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교회는 지금 – 화제의 인물 프란치스코 교황

민경석

작년 3월 13일에 266대 교황으로 당선 된 이후 일 년도 채 되기 전에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전 세계적인 관심과 화제의 대상이 된 교황도 드물다 하겠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취임 첫해에 몇 백 년만의 최초의 비이태리 출신 교황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만큼의 주목은 받지 못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런 면에서 여러 가지의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하겠다. 그는 천 이백 년 만에 처음으로 탄생한 비유럽인 교황이요, 최초의 남미출신 교황이며 또 최초의 예수회 출신 교황이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 이면에는 여러 면에서 최초라는 역사적 이유 이외에 더 실질적인 이유가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교황에 당선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행한 많은 연설, 인터뷰, 『신앙의 빛』이라는 회칙, 『복음의 기쁨』이라는 사도적 권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박한 개인적 삶과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다가가는 사목자로서의 모습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의 행동과 언어에서 전임 교황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권위와 품위에 매이지 않는 겸허함, 가식 없는 진정성, 복음적 청빈, 양들에게 가까이 가려는 참된 목자의 사랑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교회 안과 밖의 모든 이들이 교황에게서 보고 싶어 했지만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 아니 나자렛 예수의 모습을 그의 삶과 행동과 언어 속에서 발견하였고, 그는 이런 많은 이들의 열망과 기대를 채워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은 전임 교황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전임 교황들도 그 시대에 나름대로 많은 이들의 기대를 충족시켰음을 기억해야 하겠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수백만명의 열정과 기대를 생각해 보라. 또는 바오로 6세 교황이 최초로 유엔에서 연설하고 최초로 인도를 방문했을 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열광하고 환호했던가? 최근의 교황들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독특한 카리스마를 갖고 당대의 시대적 염원에 봉사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시대 교황직의 새로운 모형을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많은 이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신선한 모습에 열광하는 것 못지않게 그에 대한 반응이 꽤 다양하다. 미국의 예를 들어 보자. 교황이 시장만능의 자본주의가 빈곤과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주장한데 대해, 미국 극우익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러쉬 림보가 그의 발언을 ‘순수한 마르크스주의’라고 비판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이미 1961년 요한 23세가 『어머니와 교사』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한 것을 놓고 보수주의 신자 윌리엄 버클리가 그가 편집하는 National Review의 표지에 “mater si, magistra non.”이라고 한 것과 비슷하다. 보수적 Fox 방송은 교황의 주장을 신사회주의라고 공격하면서 교황을 가톨릭교회의 오바마라고 불렀다.

그러나 극단적인 몇몇 보수주의자들의 비판을 제외하고는 교황을 마르크스주의자니 사회주의자니 하고 비방하는 것은 전보다 많이 줄어든 것 같다. 최근에 와서 빈부격차 문제가 가 현실적 문제로 크게 대두되고 있으니 문제제기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 대신에 보수주의자들의 교황비판은 방법을 달리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신학적으로 옹호하기로 이름난 마이클 노백은 National Review에서 교황의 자본주의 비판은 아르헨티나 같은 아직도 전근대적인 나라의 경제체제에는 맞지만 미국적 시장경제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용하려면 법체제가 갖춰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많은 부정적인 면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법체제만 제대로 선다면 자본주의가 부를 창조하고 빈곤을 퇴치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Vatican Insider와의 인터뷰에서 노백은 교황의 표현방식을 탓하면서 예를 들어 인공유산이나 동성애에 관한 교회의 관심을 ‘집착’이라고 한다면 가뜩이나 수세에 몰려 실망하는 신자들을 더욱 실망케 하고 교회 비판세력들에게 더욱 용기를 주며 교회 내의 자유주의자들에게는 교리의 변경까지도 요구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라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First Things에서 저넷 스미스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은 맥락이다. 그는 ‘집착’이라는 표현은 인공유산 반대를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른 신자들을 모독하는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주장하고, 또 선교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통한 죄로부터의 구원과 사랑을 강조하라는 교황의 권고는 옳지만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고 따라서 구원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는 현대 미국인들에게 그런 권고는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지 반문하고 있다.

노백의 전형적 교황비판과는 달리 복음주의적 가톨리시즘을 주장하는 신학자 조지 와이글은 Wall Street Journal에 기고한 글에서 교황의 자본주의 비판은 크게 중요한 것으로 보지 않고 주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서 오는 치유와 기쁨을 통해 교회가 그 근원인 복음의 정신에로 복귀하여 제도유지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복음화의 힘이 되도록 교회의 자기이해를 새롭게 하려는 혁명가로 묘사하고 있다. 보수주의적 정치평론지 Commentary도 교황이 된 지 6개월도 안 된 교황이 교회의 교리를 변경하지는 않았지만 말과 행동을 통해 교리의 강조점과 톤을 바꿔놓았다고 지적하였다.

그런가 하면 가톨릭 보수 평론지 First Things는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신자들도 교회 교도권에 귀를 기울여 자본주의의 취약한 점, 특히 자본주의가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를 소홀히 한 것을 반성하는 기회로 삼아야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놀랍게도 문화적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The American Conservative는 우익과 좌익 모두를 비판하면서 교황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교황이 성윤리, 동성애, 유산반대 등 소위 ‘신앙과 윤리’에만 스스로를 국한하지 않고 교회의 전문분야도 아닌 경제문제를 취급하면서 자본주의 비판이라는 금기를 깨고 특히 좌파들의 지지를 받게 되니, 우익들은 다급해진 나머지 교황을 마르크스주의자라 주장하지만 실제로 저들은 교회의 오래된 사회교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가톨리시즘을 단순한 개인윤리의 체계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반면에 좌파들은 교황의 자본주의 비판에 편승하여 마치 교황이 과거와의 ‘단절’이라도 한 듯 야단이지만 실제로 교황의 자본주의 비판이 전임교황들의 사회교리와의 연속선상에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보를 표방하는 The New York Times, The Washington Post, Los Angeles Times, The Huffington Post, 가톨릭의 The National Catholic Reporter의 논지는 교황의 자본주의 비판이나 교회 개혁에 대한 열정을 대단히 열광적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The Washington Post의 칼럼니스트인 제이 다이언의 교황 프란치스코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에 대한 논평이 대표적이다. 그리스도교가 역사적으로 볼 때 자주 권력자들의 기성체제를 옹호했지만,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체제 전복적이며, 남미에서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면을 깊이 경험했던 교황 프란치스코가 바로 기성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그에 도전하는 그리스도적 소명을 회복하려 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는 지금 놀라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오랫동안 부자들을 위한 감세를 주장해온 보수주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큰 윤리적 도전인 동시에, 세속적 좌파들에게도 하나의 도전을 던져주고 있다. 교황의 소비주의적 자본주의 비판은 불과 몇 년 전에 세계적 위기를 겪은 현 시대에 대단히 시의적절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교황은 비관론에 빠지지 않고 긍정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교황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면서도 자유주의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보수주의자들을 그를 따르려는 세력과 그를 위험한 적으로 간주하는 세력으로 분열시켜 놓고 있다. 그는 부정한 경제체제를 비판한 최초의 교황은 아니다. 이는 전임 교황들이 이미 해온 바이다. 그가 다른 점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경제적 부정의에 대한 비판이 사명감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그의 힘의 원천이며 이는 좌우 모두에게 도전이 되고 있다.

재미있는 일은 오바마 대통령도 지난 12월의 연설에서 불평등에 관한 교황의 비판을 인용하였다는 점이다. 그 동안 교회 안에서 좌파로 몰렸던 진보적 가톨릭 정치인들도 진보적으로 보이는 교황을 만나 천군만마를 얻은 듯이 기뻐하고 있으며, 국회의사당에서도 교황의 발언은 크게 화제가 되고 있다.

전 세계적 인기와 관심의 대상이 된 교황을 자기편이라 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세계는 교황을 이용하려는 ‘교황 정치학’이 한창이다. 그럴수록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교황의 가르침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가톨릭의 문제점은 여러 문제에 관한 교황의 가르침은 많아도, 또 교황의 교도권을 절대적으로 존경하면서도, 신자들은 실제로 교황이 무슨 가르침을 주고 있는지는 대단히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신문보도를 통해서만 접하고 있고 본당 차원에서 교황의 가르침에 대한 설명은 거의 전무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황의 가르침은 교회 내에서도 곡해되고 무시될 가능성을 항상 지니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을 놓고 그 가르침이 얼마나 새로운 것인가, 전통을 부정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여론의 관심은 대단하다. 보수주의자들은 전통과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고 진보주의자들은 전통과의 단절을 강조하고 있다. 교회에 비판적인 세속지 The New Republic은 교황이 새로운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 여성문제, 인공유산에 관한 그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보면 그에게서 크게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보수주의적 The Weekly Standard지는 신문기자들이 신학적 문맹자들이라 교황이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무슨 말을 하지 않았는지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탓하면서 교회는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가르침 자체만 놓고 보면 그렇게 새롭지는 않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지적한 대로 20세기 교회의 전통적 사회교리를 다시 새롭게 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톨릭의 속성상 과거와의 교리상의 단절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교리상의 단절은 없어도 그 강조점과 음조와 다를 수 있고 또 교황의 삶과 실천을 통해 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게 할 수 있으며 역대 위대한 교황들은 바로 이런 일을 한 분들이라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또 다른 점은 교회의 모든 전통적 가르침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모든 교리의 중심인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육화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그의 우선적인 사랑과 관련하여 여러 교리의 중요성을 재정비하고 여러 교리의 위계성을 다시 강조하면서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모범적 삶을 그의 삶과 실천 속에 구체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112쪽의 장문이긴 하지만, 그의 소박한 삶과 사목적인 관계, 교황청 개혁에 대한 그의 구상 등을 염두에 두고 그의 사도적 권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묵상하면서 한 번 읽어 보시기를 모든 신자들과 교황 연구가들에게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그렇게 읽으면 독자들은 마음의 뭉클함을 느끼면서 성령의 뜨거운 열정이 솟아옴을 경험할 것이다. 교회적 전통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 현대 인류의 가장 큰 고민에 동참하려는 교황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염원을 체험하면서 또 ‘새것과 옛것’을 종합하는 가톨릭의 신학적 경향을 배우게 될 것이다. 교회와 교황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이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을 훨씬 초월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화신인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은 보수도 진보도 아니다. 모든 시대를 통해서 그 사랑을 가난한 이들,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궁핍한 모든 인류에게 제도의 개혁과 개인적 삶의 개혁을 통하여 실천할 것을 요청할 뿐이다. 인기 있는 교황을 만난 가톨릭 신자들은 기뻐할 이유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교회 전체의 자기 개혁이라는 도전을 던져 주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민경석

남가주 클레어먼트대학원대학교 신학교수. 현재 세계화시대의 신학에 관한 조직신학적 고찰을 쓰고 있다. 해방신학, 탈근대주의 신학, 성 토마스아퀴나스의 삼위일체론에 관한 저서가 있고, 구미 학술지에 현대신학과 현대철학 여러 분야에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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