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새 추기경 청원운동과 교회 쇄신 – 이은석

이은석

추기경 청원운동과 새로운 평신도 운동

  ‘새로운’ 평신도 운동을 ‘또’ 이야기하려 한다. 여기서 걸리는 말이 ‘새로운’과 ‘또’라는 단어다. 새롭다 하면 이전과는 다른 참신하고 신선함을 떠올려야 할 터인데 ‘정말 새로운거냐?’라는 질문에 선뜻 ‘네.’라고 답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또’라는 단어에도 마음이 걸린다. 교회 내 평신도들은 늘 다양한 문제를 앞에 두고 ‘운동’을 벌여왔고, 그 운동이 커다란 흐름이 되어 도도히 흘러오기는 했지만 실상은 ‘평신도 운동이 뭔데?’라는 질문에 그리 쉽사리 답하지 못하는 것도 현실이기 때문이다. 수십 년을 한결같이 ‘새로운’ 평신도 운동을 만들기 위해 ‘또’ 노력해 왔던 것이 역사라면 역사이다.

물론 도도한 흐름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한국사회 농민운동에 우리 교회 평신도들이 주춧돌을 세웠고, 인권운동의 지평도 평신도들의 헌신으로 넓힌 것이 사실이다. 이러저러한 진보의 흐름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평신도 운동이 힘을 보태지 않은 영역이 없다시피 한 것은 선배들의 피나는 헌신과 노력의 덕분이다. 비록 한강처럼 드넓은 물줄기로 대변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대지 곳곳을 흐르는 생명수였던 실개천과 지하수가 평신도 운동의 흐름이었다고 자부해도 과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지하수맥과 실개천들이 용트림해 솟아오르는 사건들이 최근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시대의 변화 때문일까? 평신도들로만 구성된 일만 이천 명이 넘어서는 시국선언과 선물로만 앙망하던 ‘추기경’에 대한 청원운동이 그 흐름이다. 그동안 평신도 운동을 ‘조직’해보려는 수많은 시도와 노력에도 도달하지 못했던 새로운 지평을 선물처럼 부여받았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처럼 말이다. 서명운동의 첫 제안자들은 반신반의였다. ‘만 명. 그 정도는 채울 수 있을 거야. 아니, 과연 될까?’ 이런 회의 속에서 일만 명을 훌쩍 넘어버렸고, 추기경 청원이라는 전대미문의 행위에도 수천의 평신도들이 기꺼이 동참해주는 사건을 만들었다. 좀 허세를 부리자면 2013년 하반기와 2014년 첫 달은 한국천주교회사에 길이 남을 사건을 ‘평신도’라는 이름으로 만들었다고 자부하고 싶다. 기꺼이 서명에 참여해주시고, 소중한 후원금을 보내주신 한 분 한 분 모두가 이 역사책에 한 점을 같이 찍어주신 분들이다. 고맙고 소중한 마음에 가슴이 그득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용트림이 하나의 물줄기로, 큰 강물로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직면해 버렸다.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추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 그리고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를 실천하는 길. 이 두 길에 ‘평신도’라는 이름으로 함께 동참해 ‘운동’을 펼쳐나갈 수 있을 것인지가 우리의 과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기획’했으나 의도를 넘어서 일이 전개되었고, ‘노력’했으나 그 노력의 결과보다 넘치는 성과가 주어졌기에 섣불리 ‘조직’한다는 말을 꺼내기 힘겨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힘겹더라도 이 소중한 선물을 잘 활용하지 못한다면 더 큰 과오를 남길 것이기에 더 낮은 자세와 열린 마음으로 포장지를 정성껏 풀어내야만 한다.

포장지를 푸는 첫 손길은 아마도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부터일 것 같다. 왜 수천, 수만의 평신도들이 이 일에 참여했을까? 이 질문의 가장 단순한 답변은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라는 열망의 표출이 아닐까. 세속의 어둠을 비추는 빛의 역할과 스스로 썩지 않는 소금의 정체성이 절실하기에 전혀 다른 두 사안에 ‘평신도’라는 이름으로 적극적인 참여를 표명했을 것이다. 이런 답변이 옳다면 새로운 평신도 운동의 흐름은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도록 행동하는 것이고, 또 그 교회가 소금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단련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모양새는 복음의 기쁨을 함께 누리고자하는 신앙인들의 연대이어야 할 것이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평신도들에게 ‘조직’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려하기보다는 마음을 나눌 끈을 이어가는 형식으로 함께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직접적인 참여도 가능할 뿐더러 다른 이들을 기쁘게 초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손길은 ‘무엇을 할 것인가?’하는 질문이다. 세상의 빛이 되도록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어떻게 소금으로 단련될 것인가? 하나의 질문에 내포되어 있는 다양한 질문과 답이 이어질 수 있겠지만 이 질문들의 답은 그냥 내려놔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질문에 답을 낼 능력이 없기도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무엇을 할 것인가’는 이 길에 함께 모인 모든 이들 속에서 창발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시국상황에 맞는 기도회와 미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그 역할 속에서 연대의 힘을 얻어가고, 지식과 지혜를 나누는 자리에서 내적 성숙을 이룰 것이다. 공동의 전례를 통해 함께함을 찾을 수만 있다면 새로운 형식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소수의 활동가들은 이런 흐름이 막히지 않도록 협력하고 헌신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평신도 운동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교회와 한국 사회의 젖줄로서 구석구석 흐름을 이어가고 있었다. 억지로 그 흐름을 하나로 이으려하기보다는 그 흐름이 막히지 않도록, 혹은 혼자 동떨어져 있는 외톨이가 되지 않도록 서로의 끈을 이어가고 그 끈을 확인하는 노력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아마도 그 길이 ‘새로운 평신도 운동’이 되지 않을까? 시작은 선물처럼 주어졌지만 말이다.

이은석

한 때 우리신학연구소에서 일했었고 이후 종교시민운동단체에서 활동하다, 문화‧공연기획이라는 일을 하면서 영상과 결합된 쿱미디어를 만들어 일하고 있다. 작년부터 정의평화민주 가톨릭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현재 사무일을 함께 챙기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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