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단짝 – 공통분모, 찾으면 꼭 있어요

김민수 신부, 황종렬

정규교육과정을 거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창’이 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누군가는 대학이나 대학원까지 함께 공부하며 학교에서의 삶을 공유한 동창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막상 동창 이상의 관계로 나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교실에서 워낙 여럿이 북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같은 전공이나 같은 관심사를 가졌더라도 졸업하고 나서까지 이를 나누고 공유하는 관계는 흔치 않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의 교사가 되고 싶었고, 그러려면 사람을 이해하고 하느님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 신학교에 입학한 한 청년. 신부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들어왔으나 달랑 두 문제로 8절 시험지를 채우는 것이 막막했던 이과 출신의 신학생. 동창이자 같은 동아리 활동을 했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라곤 없어 보이는 관계를 오랫동안 지켜가고 있는 황종렬 씨와 김민수 신부를 만났다.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신학교로 편입하면서 만났다. 당시 함께 공부하던 학년이 전에 없을 만큼 인원이 많았기에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 스쳐가는 인연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이 서로를 더 알고 이해하게 된 것은 사회학 연구모임을 시작하면서였다.

“신학교에서 사회학 연구모임을 했어요. 인원도 아주 소수였어요. 처음에 사회학을 공부를 누구랑 하면 좋을까 생각했죠. 그때 우리 신부님을 보게 된 거죠. 신부님이 밝고 성실하시거든요. 그렇게 함께 하면서 자연히 학부논문도 그런 쪽으로 쓰게 되었죠. 나는 사회과학 쪽 철학인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신부님은 세속화에 관련된 내용을 쓰셨어요.” (황종렬)

“사회학 하니까 신선하게 받아들여졌고, 이미 공부한 사람이 길을 잡아주니까 도움이 되었죠. 덕분에 세속화라는 주제에도 관심이 생기고, 미국에서 공부할 때까지 그게 이어졌어요. 나중에 보니까 제 논문이 많은 후배들에게 읽혀졌더라고요. 그때 책도 아직 갖고 있어요.” (김민수)

두 사람은 신학교 수업에 필요한 내용도 아닌데, 동아리 구성원들이 그렇게 열심히 참여할 수가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 성실함 때문에 공부하는 것이 아주 행복했다고. 그러나 동아리 시절이 끝나고 삶의 자리가 다른 사제와 평신도가 인연을 이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 비결이 궁금해졌다. 조심스럽게 그 비결을 묻자 황종렬 씨의 입에서는 신부님의 마음을 깊이 느꼈던 에피소드들이 쏟아져 나왔다.

같이 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평소처럼 황종렬 씨는 6시까지 도서관에서 있다가 나오는 길이었다. 배낭을 메고, 불편한 다리를 돕는 목발을 짚고 비를 맞으며 신학교 정문을 나서는 길에 당시 신학생이던 김민수 신부를 만났다. 황 씨가 비를 맞으며 집에 갈 생각에 걱정이 된 김 신부는 자신이 쓰고 있던 검은 우산을 내밀었다. 그러나 목발을 짚고 가는 이에게는 우산을 들고 갈 손이 남아 있지 않았다. 황 씨는 “내가 그걸 입으로 물고 갈까?”하며 얼른 올라가라고 하고 가던 길을 갔다고 한다. 김 신부는 얼마나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했는지 깨닫고 매우 부끄러웠다고 했지만,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황종렬 씨는 김민수 신부에게 받은 선물이 많다고 했다. 김 신부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활 씨가 학교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학교에서 받아주지 않을까 조심스러워 신청하지 않은 장학금을 도리어 학교에서 신청하라고 제안해왔으나, 그에 따르는 여러 문제를 한국에서 해결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바로 그때 학교와 직접 연결하여 문제를 해결해준 이가 바로 김 신부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난했던 유학생 시절, 먼저 공부를 마치고 들어 온 김 신부에게 소식을 전하던 황 씨는 치료비가 비싸 치과에 가지 못하고 있는 아내의 이야기를 우연히 했다. 그 메일을 받아 본 김 신부는 바로 전화를 걸어 비행기 티켓을 보낼 테니 바로 들어오라고 했다. 덕분에 무사히 치료를 받고 미국으로 돌아왔다며 지금까지도 너무나 감사하다는 황 씨의 이야기에 김 신부는 쑥스러운 듯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러면서도 황 씨가 연구자로서 지원과 인정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야기했다.

“(황종렬 씨가) 아시아 신학, 민중 신학, 제3세계 신학의 번역을 많이 했는데, 그건 그런 분야에 환하다는 의미죠. 그런 분야에 환한 사람이 김수복 선생님이나 성염 선생님 이후에 참 드물었어요. 이런 평신도 신학자가 존재한다는 게 그 자체로 축복인데 잘 활용을 못해요. 그럼에도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들여 연구하고 있는 거 보면 대단하죠.” (김민수)

이렇게 주고받아 온 마음들 덕분인지, 미국에서 공부하고 와서도 두 사람의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김민수 신부가 먼저 황종렬 씨에게 강의를 청하기도 하고, 황 씨도 김 신부를 통해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고 했다. 김 신부를 만나서 “신학은 곧 커뮤니케이션”이라 말하는 것이 얼마나 쉬워졌는지 모른다고도 했다. 서로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공부하는 분야가 달라도 서로 관심을 가져주고,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로 가득한 대화를 듣고 있자니, 바로 그것이 관계 유지의 비결이자 기쁘게 공부하는 비결이 아닐까 싶었다.

“실은 학문이란 게 삶 안에서 다 연결이 되는 거죠. 하나를 이야기 하면 다 연결이 돼요. 교실에서는 그걸 다 분리시켜서 어디에 쓰는 건지도 모르고 추상적으로 배우지만, 삶에서 보면 통교가 되고 소통이 되는 거죠. 난 커뮤니케이션 신학을 했는데, 결국 하느님의 커뮤니케이션이 그 자체로 신학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서로 영향 받지 않을 수 있겠어요.” (김민수)

“학문적으로 계속 교류해왔고, 서로 연구하는 걸 계속 지켜보면서 필요할 때마다 이야기를 나눴어요. 물론 아무리 좋아도 사람이니까 서로 다른 부분이 있는데, 서로 다르지만 함께 하게 되는 공통분모도 찾으면 꼭 있어요. 함께 하는 사람이란 게 하느님이 보내주신 선물인데, 내 눈으로 보면 이렇고 저렇고 해도 사람에게 등지면 안 되죠.” (황종렬)

이 시대에 신학을 하는 것도, 함께 공부하는 사람도, 서로 다른 분야를 공부한 것도 모두 선물이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그저 담담했다. 조금의 꾸밈도 없는 목소리에서 삶과 관계에 대한 확신이 느껴졌다. 인터뷰 이후 서로의 안부를 다정히 물으며 사진 촬영에 응하는 두 사람의 오랜 시간의 한 조각을 엿들었을 뿐이지만, 함께 배우는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같은 관심사나 연구주제가 아니라 그저 한 인간으로서 서로에게 쏟는 진심어린 마음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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