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조류 인플루엔자(AI)식탁 – 유정원

유정원

새도, 인간도, 그분도 운다.

현대인은 마음껏 숨 쉬기도 두려운 탁한 공기를 마시며 오염된 물을 들이키고 있는 게 아닌지 염려하며 살아간다. 가족의 식사를 준비하는 주부들은 혹시 광우병과 조류인플루엔자에 걸린 소와 닭고기, 방사능에 오염된 생선과 미역, 유전자 조작된 식품을 구입한 것은 아닌지 걱정을 떨치지 못한다. 이렇게 생존에 필수적인 공기와 물과 음식에는 예민하면서도, 지구의 환경에 대한 이야기에는 시큰둥한 것이 또 우리 모습이다. 신선한 공기를 만드는 숲이 얼마나 파괴되었고, 강과 바다의 생태가 얼마나 망가져가고, 동물들의 서식지가 어떻게 변하고 사막이 얼마나 늘어나고 있는지 별로 궁금해 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구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인간이 한층 풍요롭고 편리하게 살 수 있을지 골몰하는 데 온갖 지혜와 기술을 동원하고 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생각은 아직도 폐기되지 않았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당신을 닮은 인간을 지어내신 후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믿음.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의 이름을 짓고 잘 다스리라고 명하셨다는 확신. 이러한 믿음과 확신에 힘입어 하느님 자리에 올라선 듯 착각한 인간은, 세상만물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과 사랑을 저주와 파괴로 얼룩지게 만들어왔다. 자신이 하느님을 닮아 가장 우월하고 뛰어난 존재라고 믿고 있으나, 우리 인간은 예나 이제나 하느님의 자녀라기엔 너무나 큰 실수와 잘못을 연발하고 있다.

올 초부터‘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라는 생소한 병명으로 수백만 마리의 오리와 닭뿐 아니라, 철새들까지 살처분 하고 있다는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빽빽한 공간에 가둬 키워온 오리와 닭이 평소보다 세배쯤 더 죽어나간다는 보고를 듣고 감염을 확인한 후부터, 한 장소에 있다는 이유로 감염여부와 상관없이 예방 차원에서 몰살시키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마치 교실에 감기 걸린 학생이 한명 있다고 교실의 전체 학생을 퇴학시키는 것과 같은 조치다. 살처분 당하는 새들이 인간 먹이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과 똑같은 무게를 지닌 귀한 생명이라고 본다면, 과연 수십만 마리씩 강제로 생매장하다시피 할 수 있을까?

살처분에 동원되는 사람들의 고통 또한 심각하다고 한다. 살아있는 오리와 닭을 7~8 마리씩 자루에 담아 쌓은 더미에 비닐을 덮은 후 이산화탄소를 주입하여 죽이라는 농림축산식품부의 매뉴얼인 ‘AI 긴급행동지침’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멀쩡해 보이는 동물들을 살해하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의 고통에 시달린다. 죽지 않으려 퍼득거리고 비명을 지르며 공격하다가 끔찍하게 죽어간 오리와 닭들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머릿속에 맴돌아 식음을 전폐할 지경이지만, 정신병자로 낙인찍힐까봐 치료를 받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이 땅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으나 그 당연한 사실을 무시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우리 인간은 너무나 인간만을 위한, 인간만을 보는, 인간만의 삶에 사로잡혀 있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환경오염과 자연 파괴의 원인이 인간 자신에게 있다고 인정하는 듯하다가도, 그 오염과 파괴가 가져오는 끔찍한 결과에는 무책임하게 눈을 감고 외면한다. 우리 인간이 잘 살기 위해 한 일이므로, 지구 스스로 자정능력을 발휘하여 혹은 하느님이 당신 사랑의 손길을 펼쳐서 되돌려 놓으실 거라고 속 편하게 생각해버리고는 그만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밖에는 모른 체하는 탐욕과 이기심으로 자연을 돌이킬 수 없이 망가뜨리고 가엾은 오리와 닭들은 비좁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다. 그 무더기 떼죽음이 우리 인간의 몸과 정신과 영혼도 고통의 수렁으로 몰아넣는다는 사실에는 무관심한 채로 말이다.

인간이 잡아먹으려 열악한 상태로 키우다 죽이고 있는 그 생명들이, 사실 우리와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형제자매 같은 존재임을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800여 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도 인간과 똑같이 하느님이 사랑하는 피조물임을 깨달은 프란치스코 성인을 그들 역시 알아보고 친근하게 다가간 공감과 대화의 기록이 남아 있으니.

우리는 체험을 통해 알고 있다. 나 자신이 참으로 사는 길은 나와 함께 하는 이웃들을 아끼고 섬기고 돌보는 데 있다는 것을. 그 이웃에는 내 가족과 친척, 내 친구, 내 스승과 동료가 있다. 그리고 그 이웃에는 내 물건, 내가 머무는 공간, 내가 걸어 다니는 길도 있다. 또한 내가 바라보는 하늘, 내가 죽어 묻히거나 뿌려질 땅과 강과 숲도 분명 내 이웃이고 나를 살아가게 해주는 그분의 피조물이다. 이 모든 것이 없다면 나는 지금 이렇게 살지 못할 것이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나와 내 이웃을 들여다보고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몸과 정신과 영혼을 기울여 바라본다면 우리는 덜 울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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