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사회운동 다시 보기 – 응답하라! 1984 한국 천주교회!!

경동현(우리신학연구소 소장)

응답하라! 1984 한국 천주교회!!

– 1984년 가톨릭대학생회 성명서, 반복되는 역사와 평신도 운동

1984년 3월 10일 ‘대한가톨릭학생 전국협의회’이름으로 발표된 <부활과 하느님나라 건설을 위한 공동체적 결단을 위하여>라는 성명서 내용을 정확히 30년이 지난 지금 읽어보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걸 절감하게 된다.

1984년이 어떤 해인가! 한국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의 해, 103위 순교자 시성식과 교황의 첫 한국 방문이 있던 해다. 14개 모든 교구의 대학생연합회가 연명한 성명서에서 청년 평신도들은 네 개의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은 교회를 향한 질문인 동시에 학생들 스스로의 반성과 쇄신, 갱생을 촉구하는 질문이다.

신앙을 증거했는가?

첫 번째 질문. “한국 천주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따라 신앙을 증거해왔는가?” 일본 식민지 시절 빼앗긴 주권 회복을 위한 노력은 고사하고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워 민족의 아픔을 외면한 채 침묵을 지켰던 한국교회, 남북 분단의 상황에서 친미․반공의 면모를 보이면서 막대한 구호물자를 활용해 자신의 양적 팽창에 몰두했던 한국교회 때문에 제3공화국 이후 사회정의를 외치는 교회 일각의 목소리가 공허해졌다고 성명서는 꼬집고 있다. 30년의 간극을 둔 오늘은 어떤가? 시대의 표징을 따르는 평신도들의 사회참여는 과거에 비해 몰락에 가까울 정도로 침체된 반면, 사제 수도자들의 참여가 활발해진 점이 대조를 보인다.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지만 오히려 좌우의 대립은 갈등의 골이 훨씬 깊어졌다. 가령 4대강 사업에 대해 2010년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를 마치며 발표한 성명서는 처음으로 4대강 사업에 대해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하지만 그 해 12월 8일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주교단의 성명서의 입장을 뒤집는 발언으로 찬반 논란을 일으켰다. 지난해 11월 24일 신앙의 해 폐막미사 강론에서 가톨릭교회교리서를 근거로 사제의 정치개입을 비판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의 발언도 12월 11일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발언한 교회의 입장과는 반대의 목소리여서 논란이 됐다.

시대의 징표는 무엇인가?

두 번째 질문. “이 시대의 징표는 무엇인가?” 10.26 이후 국민의 민주화의 열망과 광주 민중봉기를 폭력으로 진압한 전두환 정권은 통폐합된 관제 언론을 이용하여 온갖 왜곡선전과 조작으로 자기 합리화를 꾀하고 있었다. 지금은 기억에서 잊힌 장영자․삼보증권․영동개발․명성․광명사건 등의 권력형 비리로 인한 위화감 조성, 인간 존엄성과 생존권을 요구하던 원풍모방․태창메리야스 등의 민주노조 탄압, 양심적으로 진실을 외치는 학생들을 과격분자로 몰아 강제징집 혹은 빈번한 의문사로 내모는 현실, 외래문화의 무절제한 수용으로 인한 소비주의 퇴폐주의의 만연 등을 성명서는 지적하고 있다. 다시 오늘의 현실로 돌아와 보면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일 년간 국민들은 독선과 불통으로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체험을 했다.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이라는 권력형 비리는 여전하고, 쌍용차․철도노동자․밀양 주민에 대한 탄압에서 방식에 차이만 있을 뿐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소비주의는 30년 전보다 훨씬 강화돼 교회 안에도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식별하기 위한 신앙 감각을 회복하는 일이 절실한 상황이다.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나?

세 번째 질문. “한국교회는 시대의 징표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성명서는 창설 200주년을 계기로 한국교회는 초대교회 창설자들의 신앙 열정과 자발성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주교․사제․평신도가 형제적 사랑으로 서로 돕고, 200주년 기념사업 및 행사에서 교회가 제도적으로 평신도의 적극적 참여와 자발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교회 창설 200주년은 순교를 현대적 의미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며 순교선열들이 죽음으로 복음을 증거했듯이 사회정의를 외치다 희생된 시민들과 동료 학생들이 바로 오늘의 순교자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아직 한국교회의 현실은 이에 훨씬 못 미치고 있음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 현실 역시 30년간 큰 변화가 없다. 시대의 징표를 따라 사회문제에 참여했던 수많은 평신도들이 교회를 떠난 원인은 교회가 평신도를 대하는데 있어 동반자가 아니라 협력자나 동원대상 정도로 대하는 변함없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면에서 1984년은 가톨릭대학생회원들에게 끔찍한 해로 기억된다. 1980년부터 1982년 초까지 전국협의회 사무국 간사였던 김영근은 인터뷰에서 당시의 기억을 이렇게 전한다.

“가톨릭대학생회가 전국단체문제로 시끄러워진 것도 그해다. 그해 초 가생 전국협의회 지도주교님이셨던 황민성 주교님께서 선종하셨다. 이어 새로 임명된 경갑룡 주교님은 전국협의회 해체를 선언했다. 84년 가생은 두 개의 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나는 반정부투쟁, 또 하나는 주교회의였다. 72년 주교회의에 대한 가생의 항명사태가 다시금 재연된 것이다.”

주교․사제․평신도의 형제적 사랑과 협력을 주장한 성명서 내용은 주교의 일방적 결정으로 전국 조직의 운명이 엇갈렸던 청년 신앙인들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주장인 것이다.

교황 한국 방문의 의미는?

네 번째 질문. “교황성하 한국 방문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성명서에선 교황 방한이 위에서 언급한 현실과 관계없이 화려한 겉치레 행사나 군중집회로 그칠 때, 이 땅에 그리스도의 증거와 화해 나눔의 정신을 실현하자는 200주년의 외침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또한 정부의 초대 형식으로 이뤄진 교황 방문이 입지가 불안한 정권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에 대해 큰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우려와 달리 당시 가톨릭학생회원들은 모처럼 명륜동 가톨릭학생회관에서 장충체육관까지 시위를 하면서 교황이 참여하는 행사장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는 가톨릭과 전두환 정권 사이에 생겨난 묘한 정치적 긴장의 공백 탓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교황 방한으로 천주교의 국내외 지위가 고양된 것과 달리 교회 내 가톨릭학생회의 위상은 전국조직의 해체로 인해 크게 낮아지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30년이 지난 올해,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소식이 여러 언론을 통해 이야기되고 있다. 불법 선거개입으로 현 정권의 입지가 불안하기는 30년 전과 별 차이가 없는 상황이긴 하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이 성사된다면 30년 전의 방한과는 의미가 조금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을 보호하고 모든 사람, 특히 가장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고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것, 이것이 로마의 주교에게 요청된 봉사”라며 즉위미사에서 행한 교황의 강론이 교회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과 행보가 정체된 교회에 큰 활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벤트처럼 보이는 한 번의 방문으로 30년 넘게 반복되는 문제들의 근본적 해결책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천주교 역사에 유래 없는 평신도들의 추기경 청원 서명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등장 말고 다른 이유로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올해 교황의 방한에 큰 기대를 걸어본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2월호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