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복음 2 – 세상을 짭짤하게

배안나

세상을 짭짤하게

29일 연중 제5주일 / 마태 5,13-16

언론들이 새 추기경님 서임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지난 대선과 비교하는 사람부터 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들까지 받아들이는 양상도 다양하다. 이렇게까지 한국 천주교회가 이슈화된 적이 있었나 싶다. 최근 교회 내에서도 잘 읽혀지지 않는 사회교리가 일간지에 나오고, 교황님께서 발표하시는 문헌의 번역본을 열렬히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가톨릭 신자인 것이 자랑스럽고 행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여서 이렇게 괴롭고 마음 아팠던 적도 없었다. 성역을 짓밟고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들을 거짓말로 만들어버리는 일들은 정말 참기 힘들었다. 현관문 앞에 배달된 신문을 집으러 나가는 것조차도 싫을 만큼 추웠던 어느 날, 길 한복판에 쪼그리고 앉아 기도하시는 신부님과 수녀님들, 성체와 십자가가 짓밟히고 의자에 앉힌 채로 경찰에 연행되는 신부님들의 모습, 아직도 감옥에 계시는 분들, 시국미사에 모인 성직자들과 신자들의 사진을 집에서만 지켜봐야 하는 것이 내내 불편했다. 주교님들이 발표하시는 담화문에까지 빨간딱지를 붙이는 언론과 세상이 너무 싫었다.

대학시절 은사님은 ‘사랑이 무엇이냐?’는 뜬금없는 질문에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이 사랑’이라고 진지하게 대답해주셨다. 신부님, 수녀님들이 계셔야 할 그 자리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우리는 어떤 사람인지 깊이 반성했다. 그리고 신문을 읽고 있으면 어느새 옆에 와서 “엄마, 왜 신부님이랑 수녀님이 길에서 기도하시는 거야?”하고 묻고, 변호인을 본 후 “북한에서 일어난 일이지?”라고 묻는 아이들에게 뭐라고 대답을 해줘야 할지 누가 좀 알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은 이런 내게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 말씀하신다. 심지어 나를 통해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하라는 어려운 미션! 솔직히 이 구절을 접할 때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나 이태석 신부님처럼 감춰도 감춰지지 않는 환한 빛 같은 분들이 떠올랐다. 어둡고 외로운 마음, 짠맛을 잃은 내 삶을 돌아보게 하는 훌륭한 분들을 일컫는 구절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미 환한 분들 뿐만 아니라 너도 환해질 거야. 너도 빛이야.’라고 알아듣게 된 일이 있었다.

우리 집 큰애는 대안학교에 다닌다. 나 역시 대한민국 학부모인지라 아이의 진로가 하나도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중학교 때 이미 고등과정까지 마치는 것이 흔한 일이 되어버린 요즘, 하루 종일 들로 산으로 뛰어노는 우리 애들을 보면 이래도 괜찮은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중등과정 친구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지고, 우리 아이들이 저렇게만 자라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중 해람이는 올해 중3이 되는 친구다. 작년에 중등 친구들은 에너지에 대한 학습의 일환으로 전기 없이 생활하는 선애빌이란 마을에 가서 지내며, 장작을 패고 가마솥에 밥을 지어 끼니를 해결했다. 설거지는 각자가 해야 하는데, 몇몇 사람들이 설거지를 안 해놔서 해람이는 짜증이 났다. 동시에 엄마의 말씀을 떠올렸단다. “세상에 널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모두 너의 스승이야. 그 사람들이 그런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네가 점점 더 성장할 수 있는 거란다.” 해람이는 이 말 덕에 쌓여있는 설거지도 기분 좋게 해버리고 엄마의 일상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밥을 한번 짓는데 이렇게 오래 걸리는데, 엄마는 어떻게 매일 밥을 뚝딱 만들어 내는 걸까? 엄마는 참 대단하다. 엄마는 좋은 스승인 것 같다.”

해람이도 엄마와 어찌 갈등이 없으랴. 하지만 널 힘들게 하는 사람이 스승이라 말하는 엄마, 그 엄마를 좋은 스승으로 삼는 중학생 아들이 2014년 대한민국에도 존재한다. 결국 이 아이들, 에너지 학습의 마침표를 밀양에서 찍었다. 아이들이 스스로 찾아서 배우고, 밀양까지 가야한다고 결정했던 과정을 지켜보면서 한편으론 기쁘고, 다른 한편으론 괴로웠다. 한쪽 눈을 감고 살면 밀양까지 안가도 되고, 할아버지 할머니들 고생하시는 앞에서 펑펑 울고 오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배움을 현재의 삶 안에서 풀어보려는 아이들 앞에서, 내가 신학을 배울 때 가장 흥분되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신학은 행동하지 않으면 의미 없는 배움이라는 말. 이 아이들 중에 성당 다니는 애들이 몇 명 있긴 하다. 허나 신자가 아니면 어떠랴. 세상을 짭짤하게 하고, 주변까지 밝혀주는 마음 환한 이 아이들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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