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Cool 사제 전별금 간소화, 어떻게 생각하세요? – 김홍한

 

한국 기독교 장로회 김홍한 목사

어느 날 나의 어머니께서 “우리 목사님은 언제쯤이면 베푸는 삶을 살까?”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그 후에도 여러 번 하십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기대하지 마십시오. 목사는 빌어먹는 사람입니다.”했습니다. 제 말이 어머니에게 상처가 된 모양입니다. 그 후에는 “말대로 되는데 그런 말을 했다”고 또 걱정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목사는 빌어먹는 사람입니다. 목사는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사람인데 예수님이 빌어먹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고는 일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예수님뿐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습니다. 일을 안 했다기 보다는 일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더 큰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호구지책은 어떻게 했을까? 누가복음 8장에 보면 주로 여자들이 자신들의 재산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뒤를 돌보아 드렸다고 했습니다.

석가도 마찬가지로 빌어먹었습니다. “탁발”이 빌어먹는 것입니다. 석가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신으로 사는 남자 승을 “비구”라 하고 혼자 사는 여자승을 “비구니”라 하는데 “비구”라는 말은 “거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마10:9-10)

위 본문 말씀을 나는 빌어먹으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하늘나라 복음을 입으로 전하기도 하지만 더 효과적인 것은 온 몸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온 몸으로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빌어먹는 것이 제일입니다. 프란체스코가 그렇게 했지요. 빌어먹는 자들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이끄는 천사들입니다.

옛날 우리나라의 걸인들은 걸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한 푼 적선(積善)합쇼!” 합니다. 내가 너에게 선을 쌓을 기회를 준다는 것입니다. 걸인이 천사이고 걸인이 전도자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빌어먹는 자들입니다. 제힘으로 먹고 산다는 사람은 죽일 놈입니다. 가장 정직한 직업이라는 농업, 하나님이 씨 주시고, 하나님이 물주시고 하나님이 햇빛 주셔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농부가 한일은 고작 잘 자라도록 돌본 것이고 상품성 높인 것 밖에 없습니다. 어부도 그렇습니다. 제가 기른 물고기가 아닙니다. 물에 있는 물고기 그냥 잡아온 것입니다. 광부는 그냥 땅 속에 있는 것 파온 것뿐입니다. 농부, 어부, 광부도 이러한데 하물며 다른 직업인들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우리 모두 제힘으로 먹고 사는 이 없으니 모두 빌어먹는 자입니다. 내가 빌어먹는 자라는 것을 알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먹고 산다 하는 것이 불신앙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맨날 얻어먹기만 하고 살겠습니까? 누구든지 또한 주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얻어먹기만 하셨나요? 석가께서 얻어먹기만 하셨나요? 그 분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을 세상에 주셨습니다. 세상에 그것보다 더 큰 베품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나도 자부심이 있습니다. 나도 많이 베푸는 삶을 삽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줍니다. “말씀”을 나름대로 소화하여 쉬운 말로 여러분에게 줍니다.

“목사는 빌어먹는자다.” 이 말을 목사인 나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신도들이 이 말을 하면 안 됩니다. 평신도들이 이 말을 하면 경멸조의 말이 되거든요.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는 확연히 달라집니다.

세상에 직업이 많지만 제일 헛갈리는 직업이 종교인입니다. 종교인이야 말로 존경과 비난과 조롱을 동시에 받고 있습니다. 본래 영양이 풍부한 음식일수록 부패하면 더욱 역하듯이,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듯이, 존경이 높을수록 그 멸시도 크듯이 종교는 그 역할이 거룩하여 영광도 크지만 욕됨도 큽니다.

조선시대 제일 소망이 없는 인생으로 매도된 이들이 ‘이판(수행승)’과 ‘사판(행정승)’이었습니다. “이판사판”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판이 되든 사판이 되든 중이 된다는 것은 막된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무질서하고 시끄러운것을 “야단법석”이라고 합니다.“야단법석”이란 사람이 많이 모여 법회자리를 법당에 차리지 못하고 들에 단을 쌓고 법회자리를 마련한다는 뜻인데 불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뜻을 변질시켰습니다. 형편이 이러하니 동네 똥개도 중은 마음 놓고 물어 뜯었습니다.

역시 조선시대 민중들의 비난을 제일 많이 받은 이들이 양반입니다. 조선시대 지배층인 양반,“양반”이라는 호칭이 어느덧 욕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다투다가 “이양반이~”하면 큰 모욕이라 생각하고“뭐! 양반!”하면서 달려듭니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종 문학작품들에서는 성직자들의 타락상이 무수히 등장하는데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더럽고 추잡하게 수록되어 있습니다. 서양세계가 기독교세계이니 기독교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 하겠지만 그만큼 비난과 조롱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많은 경우가 그렇듯이 영광과 욕됨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종교는 시대를 이끄는 정신이요 최고의 가르침으로 무한한 권위와 존경을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없는 멸시와 천대를 당합니다. 종교는 이렇게 멸시와 천대를 당하면서 다시 새로워 집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목사의 인기가 매우 높았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 비난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이제는 목사가 매우 인기 없는 직업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잘난 사람은 목사가 되면 안 됩니다. 똑똑한 사람도 목사가 되면 안 됩니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은 결코 섬기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틀림없이 걸맞는 대접을 받고자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목사들이 너무 잘났습니다. 너무 똑똑합니다. 진짜 잘나고 진짜 똑똑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나고 똑똑합니다. 그리고 너무 당당합니다. 그래서 모욕당할 줄을 모릅니다. 모욕을 견딜 줄도 몰라 작은 모욕에도 크게 당황합니다.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기독교성직자에 대한 모욕의 시대가 도래할 것인데 어찌 견디려나…….

나에게 원고를 부탁한 이가 천주교에서는 신부님이 인사이동을 하실때나 은퇴하실 때 전별금을 드리는 관행이 있는데 개신교는 어떠한지, 개신교 목사의 생각은 어떠한지에 대해서 물었는데 엉뚱한 이야기만 했습니다.

천주교나 개신교나 다 사람사는 사회인데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어떤 교회는 힘에 넘치게 마련하여 사례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어떤 교회는 할 수 있는데도 안하는 교회도 있고, 어떤 교회는 하고 싶어도 못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어떤 목사는 과도하게 요구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이는 있는 것 까지 내놓고 물러가는 이도 있습니다. 이것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보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제도화 한다는 것은 더욱 우습습니다. 주어진 형편에 따르는 것이고 그 교회 성도들과 성직자의 사랑의 분량이 결정할 것입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 201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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