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톡톡 – 엘리자베스 존슨,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유정원

엘리자베스 존슨,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유정원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라는 책을 읽고 서평을 써달라는 요청에 선뜻 응낙을 한 것은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알몸으로 희희낙락 살 때에도 하느님은 무엇이 바쁘신지 그곳을 곧잘 비우신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 아담과 이브가 내쫓긴 그곳에 줄곧 머물러 계실 거라는 생각은 거의 들지 않는데, 난 왜 이 책 제목에 끌린 것일까?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하느님은 어디 계시다고 생각했던 걸까? 이런 새삼스런 질문을 품고 책을 읽어 내려갔다.

한마디로 이 책은 신론, 즉 하느님에 대한 이해와 고백을 담고 있다. 가톨릭 수도자이며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신학자인 엘리자베스 존슨은 특별히 격심한 고통과 지독한 차별 속에 사는 이들 곁에서 연민의 마음으로 하느님이 아픔과 슬픔을 함께 겪고 계시다는 체험의 자리에 독자들을 초대한다. 그들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말하던 하느님을 반복하지 않고, 우리 시대의 아픈 현실 속에서 존재 없이 살아온 가난한 이들이 애타게 찾아낸 하느님을 말해준다.

20세기를 거쳐 오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여 하느님과 세상을 해석하고 신학을 전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루고 폐허로 남은 독일에서 등장한 정치신학. 유럽의 식민지 개척과 북미의 경제적 착취로 고유한 전통문화를 잃고 밑바닥에 내팽개쳐진 남미 민중들이 성경에서 길어 올린 해방신학. 인간으로도 여자로도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벙어리 귀머거리 장님의 삶을 강요당해온 여성들이 하느님 앞의 평등을 제창한 여성신학. 고향땅 아프리카에서 영문도 모른 채 미국으로 붙잡혀와 지주에게 팔려 지독한 노동과 착취와 구타 속에서 함께 고통당하는 하느님과 십자가의 예수를 만난 흑인신학. 불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부는 바람 같은 성령이 다양한 종교들 속에서 하느님의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하는 종교다원신학. 가난한 존재란 굶주림 속에서 앓다 죽어가는 사람들 뿐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는 파괴된 자연도 포함하며, 지구라는 초록별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자 우리의 유일한 집이라고 일깨워주는 생태신학.

이런 신학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던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온 이들은 현실에 짓눌리지 않고 그들을 일으켜 다시 살게 해준 하느님을 새롭게 만났다. 우리도 차분히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내면 깊이 숨어계신 하느님을 만날지도 모른다. 이 책에 나오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그들의 하느님은 우리가 잊었던 다정한 그분일 테니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신이 이해했다면 그건 하느님이 아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지혜롭고 신앙이 깊다 해도 하느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이해했다 한들 그것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보다도 더 작고도 작은 일부이리라.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삼위이신 하느님은 나무의 뿌리, 싹, 열매에 비유된다. 도달할 수 없는 나무의 가장 깊은 근원인 뿌리, 눈에 보일 수 있도록 세상으로 나온 싹, 그리고 꽃 향기 과실과 씨앗처럼 세상을 아름답고 살지게 하는 열매”라고 하였다. 너무나도 어렵고 난해한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 여러 은유 가운데, 내 감성에 가장 부드럽게 와 닿는 은유다. 뿌리이신 아버지 하느님, 싹이신 아들 예수님, 열매이신 생명의 혼 성령.

생태성인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보다 100년쯤 먼저 태어나 독일 라인 강변의 베네딕도회 수도자로서, 초록의 생명력이신 하느님을 전해준 빙엔의 힐데가르트 성녀는 “(삼위 하느님은) 밝음, 섬광, 불로서, 이 셋은 자비심을 가지고 모든 창조물 속에 침투한 하나를 뜻한다.”고 말한다. 불의 발견으로 비로소 문명의 길을 걸어온 우리 인간에게 불이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도 우리를 살게 해주는 따뜻한 사랑의 불이라고 아무 거부감 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해준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성모 마리아처럼 예수를 잉태하고 낳아야 한다고 말한 중세의 신비가 마에스터 에카르트는 “나는 하느님에게서 자유롭기 위해 하느님께 기도한다.”고 밝힌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이들에게, 하느님은 너무도 자유로운 분이므로 우리도 자기 관념에 사로잡혀 답답하게 살게 아니라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비운 자유인일 때 오히려 하느님을 닮았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미국에서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비폭력 저항을 하다 살해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정의란 사랑을 배반하는 것을 바로잡는 사랑”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로서 하느님의 정의가 엄격하고 가차 없는 법의 심판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어진 의로움을 십자가로 보여주는 강인한 약함이라고 깨우쳐준다.

하느님을 체험하고 고백한 그 많은 이야기들을 소개하는 엘리자베스 존슨을 따라가며 나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인가 고요히 깊은 심연으로 잠겨본다.

유정원

종교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사람으로 살아가는 의미를 고민하고 있는 40대 중반 아줌마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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