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인물 열전 – 시인과 대통령, 그리고 민주주의 – 영원 속의 오늘을 시로 노래한 시인, 구상 <2>

한상봉

구상 시인만큼 ‘영성의 세계’를 탐하는 종교적 시인이면서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 때문에 구설수에 오른 시인도 많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구상은 박정희와 오랜 친분을 맺어온 사이였으나 유신정권과는 분명한 선을 그어 왔다. 궁지에 몰린 문학인들을 위한 일이 아니라면, 당시 최고 권력자와의 친분을 이용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박정희와 인간적교분을 나누었던 시인

구상은 1949년 육군 정보국에서 일할 때 정보국장인 이용문 장군을 통해 대구에서 박정희를 처음 대면했다. 당시 박정희는 34세, 구상은 32세였다. 한국전쟁 당시 구상은 『승리일보』 주간으로 종군작가단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작전차장이던 박정희 대령과 만나 자주 술을 마셨다. 이를 두고 구상은 “의기투합했지. 말이 통했어.”라고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모의할 때에도 구상은 박정희와 비슷한 정국진단을 하고 있었다. 구상은 ‘4.19 Ⅳ’라는 시에서 “40일 만에 돌아온 서울은 그야말로 북새판이었다. 4.19의 젊은이들은 몽둥이를 들고 의정단상을 점령하는가 하면 맨손 맨발로 휴전선을 넘어 북한마저 해방한다고 아우성을 쳤다.”며 혼란스러운 정국을 탄식했고, 내심 쿠데타를 긍정적으로 본 것 같다. 당시 구상은 “박정희는 이미 눈에 핏발이 서려 있었다.”고 썼는데, 박정희는 거사를 앞두고 “말채찍 소리도 고요히 밤을 타서 강을 건너니 새벽에 대장기를 에워싼 병사 떼들을 보네.” 라는 한시를 입에 올리곤 했다.

마침내 박정희가 그 노래 가사처럼 1961년 5월 16일 한강을 건너 쿠데타를 감행했고, 거사 직후인 5월 19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장갑차가 포진한 국제호텔에서 구상을 만나 상임고문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구상은 정치에 직접 뛰어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구상은 이날 박정희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인이란 현실에서 보면 망종(亡種)이지요. 그래서 플라톤도 그의 이상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하는 게 아닙니까!” 구상은 자신을 “남산골 샌님으로 남겨 달라.”는 말을 남기고 경향신문사 동경지국장을 맡아 서둘러 일본으로 피신했다. 박정희 집권기간 동안 구상은 거의 국내에 머물지 않았다. 1960년대에는 동경에 머물고, 1970년대에는 하와이 대학 극동어문학과 교수로 취직해서 5년 넘게 있었다.

그렇다면 구상은 박정희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구상은 박정희를 ‘박첨지’라 부를 만큼 각별한 사이였다. 구상은 박정희를 ‘의협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고, 군인이지만 해박한 지식을 소유했던 박정희를 구상은 ‘인간적으로’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구상의 딸 구자명은 “박정희의 정치를 좋아한 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세례자 요한의 예지와 진노를 빌려서 우짖는 예언자

공교롭게도 구상이 세 번째 필화 사건을 경험한 것은 박정희 정권 초기였다. 1965년 구상은 『수치』라는 희곡을 써서 당시 유치진이 만든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할 예정이었는데, 그 희곡이 이적 혐의에 걸려 공연은 취소되고 구상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어느 지리산 빨치산 여대원의 이야기를 담은 이 희곡은 산속에서 짐승같이 살면서 능욕을 당하던 여대원 한 명이 ‘정말 인간다운 삶이 어떤 것인지 보고 죽겠다.’는 생각으로 귀순하지만, 거기서도 경찰의 비열한 유혹과 가혹행위를 당하다가 자살한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이 경찰의 품위를 훼손하고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1970년대에 구상은 주로 종교적인 시 작업에 몰두했다. 성바오로출판사에서 『구상문학선』가 출판되고, 이어 『그리스도 폴의 강』, 『나자렛 예수』가 연이어 출간되었다. 당시 구상은 출판사의 요청으로 여러 차례 문학강연회를 하러 다녔는데, 그 와중에 유신정권의 문제를 드러내기도 해서 기관원들이 늘 따라다녔다고 한다. 1979년 10.26 사태가 일어나기 한 달 전에는 박정희를 직접 찾아가 “임자, 그만 내려놓을 때가 되지 않았어.” 라며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을 간곡히 종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박정희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되자 5년 동안 성당에 연미사를 넣을 만큼 인연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구상은 당시 심경을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 세상이 다 죽일 놈으로 모는 악당일지라도 친구는 친구니까 5년 동안 내가 제례미사를 드렸다.”고 표현했다.

박정희와 맺은 이런 관계 때문에 구상의 삶은 쉽게 폄하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구상은 권력과 재산을 탐하며 호가호위(狐假虎威)하지 않았다. 구상은 서울 여의도의 허름한 17평 아파트에서 30년을 살다 이승을 하직했다. 전두환이 광주학살을 통해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을 때, ‘민정당 10인 발기위원회’에 참여해 달라는 부탁이 있었지만 이것도 거절했다. 그 후로도 민정당 총재 고문, 전국구 의원 등의 제의가 있었지만 모두 마다했다. 물론 혹자는 구상이 유신 정권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하기도 한다. 이 점에서 구상은 ‘마음을 접고’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적극적으로 지역차별을 조장하며 권력을 누렸던 같은 영남 출신의 이효상과 대조된다.

한편 그는 문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힘닿는 선에서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을 도왔다. 일제 식민지 하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던 박정희를 줄곧 비판해왔던 민족문제연구소의 임헌영조차도 구상을 “구도자의 미학을 실현한 시인”으로 높이 평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74년 1월 7일 소설가 이호철이 ‘문학인 61인 선언’을 통해 개헌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에 앞장서자고 선언하고, 이튿날 긴급조치 1호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며칠 뒤 이호철과 정을병 두 소설가와 김우종, 임헌영, 장백일 세 평론가가 이번에는 ‘남산’이 아닌 악명 높은 서빙고의 국군보안사령부 대공분실로 연행돼 갔다. 이른바 이들이 ‘문인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것인데, 예상치 못했던 구상 시인이 법정에 나가 그들의 무죄를 주장하는 바람에 항소심에서 정을병은 무죄, 다른 네 사람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구상이 박정희와 친분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구상은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권력과 재산을 얻을 만한 조건이었지만 유신정권 내내 시만 붙들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불우한 예술가였던 이중섭 등과 교류하며, 문단의 지킴이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한때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정치에 입신하려던 적도 있었지만, 한 번 마음을 돌린 후에는 시인으로 남아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다. 1970년대에 새긴 ‘까마귀’라는 시에서 그가 오히려 시인을 예언의 자리로 돌리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직접 정치에 투신해 세상을 바꾸는 혁명가이기보다 “눈 뒤집힌 세상살이를 굽어보며 / 저 요르단 강변 세례자 요한의 그 예지와 진노를 빌려서 우짖는” 예언자가 되기로 작심했다. 그래서 자신의 소임을 “불길을 몰아오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불의가 빚어내는 재앙을 미리 알리고 일깨워 줄 따름”이라고 말한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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