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복음 – 예수와 헤로데의 갈등 – 김근수

김근수

예수와 헤로데의 갈등

15일 주님공현대축일 / 마태 2,1-12

새로 태어난 왕 예수와 당시 왕 헤로데의 갈등이 나타나는 이야기다. 이집트왕 파라오와 아기 모세의 투쟁을 연상케 한다. 모세와 예수의 운명을 연결시키려는 마태오의 생각이다. 구약의 발라암 이야기(민수 23,7; 24,3)가 떠오른다. 마태오는 예수가 유다의 왕이요 유다 지방 출신이며 유다에서 죽을 운명임을 강조하고 있다. 유다교에서 메시아 탄생지가 베들레헴이라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가 나자렛으로 이사하는데 성서 인용이 필요했다. 마태오는 점성가들의 여행엔 관심이 없고 점성가들이 헤로데 왕을 만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점성가들은 페르샤 사제계급을 가리켰지만 차차 동방의 철학자, 자연과학자, 주술가로 여겨지게 되었다. 유다교는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종류의 주술을 배격하지만 점성술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점성가들은 전체적으로 호의적인 평을 들었다. 누구나 자기 별을 가지고 태어나며, 위대한 인물들이 탄생할 땐 밝은 별이 비춘다는 생각이 유행하였다. 실제로 예수 탄생 시기에 어떤 천문학적 사건이 있었는지 기록을 찾아 헤매던 시절이 있었으나 마태오는 오직 하느님의 이끄심에 점성가들이 따른다는 사실만 소개한다.

헤로데는 백성들에게 미움 받았기 때문에 새로운 왕이 될 아기의 탄생 소식에 백성들은 기뻐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마태오에게 예루살렘은 예수가 죽으실 땅이요, 백성들에게 버림받을 땅일 뿐이다. 헤로데는 에돔족(창세 36,19) 출신이라는 약점 때문에 메시아 운동을 두려워했다. 헤로데와 율법학자들이 예수 탄생 소식을 논의했다는 구절은 역사적으로 의심스럽다.

점성가들이 밤에 여행한 것은 상식에 따른 것이 아니고 마태오가 별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한 계기가 필요해서였다. 엎드려 절하는 것은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하는 것인데, 그리스문화에서 신들에게 동방에서 권력자들에게 그렇게 절했다. 사람들이 예수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마태 8,2; 9,18), 예수가 메시아라고 제자들이 고백할 때(마태 14,33), 부활하신 예수께 경배할 때(마태 28,9) 나타난 자세이기도 하다. 점성가들은 예수를 다윗의 자손(마태 1,1), 하느님의 아들(마태 1,21)로 보고 인사하는 것이다. 점성가들은 아기 예수께 선물을 드린다. 그 선물은 그리스도교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쳐 왔다. 그러나 점성가들의 선물을 어떤 뜻으로 해석할지는 사소한 문제에 속한다.

오늘 이야기는 그리스도교 신심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성경 본문에서는 점성가들의 출신지도, 그들의 숫자도 알 수 없다. 구약의 이사 60,3과 시편 72,10을 떠올리며 중세 이후 사람들은 점성가들을 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경 본문만으로 그들이 왕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초대교회는 점성가들이 예수를 찾아온 시점을 예수 탄생 2년 뒤로 여겼지만, 그 후 아우구스티누스 영향으로 탄생 후 13일로 굳어졌다. 카스파르, 멜키오르, 발타사르로 점성가들의 이름도 굳혀졌다. 수염이 있다느니, 흑인도 포함된다느니, 그들의 생김새도 갖가지로 추측되었으나 성경 본문으로는 알 수 없다. 선물의 의미에 대해 다양한 제안도 있었고, 오늘 이야기에서 비롯된 각종 신심행사도 있었을 뿐이다.

설화 같은 오늘 본문에 대한 역사적 관심은 둘째로 치더라도, 신자들 스스로 점성가와 동일시하려는 그 소박한 마음은 존중되어야 하겠다. 오늘 이야기는 예수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드러내려고 이방인의 신앙을 대조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유다인들은 예수를 거절했지만 이방인들은 예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예수는 정치권력과의 갈등 속에서 사는 운명을 지녔다.

마태오는 헤로데와 예수의 갈등이 예수의 아기 시절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힌다. 예수는 식민지 시대의 아들로 태어나 폭군 정치에 시달리는 운명을 타고 났다. 또한 마태오는 불의한 권력과 예수의 갈등이 예수 탄생 때부터 십자가 죽음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어디 예수 같은 운명이 역사에 한둘이랴.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시대의 정치적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종교라는 무대에는 언제나 정치라는 그림자가 배회한다. 불의한 정치권력은 어떻게 종교를 이용할까 노린다. 복음에서 두 가지를 묵상해보자. 불의가 지배하는 시대에 예언자의 탄생을 권력자들이 과연 반길 것인가? 예수가 만일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김근수

연세대 철학과를 거쳐, 독일 Mainz대학 가톨릭 신학과 대학원(신약성서신학 전공)을 졸업했다. 그 후 엘살바도르 UCA대학의 혼 소브리노(Jon Sobrino)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아내, 딸, 아들과 제주시에 살고 있으며 마르코 복음 해설서인 『슬픈 예수』의 저자이기도 하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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