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인물 열전 – 문학과 종교, 또는 정치 사이 – 영원 속의 오늘을 시로 노래한 시인, 구상 <1>

한상봉

구상은 『실존적 확신을 위하여』에서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의 말을 빌어 ‘삶의 보람을 찾게 하는 신비적인 원동력’이 ‘실존적 확신’이며, 그 실존의 원리가 자신에게는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말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참회록』에서 “하느님! 당신은 우리를 당신께로 향하게 만드셨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그분의 근원적 초청에 전적으로 응답하는 길이 곧 구상의 삶이었다고 말하면 넘치는 판단일까? 여기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시를 쓴 사람이 구상이라고 보면, ‘영원 속에서 오늘’을 찾고, ‘오늘 속에서 영원’을 찾는 그이의 태도야 말로 신앙의 본질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학적 유년기종교철학적 청년기

구상의 자전적인 글 ‘에토스적 시와 삶’을 보면, 그의 문학적 자궁은 어머니였으며, 종교-철학적 자궁은 가톨릭 신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산 이씨 백두진사(白頭進士)의 고명딸이었던 어머니는 글과 붓이 능해서, 구상에게 어려서부터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을 가르쳤으며, 고시조와 이조의 평민소설, 신소설과 한글 토가 달린 『삼국지연의』, 『수호지』, 『옥루몽』 등 중국 소설을 접하게 했다.

소학교에 들어간 구상은 조선어나 글짓기에 능통했으며, 문학적 상상력도 뛰어났다. 글짓기를 하노라면, “온 세상 내 것 네 것 없이 골고루 잘살기 위해 돈이라는 것은 없애야 한다.”느니 “염소의 뱃속에는 기계장치가 있어 그 똥이 검정 콩알처럼 동글동글하게 나온다.”고 해서 교사와 동급생들을 웃게 만들었다. 소학교 6학년 때 애독하던 『카톨릭 소년』에 ‘아침’이란 동요가 뽑히고, 중학 시절에는 『학우구락부』에 ‘하루살이’란 시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나는 장인적 의미에서 시인이 아닐지 모른다.”는 자신의 평가처럼, 그는 시보다 종교에 더 깊이 심취했다.

구상의 어머니 이정자는 이승훈 베드로의 집안이며, 아버지 구종진은 결혼하면서 세례를 받았다. 구상은 1919년 서울 이화동에서 태어났는데, 할아버지는 울산 부사, 큰아버지 가운데 한 분은 창령 현감, 또 한 분은 현풍 군수를 지냈으며, 구상의 아버지는 궁내부 주사였다. 아버지는 한일합병 이후 경찰학교에서 한문교관으로 일하다 은퇴했다.

당시 구상은 백동성당(현 서울 혜화동성당)에 다녔는데, 구상의 가족은 백동성당을 맡고 있던 성 베네딕도회와 인연을 맺게 되어, 함경도 원산에 진출하게 된 베네딕도회를 따라 1923년 원산으로 이사 가게 되었다. 원산에서 수도회의 요청에 따라 구상의 아버지는 원산 근처에 ‘해성학교’라는 초등교육기관을 셋이나 세우고 운영했다.

한편 구상은 형 구대준을 따라서 덕원신학교 중학 과정을 밟다가 3년 만에 그만두었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그때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고 간호할 사람이 자신 밖에 없어서였다고 하지만, 구상 자신은 “솔직히 말하면 나의 실존적 욕구가 성직자의 규범생활을 해낼 자신이 없고, 나는 어려서부터 레지스탕스 기질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구상은 곧 일반 중학교로 전학을 했지만 금방 퇴학을 당했다. 문학을 한다며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들과 어울려 다니며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기 일쑤였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나를 주의자(主義者)로 불렀지.” 당시 주의자(主義者)는 저항적 지식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 문학은 종교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었다. “문학은 항시 인생의 부차적인 것이요, 제1의적인 것은 종교, 즉 구도요, 그 생활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구상이었지만, 국내에서 전망이 보이지 않자 일본 밀항을 감행했다. 일본에서 생활비 마련을 위해 연필 공장 노무자 등 일급 노무자로 전전하다가 선배의 권유로 시험을 쳐서 명치대학 문예과와 일본대학 종교과에 동시에 합격했으나 종교과를 선택한다. 동경 유학 생활 중 저항적 기질이 살아나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평등을 지고지순의 가치 중 하나로 삼게 되면서 자신의 출신 성분도 소농(小農) 출신이라고 숨기게 되었다. 구상은 당시 “반신적(反神的)이게 되고, 니체에 심취하였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동경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친이 죽고, 형님인 고대준 신부가 흥남성당에 부임하면서 집에 혼자 남게 된 어머니를 위해 귀국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이데올로기 싸움에 뒤어들다

구상은 귀국 후에 글만 읽고 시 작업에 몰두했는데, 마침 폐병까지 걸렸다. 전쟁 말기에 일제가 폐병에 걸린 시인마저 군대에 징집하려고 하자, 이를 피하고자 친일 조선인이 함경도 원산 지역에서 발행하던 『북선매일신문』 기자로 일했다. 이 시기를 두고 구상은 “목숨을 부지하려는 일념과 펜을 잡는다는 매혹에 식민지 어용(御用)신문의 기자가 되어 용왕 앞의 토끼처럼 쓸개는 떼어놓고 날마다 성전송(聖戰頌)과 공출독려문(供出督勵文)을 써 댔다.”고 고백한다.

광복을 맞이하면서, 구상은 교회학교에서 일하다 인민투표에 나가 최고 득표자가 되었고, 교원직업동맹 부위원장도 맡게 된다. ‘주의자’라는 꼬리표가 준 선물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구상은 필화사건을 겪으면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자유를 찾아 월남하게 된다.

해방 직후 구상은 원산문학가동맹에도 참여해 해방 1주년 기념시집 『응향』에다 ‘여명도’ ‘길’ ‘밤’ 등을 발표했는데, 이 시가 퇴폐적 · 환상적 · 악마적이라는 이유로 지탄받고 반동시인으로 낙인찍혔다. 서울에서도 남로당계 기관지인 『문학』 3호에서 이 시를 비난했는데, 당시 소설가 김동리 등의 변호를 받았으며 소설가 최태웅이 편집하는 『해동공론』에 그 경위를 밝히기도 했다. 양한모 선생이 해방정국에서 좌익 활동을 했다면, 구상은 어쩔 수 없이 우익에 합류했다. 그의 정신적 고향인 덕원수도원이 북한 정권에 의해 몰수당한 사건, 그리고 그의 친형인 구대준 신부가 한국전쟁 직전에 북한에서 순교한 사건을 구상 역시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49년 그가 『연합신문』 문화부장으로 일하고 있던 중에 육군 정보국의 요청으로 심리전 요원으로 일하게 된다. 여기서 대북 살포용 『봉화』를 직접 편집 인쇄하고 북한 방송을 분석했다. 한국전쟁 일주일 전에 구상은 전쟁 발발 조짐을 상부에 보고했으나 묵살 당했다. 이를 분통해 하던 구상은 밤새 마신 술 때문에 술집에서 6.25의 아침을 맞이하고, 6월 26일 수원으로 후퇴해 국방장관의 제1호 포고문을 작성한다. 한국전쟁 기간에 구상은 국민홍보지인 『승리일보』를 발간했으며, 1.4 후퇴 때는 대구에 가서 공군문인단과 육군종군작가단 출범에 산파 역할을 맡았다. 이 당시 구상은 이종찬 · 이용문 · 박정희 장군을 비롯한 군 장성들과 친분을 갖게 되었다.

한편 열렬한 천주교 신자였던 구상은 한국전쟁 이후 장면 선생처럼 이승만 정권과 결별한다. 구상은 당시 <영남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칼럼 ‘고현잡화’를 통해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비판했다. 이 당시 쓴 글은 1953년 <민주고발>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지만 판금령 조치가 내려진다. 그 후 구상은 민권수호 국민총연맹 문화부장으로 염상섭, 전진한 등과 명동 시공관 등에서 시국강연을 하기도 했는데, 결국 1959년 10월 반공법 위반과 이적죄로 수감되어 15년형 구형을 받기도 했다. 구상이 이적병기(利敵兵器)를 북한에 밀송하려 했다는 혐의였다. 이 사건은 구상의 친구가 남대문 시장에서 미제 진공관 2개를 사서, 동경대학에서 연체생물 연구를 하고 있는 사위에게 보낸 것을 구실삼아 반공법 위반죄로 시인과 친구를 잡아넣은 사건이다. 결국 구상은 8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4.19 직전 무죄로 석방되었다.

당시 구상이 자신의 최후진술을 시로 적었는데, “내가 만일 조국을 팔았다면, 그 앞잡이가 되었다면, 또 그 손에 놀아났다면, 재판장님! 징역이 아니라 사형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했다. 감옥에서 구상은 줄곧 현실에 나서느냐 문학의 길에만 정진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결국 문학의 길만 가기로 결심했다. 구상은 1959년의 감옥 생활 이후 그의 결심대로 사회적 직책은 일체 맡지 않는다. 사회활동을 접은 구상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만족했다. 4.19 이후 민주당 정권 시절, 민주당은 민의원과 참의원에 구상을 공천하려 했으나, 구상은 이 제안도 끝내 거절했다.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편집국장. 틀에 박히고 황량한 천주교 언론판에서 개념 언론의 장을 새롭게 쓰기위해 애쓰고 있다. 동시에 다수의 천주교 영성서적 저자로 대중의 힐링에 기여하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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