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복음 1 – 예언자의 운명

김근수

22일 주님봉헌축일 / 루카 2,22-40

이스라엘에서 첫아들은 하느님 소유로 여겨졌다. 아이 부모는 하느님께 첫아들을 사서 기른다는 뜻으로 출산 후 한 달 안에 스무 데나리온의 돈을 내야 했다. 부모가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 갈 필요는 없었고 어디서든 제관에게 돈을 치루면 되었다. 아들의 산모는 출산 후 40일간 불결한 몸으로 여겨졌다. 그 후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1년생 어린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를 바치면 산모는 다시 깨끗한 몸으로 여겨졌다. 가난한 산모는 비둘기 한 쌍만 바쳐도 되었다. 가난한 어머니 마리아는 그렇게 하였다. 예수님이 가난하게 탄생하셨다는 사실을 루카복음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에겐 어머니 같은 의무는 없었다.

그러나 어디 큰아들만 하느님 소유일까. 당시 사회관습도 우리 민족처럼 큰아들을 우선시하였다. 그런 관습을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자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우리 자녀들은 예수처럼 귀한 자녀다. 내 자녀만 예수처럼 귀한 존재가 아니다. 남의 자녀도,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의 자녀도 예수처럼 소중한 존재다. 하늘 아래 하느님께 소중하지 않은 존재란 없다. 결국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40절에서는 예수의 인성이 강조된다. 아기 예수는 슬기로 가득 찼다. 세상의 모든 지혜를 다 알았다는 뜻이 아니다. 몸의 성장과 지식의 성장은 인간의 특징에 속한다. 예수도 우리처럼, 우리 자녀들처럼 몸과 지혜가 자랐다. 예수와 우리는 같은 인간이다. 예수와 우리는 공통점이 많다. 예수의 신성을 인정한다 해도 예수의 인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잊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충분히 느껴야 한다. 한국 같은 선교지역 교회는 예수의 인성을 흔히 망각하고, 유럽 등 전통적인 교회는 예수의 신성을 외면하고 있다.

또한 복음에는 시메온과 한나라는 남녀 예언자가 등장한다. 인류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메시아 예수를 간절히 기다렸다는 사실을 루카복음 저자는 말하려는 것이다. 예수가 느닷없이 역사에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오래도록 예수를 기다렸다는 뜻이다. 복음서 저자는 유다인들에게 그런데도 왜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느냐고 항의하는 것이다.

예수의 예언자 운명이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고 두 예언자는 말한다. 예수는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신 분이지만 이스라엘에 갈등을 일으킨 분이기도 하다. 그 아픈 운명에 지금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참여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불의와 억압과 가난으로 가득하다. 그리스도교 신자로 사는 것이 언제나 평화를 가져다주진 않는다. 예수처럼 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교에 무엇을 바라는지 반성해 보자. 그 소망이 예수의 삶과 말씀이 주는 소망과 일치하는지 살펴보자.

우리 자녀가 시메온과 한나처럼 시대의 예언자로 산다고 상상해보자. 그런 운명을 우리는 부모로서 반가워할까. 그리스도교 신자로 산다는 것은 우리 삶이 언제나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예수를 믿는 덕분에 고통 받는 예언자로 살아야 할 운명도 있는 법이다. 잘못된 평화가 주는 안정감에 속지 말고 예수의 일생을 잘 살펴보자. 예수가 언제 호의호식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던가. 베드로나 바오로가 하루라도 호사를 누리며 살았던가. 시메온과 한나 앞에서 예수의 운명은 예언자로 예고되었다. 예언자는 이웃과 역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옳다. 우리 자신이 예언자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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