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사회운동 다시 보기 – 1980년대 평신도의 사회 참여를 둘러싼 갈등과 통제

경동현(우리신학연구소 소장)

1980년대 평신도의 사회 참여를 둘러싼 갈등과 통제

평신도가 “세속사회 안에 머물면서 인간 구원과 현세 질서의 개선을 이루도록 부름 받았다”는 메시지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거듭 표명되었다. 그만큼 사회참여 영역에서 평신도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한 것이다. 교회 안에서 사회참여의 역할을 일차적으로 수행한 것은 주교회의나 교구장의 지시에 의해 설치된 공식 기구 조직들이다. 정의평화위원회, 인성회(사회복지위원회), 노동사목위원회, 빈민사목위원회, 농민사목부, 민족화해위원회, 환경사목위원회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가톨릭노동청년회와 가톨릭농민회, 가톨릭대학생연합회 등의 인준된 평신도사도직 단체들이 있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천주교인권위처럼 주교회의나 교구장 지시와 상관없이 평신도나 사제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단체들도 있다.

교회 공식 기구의 경우 교구장이나 담당 주교의 직접적 통제 아래 있으며, 평신도 실무자들의 도움을 받지만 조직의 책임자는 주교이거나 신부이다. 평신도사도직 단체 역시 평신도 주도성이 두드러지긴 하지만 지도신부를 통해 ‘지도’ 내지 ‘통제’를 받는다. 주류 교회 구조의 경험이 수직적인 성직자-평신도 관계인 것과 달리 사회사목 분야에서는 상대적으로 평등한 성직자-평신도 관계가 자주 생겨났다. 이는 교회 전체로 볼 때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사회사목 분야에서 생겨난 수평적 교회문화가 지배적인 교회문화와 성직자-평신도 관계를 변화시킬 가능성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오히려 두 영역 사이의 이질성이 너무 커질 경우에는 이 격차를 다시 좁힘으로써 교회의 조직적 통합을 높이기 위한 교회 상층부의 개입과 통제가 강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움직임은 1980년대 말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예컨대 창립 이래 평신도 중심체제로 운영되어 온 정의평화위원회가 1987년 말에 성직자 중심체제로 개편된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를 계기로 정의평화위원회의 사회적 발언은 빈도가 감소하고 더욱 신중해졌을 뿐 아니라, 활동의 일차적인 초점도 환경문제나 생명윤리문제 등 좀 더 온건한 영역들로 전환되었다. 교회 인준을 받은 전국과 교구 수준의 위원회나 기구들의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상당수의 자발적 평신도 단체들이 재정 문제를 비롯한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교구장이나 주교회의의 인준을 굳이 받지 않으려는 까닭도 대체로 지도신부의 권위주의적 개입을 꺼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80년대 말부터 이들 평신도사도직 단체들은 물론이고 ‘비공인’ 단체들에도 상당한 위로부터의 통제가 가해졌다. 주교들 혹은 고위층 신부들의 관심은 우선 전국적 조직망을 가진 평신도 사도직 단체들에 대해 개별 교구 단위의 통제를 강화하여 적어도 몇몇 교구들에서 활동을 위축시키거나 반대세력을 육성함으로써 전국 차원의 활동을 전반적으로 약화시키는데 있었다. 또한 비판적 사회참여에 과도하게 적극적인 단체들에 대해 공개적인 경고를 하거나 필요하다면 지도부를 교체함으로써 활동 방향의 온건화 내지 전환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주교들의 통제 밖에서 활동해온 단체들에 대해서는 통제권 내로 편입시키거나, 지지철회 공개적 비난, 교회 밖으로의 축출 등의 방식으로 무력화하고, 신자 일반에 대한 이 단체들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7년 3월 주교회의가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협의회와 한국가톨릭농민회의 회칙 승인을 취소하면서 잠정적으로 활동정지를 명령함과 동시에 전국가톨릭대학생총연맹에 대해서는 주교회의가 인정한 바 없음을 분명히 밝혔던 일, 그리고 당시 주교회의 사무처가 이례적으로 이런 결정을 담은 보도자료를 언론사들에 돌렸던 일, 비슷한 시기에 명동성당 사제들이 천주교 청년운동의 대표 격이던 명동성당청년단체연합회에 대해 활동정지 처분을 내렸던 일, 1989년 여름 문규현 신부의 방북을 계기로 주교회의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대해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한 일 등은 진보적 단체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교회 고위지도자들의 의중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1987년 주교회의 봄·가을 정기총회의 주요 결정 내용을 좀 더 살펴보자.

통제의 정점이었던 1987년 주교회의 정기총회

1987년 봄의 결정은 평협, 가농, 가톨릭노동청년회, 전협 등 전국 단체를 교구 단위로 환원시키고 전국 기구로서의 명칭과 운영방법을 폐지할 것을 결정했던 1978년 1월의 주교회의 상임위원회 결정을 사실상 거의 그대로 반복한 것이다. 1978년 주교회의 상임위 결정은 평협 등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주교회의 총회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음으로써 불발에 그치고 말았지만, 거의 같은 내용이 근 10년 만에 주교회의 총회의 공식 결정사항으로 발전한 것이다.

1987년 춘계 주교회의 정기총회에는 모두 17명의 주교들이 참석했다. 당시 주교회의 의장은 김수환 추기경이었고, 부의장은 윤공희 대주교, 총무는 김남수 주교였다. 평협·가농의 활동 중지와 총연맹 해체 여부를 담은 문제의 안건과 관련해서는 김남수 주교가 사회를 보았는데, 이를 둘러싸고 주교들 간에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여기서 가농의 담당주교인 정진석 주교는 천주교 신자가 아닌 회원의 배제를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이 회의에서는 당시 평협담당주교를 맡았던 김남수 주교, 대학생회 담당주교를 맡았던 이문희 대주교 역시 해당 단체들의 활동중지 내지 해체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한편 이 결정에 반대했던 주교들은 ‘현대교회에서 평신도의 역할이 증대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들 단체의 활약을 교도권의 이름으로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 더더욱 이 시점에서 그같은 결정을 내리면 교회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물의나 오해를 야기 시킬 우려가 높으므로 시기적으로 적절치 못하다’는 반론을 편 것으로 전해진다. 논쟁이 계속되자 이례적으로 투표를 통해 이 안건을 처리하게 되었는데, 결국 다수의견으로 평협·가농의 활동 중지와 총연맹 해체 방침이 통과되었다. 당시 「서울신문」은 사설을 통해 당시 주교들의 찬반 표결이 “11대 6”으로 갈렸다고 주장했다. 이런 표결 결과에서 보듯이 사회참여를 지지하는 진보적 주교들이 주교회의 내에서 ‘소수세력’으로 몰려 있는 상황이 단적으로 나타난다. 어쨌든 1987년 봄의 주교회의 결정은 주교회의 내의 세력분포 변화, 그리고 주요 사회운동 단체들에 대한 보수 성향 주교들의 직접적 통제력 등 교회내 사회운동 단체들에 대한 적극적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일련의 변화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1987년 춘계총회에 이어 그 해 가을에 열린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는 정평위의 규약이 대폭 개정되었다. 변화의 핵심은 조직과 활동방향을 재규정한 데 있었다. 더욱이 이 결정은 당시 정평위 담당주교였던 윤공희 대주교, 회장이던 이돈명 변호사와의 아무런 사전 협의 없이 전격적으로 내려진 것이다. 우선 조직의 측면에서, 이전까지 평신도가 맡아왔던 조직의 대표직을 주교로 바꾸고, 역시 평신도가 맡아왔던 ‘사무국장’을 ‘총무’로 바꾸면서 이 자리를 신부로 임명하는 것으로 변화를 도모했다. 정평위는 창립 이래 당시까지 평신도가 회장, 부회장(2인 중 1인), 사무국장을 맡고, 신부가 부회장(2인 중 1인)을 맡는 체제로 운영되어왔다. 또 담당주교도 대부분의 주요 결정을 회장단이나 위원들에게 일임하는 방식으로 평신도의 주도성을 인정해왔다. 그런데 이런 ‘평신도 중심 체제’를 ‘성직자 중심 체제’로 바꾼 것이다. 아울러 교회의 사회 참여를 지지해온 윤공희 담당주교가 물러나고, 보수 성향의 박정일 주교가 새로운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활동 방향의 측면과 관련하여, 회의에서는 “그간의 정평위 활동이 일부 주교들에 의해 전면 비판”되었고, 주교들은 이런 맥락에서 정평위의 성격과 활동반경을 “연구기관”으로 전환 내지 축소했다. 주교회의의 이러한 결정은 이제 막 기반을 다져야 할 상황에 놓여있던 평신도 사회운동에 큰 부담을 주었고, 내부적으로도 활동가들을 충원하고 양성하는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침체의 시기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우리사회 민주화의 원년으로 기억되는 1987년이 평신도 사회운동에는 침체의 시작을 알리는 해였다는 사실은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3월호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