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단짝_파트너십을 향한 여정 – 서로 다르지만 존중하는 것

글/사진 : 이희연

서로 다르지만, 존중하는 것

막달레나 공동체 문애현 수녀와 이옥정씨

인터뷰를 가기 위해 주소를 받아들고는 조금 어리둥절했다. 분명 수녀원이라 했는데, 장소가 평범한 아파트 집주소인 까닭이다. 도착하기 직전에 전화로 동호 수를 다시 확인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메리놀 수녀회’라고 쓰인 아파트 문이 열리고, 와글와글 밝게 웃는 소리가 귓가를 스쳐간다. 그 안에서 만난 막달레나 공동체의 공동 설립자 문애현 수녀와 이옥정씨는 수녀원만큼이나 예상을 정확히 빗나갔다. 조금은 딱딱하고 힘이 있는 말투를 예상했지만 도리어 수다스러운 동네 언니 같았던 이옥정씨, 사진에서 묻어나는 재치는 그대로였지만 신중하고 확신이 묻어나는 목소리의 문애현 수녀가 이야기하는 파트너십에 대해 들어보자.

막달레나 공동체는 성매매 여성들과 행복과 삶의 권리를 존중하기 위해 서로 나누며 살아가려고 생겨난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문애현 수녀와 이옥정씨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아시아 오세아니아 수녀연합회의 회의가 있던 1984년, 가난한 여성들의 현장을 보기 위해 방문한 문 수녀는 당시 용산에서 홀로 상담을 하고 있던 이 씨를 만나게 된다. 문 수녀는 처음 만났을 때 용산에 있는 여성들이 함께 식사하고, 자기 생활을 열어놓고 나누는 것에 놀라웠다고 한다. 여성들이 이렇게 고생하는지도 몰랐다는 것에 돌아와서도 내내 마음이 아팠다는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흥미로운 점은 이때만 해도 서로 파트너로 일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옥정씨는 함께 현장방문을 나왔던 한국 수녀님들이 함께 일해주기를 내심 기대했었고, 문애현 수녀도 한국 수녀님이 이런 일에는 더 낫지 않을까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여러 직분을 맡고 있던 한국 수녀님들이 아닌 문 수녀가 먼저 이 씨에게 연락을 하게 되었다. 그 해에 문애현 수녀가 휴가 중이었던 것은 하느님의 섭리였을까? 파트너는 이렇듯 예상 밖의 곳에서 찾아오기도 한다.

“휴가 하고 나서 5월에 한국에 오니 내가 하면 어떻겠냐는 수녀님의 전화를 받았는데, 처음엔 황당했죠. 언어도 안 통할 것 같고, 음식도 걱정이고, 문화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당시엔 내 안에서도 이런 현장을 외국 사람에게까지는 보여주기 싫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조금 거부감이 있었죠.” (이옥정)

이옥정씨만이 아니라 문애현 수녀도 걱정스러운 마음이었던 건 마찬가지였다. 처음 만났을 때 매운 것을 가리지 않는 문 수녀를 보고, 별 걱정 없이 이 씨가 대접한 음식은 아귀탕이었다. 이 씨가 먹는 것처럼 와사비를 찍어 먹은 문 수녀는 매워서 코에서 바람이 나오는 것 같았지만, 이런 음식도 먹어야 받아주겠다는 테스트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거 못 드신다고 안 받아주기야 했겠어요.” 에피소드처럼 웃으며 털어놓는 솔직한 말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웠던 것은 문수녀의 반응이었다. “알아.”라는 짧은 대답. 긴 시간동안 갈등도 있었고 서로 달라서 어렵기도 했다지만 그 시간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더 궁금해졌다.

실제로 본격적인 테스트는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겪는 갈등이었다. 문화적 차이도 있었고, 거기서 오는 표현의 차이도 있었다. 어떻게 극복했느냐는 질문에 좀 더 지혜로운 답변이 돌아왔다. 지난 시간 상처를 안 받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상처를 같이 치유하면서 계속 함께 할 것이냐 아니면 거기서 헤어지느냐의 문제라고. 당시에는 솔직하게 한 사람이 아쉬웠다고 한다. 그리고 수녀가 함께 한다는 자체가 힘이 되었다고 이 씨는 전했다. 수녀가 함께 하는 것이 교회가 함께 해주는 것으로 느껴졌다는 것이다.

어려움은 두 사람 사이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공동체의 중심을 잡고 있는 두 사람이 소통에서 어려움을 느꼈던 만큼 공동체와 문애현 수녀 사이에도 소통의 어려움이 있었다. 수녀이자 선교사로서 섬기러 왔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용산 여성들이 쥐어주는 음료수나 음식 대접을 마다했던 문 수녀의 모습에 도리어 용산 여성들이 서운해 했던 것이다. 그 사이를 중재하는 것은 이옥정씨의 몫이었다. 그냥 주는 대로 받으시라고 넌지시 일러주기도 하고, 문 수녀의 생일이면 속옷이 떨어졌다며 용산 여성들이 부담스럽지 않게 선물을 가져올 수 있도록 사전 작업을 하기도 했다.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있었다. 어른이신 문애현 수녀가 오면 쉬다가도 일어나 식사를 차려주려는 공동체 식구들에게 미안했던 문 수녀는 알아서 찾아먹겠다며 냉장고를 열어 비닐봉투에 든 고기를 끓여 식사를 했다. 그런데 나중에 냉장고를 열어 본 식구들이 그 비닐봉투가 사라진 것을 보고, 당시 키우던 강아지 밥이 사라졌다며 어디 갔는지 찾기 시작했단다. 설마 그걸 사람이 먹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문 수녀의 “제가 하겠어요. 할 수 있어요.”라는 말은 미안하니 그냥 쉬라는 부드러운 마음에서 나온 말이었을 텐데, 이렇게 사건은 엉뚱한 곳으로 흐르곤 했다.

하지만 갈등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힘은 분명 문애현 수녀의 배우려는 자세에 있었다. 이옥정씨는 문 수녀와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많이 설명했다고 한다. 당시 용산에는 제사 지내고 굿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왜 여성들이 술도 못 따르고 절도 못하는지 그리고 여성들이 얼마나 주류에서 배제되어 왔는지 설명하는데 드라마가 좋은 교재였다고 한다. 문 수녀는 여성들의 가정 이야기를 더 이해하려 애쓰고, 설명하는 대로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런 시간들이 몇 년 쌓이니, 금방 마음이 맞더라는 이야기를 하며 환히 웃는 두 사람의 웃음은 언제 서로 다르다고 이야기했던가 싶을 정도였다. 문애현 수녀는 “놀기 좋아하는 유형이라는 면에선 비슷해요.”라면서 정말 하느님이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10년, 20년 일한 것도 아닌데 몇 년 만에 마음이 맞는 게 신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서로 잘할 수 있는 역할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병원에 사람을 데려가거나 대외적인 부분은 주로 문 수녀가 직접 용산 여성들을 만나는 일은 주로 이 씨가 맡았다.

“이게 갑을관계잖아요. 제가 갑이고 을이에요. 수녀님 쪽에서 보면 제 쪽에서 보면 반대고. 수녀님 내가 삐져서 못한다고 가면 당신이 어떻게 할 거야. 아쉬움도 있겠죠. 저도 역시 이렇게 하다가 수녀님이 못하겠다고 가버리면 나 어떡해. 내가 부족한 거를 많이 보완을 해주시는 부분이 있고, 수녀님이 부족한 걸 내가 채워주는 것도 있고. 그러니까 100이면 100이 꽉 채워지는 거예요. 그거를 많이 느꼈어요. 그걸 느끼고 나서는 서로 떨어져 있어도, 수녀님이 지금 계시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겠다거나 수녀님이 이걸 하실 것 같다는 부분을 생각해봐요. 그래서 내가 먼저 결정을 짓고 수녀님께 말씀드리면 그렇게 하자고 수용을 해주시고.” (이옥정)

몇 시간 동안의 인터뷰로 두 파트너가 어떻게 호흡을 맞춰왔는지, 20년도 넘는 그 시간들을 다 이해하기란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했던 까닭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문제가 아니라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으로 바라보는데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두 파트너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긴 에피소드에는 마냥 웃고 솔직하게 툭툭 나오는 이야기에선 서로에 대한 신뢰에 감탄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파트너십을 이루고 싶은 이들에게 들려줄 조언 한 마디를 청하자, 짧고도 단순한 답이 돌아왔다. “서로 다르지만, 존중하는 것.”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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