 오니 신앙심이 더 커지는 듯하고 신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모아가고 있구나 싶어서 좋다”며 “일부 사람에 의해 다수가 고통 받지 않고, 많은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성탄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중략)

미사를 마친 후 신자들은 묵주기도를 하며 대한문에서 광화문을 거쳐 민주노총 본부가 있는 경향신문사 앞까지 행진했다. (후략)

또 하나의 교회사적 순간

지난 대선이 국정원을 비롯한 여러 국가기관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총체적 부정선거요 사기극이었다는 것이 드러나자, 지난 9월 10일 평신도들은 ‘천주교 평신도 1만인 시국선언’이라는 교회사적 ‘사건’을 만들어 냈다. 이어 세 번에 걸친 시국 기도회와 ‘만민공동 집담회’라는 토론회를 거쳐 ‘가톨릭행동’을 조직하기에 이르렀고, 바야흐로 위 기사 사진이 증명하듯 12월 23일 600여명의 신자와 시민들이 참가해 ‘박근해 퇴진, 이명박 수사’를 외치는 ‘평신도 시국미사’라는 또 하나의 교회사적 순간을 맞이했다.

혹자는 이미 1984년 교황 방한과 1988년 세계성체대회 등 ‘세계적 행사’에 1백만 명이 모이는 저력(?)이 있는데, 불과 1만명과 몇 번의 시국집회로 무슨 ‘교회사적 의의’ 운운하느냐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당시 신도대중은 교구별로 배정해 놓은 자리에 교구별로 거의 ‘동원’되다시피 했던 데 반해, 이번에는 ‘정권퇴진’을 위한 정치집회에 전국에서 평신도들이 스스로 참가한 점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물론 당시에도 원주교구의 장일순 같은 평신도 지도자는 “세상을 섬기로 온 예수는 그렇게 요란하게 오지 않는다”며 교황이 집전하는 여의도 광장 미사에 가기를 ‘거부’한 예외는 있지만, ‘내가 참가해봐서 아는데’ 평신도는 그저 동원의 대상이었지 주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게 우리의 현실이지 않는가 말이다. 짧게는 1962년 바티칸 공의회가 열린 전후로, 길게는 이 땅에 천주교가 전파된 230여년 이후로 평신도가 광범위하게 조직적으로 이런 행동을 한 적이 있었는가를 묻는다면 ‘교회사적’이라는 말을 달아도 과장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 집회의 메시지는 간단명료해 보인다. ‘소녀 같은 대통령’은 자격이 없으니 이번 총체적 사기극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는 한국 평신도의 외침이며, 기사도 이를 제목으로 뽑아 직접 전달하고 있다. 그런데 후술하겠지만, 기사는 박근혜 퇴진과 더불어 내년에 개혁적 추기경이 탄생해 서울대교구를 맡는 것이 바람이라는 평신도 신학자의 발언이 더 포괄적이고 핵심적임을 놓쳤다. 신도수와 (정치사회적) 영향력 면에서 한국교회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서울대교구는 (주)‘평화드림’이라는 수익을 목표로 하는 기업을 운영해 ‘성직자 CEO’를 양산해오고 있고, 또 전국에서 (환자 개인당 사용가능 용적률로 볼 때) 최대라 자랑하는 가장 ‘럭셔리한’ 병원사업을 벌여나감으로써 상업주의에 앞장서고 있으며, 자신의 병원 해고노동자의 복직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그들 같은 비정규직 노동인력으로 돈벌이에 급급한 신자유주의의 기수로서 반복음의 진흙탕 속에서도 ‘기업영성’ 운운하는 기만적인 상황 임에도, 기사는 그 교회개혁에 대한 몹시도 절실한 바람을 담지 않았다.

‘평신도가 빠진’ 평신도 시국미사 기사

이 기사는 행사가 23일 밤 9시를 넘어 늦게야 끝났음에도 다음날 오전에 기사를 내보내는 기민함과 부지런함을 보였다. 그러나 이날 전국에서 40여명의 사제들이 ‘평신도 시국미사’에 동참한 것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아름다운 연대’의 한 페이지로 기억되어야 하는데 이에 대한 맥락이 기사에는 드러나지 않아 좀 아쉬웠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몇 가지 더 있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이 기사를 읽는 대다수의 독자가 평신도라는 것을 전제할 때, 기사의 핵심이 뭔지 기사를 읽고서도 잘 파악이 안된다는 점이다. 분명 기사는 제목을 “가톨릭행동, 첫 시국미사 ‘소녀 대통령은 안 된다’로 달았고 이는 성직자가 아니라 평신도의 일성이었다. 그런데 기사는 집회의 순서를 의식해서인지 미사 때 강론을 맡은 사제의 강론 내용을 네 구절이나 인용하다가 뒤에 가서야 ‘소녀 대통령’이 왜 안되는지에 대한 얘기를 싣고 있다. 그러니까 시간흐름대로 죽 나열해 나간 기사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어봐서 아는데’ 실제로는 평신도 신학자가 바티칸 교황대사보다 먼저 발언을 했고, 발언의 내용도 이 집회에서 가장 핵심적이었다고 생각된다. 한마디로 ‘박근혜 퇴진, 한국에 개혁적 추기경 서임’이며 이는 이 집회에서 나온 가장 강력하고 희망에 찬 복음적 말씀이었다. 그럼에도 지위가 높은 전 교황대사에 먼저 자리를 할애한 것은 교회내 위계를 그대로 따르는 ‘파워중심 사고’, 곧 교회에 대한 성직중심적 이해를 노정한 것이며 그만큼 ‘교회’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인다.

따라서 평신도 신학자의 핵심적 일성은 사제의 강론과 ‘프란치스코 교황권고가 사제단에 안성맞춤’이라는 전 교황대사의 사제단에 대한 헌사, 곧 “이 신부님들을 종북 좌파라고 부르는 이들은 앞으로 10년을 지켜보라. 많은 이들이 이 종북 좌파들 때문에 가톨릭에 입교할 것”에 밀려 기사의 초점이 흐려진 것이다. 이쯤되면 이 기사를 읽는 독자들은 앞에 몇 구절 읽다가 ‘아, 신부님들 말씀이구만….평신도 미사라더니…’ 이러면서 그 정도에서 읽기를 그치게 되지 않을까?

물론 시간이 촉박한 것, 또 급박한 정치적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기사는 달라야 한다. 시간의 흐름이나 행사 순서에 상관 없이 핵심 구절을 뽑아 기사 리드로 처리함으로써 독자들이 몇 줄만 읽어도 기사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훈련된 기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요 책임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기자는’ 적어도 자기 영역에 충실해야 한다. 지금 정권과 관련한 이런 저런 사건과 관련해서는 ‘지금여기’보다 ‘한겨레’나 ‘조선일보’가 자기 색깔대로 충실한 내용으로 더 호소력 있는 기사를 쏟아낸다. 그럼 ‘지금여기’는 동일한 사안을 갖고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나? 답은 간단하다. 교회의 관점을 써야하고, 그것도 교회쇄신의 자정능력을 상실한 제도교회와 성직자가아니라 평신도의 관점에서 써내야 한다. 그래야 말 그대로 ‘교회에 약이…사회에 밥이’되는 언론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 기사는 평신도의 관점을 놓침으로써, 늘 ‘지금여기’가 비판하는 가톨릭계 언론이 하는대로 무의식적으로 ‘성직자 중심’ 기사가 되어 버렸다. 한국 교회의 상황에서 평신도의 관점이 부재한다는 것은 교회 전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내년이면 ‘지금여기’가 우리신학연구소에서 독립해 5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기념비적인 해에 한 가지 제안을 한다면,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마음으로 새출발하지 않으면, 미래는 밝지 않다.’ 너무 부정적이고 불쾌하게 들리는가? 그러나 몸에 좋은 약은 쓰고 그래야 ‘약’이 된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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