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사회운동 다시 보기 – 예수냐, 마르크스냐?

경동현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예수냐, 마르크스냐?

평신도 사회운동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경동현

종교의 시대?

합리론자와 과학자들은 개인과 사회가 합리화되고, 과학기술문명이 발달할수록 종교는 점차 쇠퇴하거나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예언과 달리 문명의 최첨단을 누리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오히려 물질문명에 대한 염증과 권태로 인해 종교적 욕구와 열망은 더 높아가는 듯 보인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매우 종교적인 이유는 현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운데, 그 고통에서 벗어날 출구가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기성 종교가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희망을 찾지 못한 많은 이들은 광야를 헤매던 히브리 노예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우상을 세우고 그들의 갈증을 채우고 있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가 그랬고, 오늘의 정치 현실이 그렇다. 누군가를 열망하고 지지를 표하는 모습이 맹목에 가깝고, 또 누군가를 증오하며 파괴하려는 데 거침이 없다. 종교성의 왜곡된 분출이다. 국가와 사회를 탓하기 전에 교회는 이 현상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나라와 교회를 걱정하는 평신도들

성탄을 사흘 앞둔 12월 22일, 필자는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이 23일 저녁 주관하는 ‘나와 내 이웃의 안녕을 묻는 시국미사’를 알리기 위해 명동성당을 찾았다. 9시 조금 넘어 성당 입구에 도착했는데 ‘대한민국 수호 천주교인모임’에서 나온 할아버지 두 분이 “나라 망치고 교회 망치는 정의구현사제단은 교회를 떠나라.”는 내용의 홍보물을 신자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4대강 문제와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에 대한 시국선언 흐름, 제주 해군기지 건설과 밀양 송전탑 문제 등에 대해 교회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우려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평신도들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교회가 사회적 현안에 대해 직접적으로 의사 표현하는 것을 두고 이들은 정교분리를 내세우거나 일부 사제들의 일탈이라 주장하며 반대 목소리를 낸다. 실제로 2013년 9월 9일부터 11월 25일까지 대한민국 수호 천주교인모임은 “어쩌다가 양들이 목자들을 걱정하는 천주교회가 되었습니까?”라는 제목의 4단 광고를 조선일보를 시작으로 전국의 중앙 및 지방 일간지 24곳에 게재하였다.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이나 대한민국 수호 천주교인모임이나 나라와 교회를 걱정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걱정의 내용에 공통점은 찾기가 어렵다.

예수냐 마르크스냐?

프란치스코 교황의 첫 공식 문헌인 『복음의 기쁨』이 지난 11월에 발표되면서, 그동안 교황의 혁신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었던 이들이 일제히 ‘교황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12월 14일 이탈리아 일간지 『라 스탬파』와 가진 인터뷰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잘못된 것”이지만 “난 내 인생에서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만나왔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고, 그 만남이 불편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리고 자신이 『복음의 기쁨』에서 전한 내용은 역대 교황들이 대부분 사회교리에서 다룬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지금은 종북주의, 빨갱이라는 표현이 더 익숙하지만 과거 진보적인 평신도 운동들도 ‘마르크스주의’라는 의심을 종종 받곤 했다. 이는 1970~80년대 ‘그리스도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논란의 중심이 됐던 현상과 관련이 깊다. 이른바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을 사회변혁의 도구로 인정한 ‘해방신학’에 대한 의심이었는데 한국 교회에 해방신학이 소개된 것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신학과 김지하 구명운동

1972년 10월 유신헌법 발표 이후 ‘민주수호를 위한 시국선언’ 발표가 줄을 이었고, 1974년 4월 가톨릭신자였던 김지하가 구속됐다.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김지하의 구속에 관심을 보였던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는 평신도들의 운신에 자극받을 만큼 아직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본가톨릭교회에서 김지하 구명운동이 시작됐고, 김지하 사건과 관련하여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면서 교회 차원의 석방 노력도 탄력을 받게 됐다.

당시 김지하가 법정에서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가톨릭의 ‘해방신학’의 입장에서 학대받는 자들의 해방을 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론한 것에 대한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일본가톨릭정의평화위원회는 그의 ‘양심선언’에 나타난 사상의 신학적 검증을 의뢰하는 한편, 그의 신앙보증을 위해 국제적으로 신학자들의 서명운동을 진행하였다. 당시 서명운동에는 유럽과 제3세계에 걸친 15개국의 200여명이 호응하였다.

당시 한국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회참여 논리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이러한 ‘해방신학’의 관점이 신학자가 아닌 김지하를 통하여 한국교회에 수용된 것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가톨릭 대학생운동과 외피론 논쟁

1967년 열린 전국가톨릭학생대회는 신심위주, 엘리트주의적으로 흘렀던 이전의 학생대회와는 달리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한국사회를 분석하려고 했으며, 사회참여와 진정한 가톨릭 대학생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70년대 가톨릭 대학생운동은 ‘참여 속의 성화’라는 슬로건을 전면에 내걸고 지학순 주교의 구속 이후 결성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활동에 고무돼 새로운 사도직의 진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가톨릭 대학생운동 안에서 사회참여 운동에 대한 논란이 불거진 것은 1980년 광주항쟁 이후에 군부정권의 탄압을 피해 종교단체 속에서 활로를 찾던 학생운동권 그룹이 늘어나면서부터다. 이른바 ‘외피론’ 논쟁이다. ‘외피론’이라는 말은 1525년 엥겔스에 의해 처음 사용됐는데, 종교개혁의 좌파지도자인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가 이끈 독일농민전쟁이 종교적 ‘외피(外皮)’를 한 계급투쟁이었다고 규정한데서 비롯됐다. 그렇지 않아도 해방신학의 영향으로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의심을 사고 있던 터에 학생운동권 그룹의 가세는 가톨릭 대학생운동 내의 정체성 논란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정체성 논란이 심화되던 1981년 10월 13일자 주요 일간지 1면에는 재일유학생간첩단 사건이 대서특필로 실렸다. 전두환 정권에서 보안사는 간첩단 사건을 만드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특히 일본에 눈을 돌렸다. 당시 일본의 재일동포 사회는 무궁무진한 황금 어장이었다. 그 낚싯밥에 처음으로 걸린 사람이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재일동포였는데, 5인조 간첩 명단에 1980년 가톨릭학생회 전국협의회 회장을 했던 이태수도 포함됐다. 구명운동에 나선 가톨릭 학생회원들은 전국의 주교들을 찾아가 “이태수는 유물론자가 아닙니다.”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받아냈는데, 이는 이태수가 석방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지하가 옥중에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던 것과 매우 비슷한 맥락이다.

독일농민전쟁을 주도했던 토마스 뮌처의 신앙이 단지 외피로 작용했다는 엥겔스의 주장은 인간혁명과 사회혁명의 통합을 시도한 뮌처를 오해한 경솔한 해석이라는 것이 오늘날 학자들의 대체적인 평이다. 주위를 돌아보면 기도와 영성을 추구하는 이들은 개인적인 신앙을 넘어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의식으로 확장되지 못하는 경향이 많은 반면, 사회개혁과 진보를 부르짖는 자들에게서는 내면적 영성의 심오한 차원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예수냐, 마르크스주의냐를 묻는 질문은 평신도 사회운동을 하는 이들이 기도와 활동,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문제를 통합하라는 시대적 요청과 다르지 않다.

다음호부터는 1980~90년대 평신도 사회운동의 부흥과 쇠락의 전환점이 됐던 사건과 현상들을 통해, 그러한 과거의 경험에 기대어 새로운 평신도 운동이 앞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모색해보고자 한다.

경동현

대학시절 멋모르고 시작한 가톨릭학생회 활동으로 삶이 변했다. 신학으로 석사․박사과정을 마치고 연구소 소장이 된 이후 ‘책임’의 의미를 몸으로 알아가는 중이다. 평신도가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꽤 낯선 한국에서 평신도들이 꾸려온 우리신학연구소 20년의 의미를 찾고, 새로운 20년을 준비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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