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인물 열전 – 이승은 ‘영원’ 향해 걸어가는 길목일 뿐 영원 속의 오늘을 시로 노래한 시인, 구상-3

한상봉

이승은 ‘영원’ 향해 걸어가는 길목일 뿐

영원 속의 오늘을 시로 노래한 시인, 구상-3

구상 시인이 이승에서 지낸 한 생애는 천국도 지옥도 아니었다. 영 기분 좋은 곳도 영 기분 나쁜 곳도 아니었다. 그저 “일상은 계속 된다.”는 것이고, 여기서 만난 이들과 이런저런 인연을 엮고 자잘한 기쁨과 후회 속에서 ‘영원’을 향해 걸어가는 길목일 따름이다. 그에게 붙는 미사여구는 ‘구도자’요 ‘예언자’요 ‘스승’이요 ‘자유인’이요 ‘위대한 휴머니스트’라는 엄청난 딱지들이었지만 정작 구상 자신은 자기 영혼의 참담함을 자주 드러내 보였다.

2004년 5월 11일 84세로 이승을 하직한 시인 구상은 자신의 임종을 고백하며, 여전히 남은 것은 회한뿐이라고 했다.

나는 한평생 내가 나를 속이며 살아왔다 .

이는 내가 나를 마주하는 게 무엇보다도 두려워서였다.

나의 한 치 마음 안에 천 길 벼랑처럼 드리운 수렁

그 바닥에 꿈틀거리는 흉물 같은 내 마음을

나는 마치 고소 공포증 폐쇄 공포증 환자처럼 눈을 감거나 돌리고 살아왔다.

실상 나의 지각만으로도 내가 외면으로 지녀 온

양심, 인정, 명분, 협동이나 보험에나 들 듯한 신앙생활도

모두가 진심과 진정이 결한 삶의 편의를 위한 겉치레로서

그 카멜레온과 같은 위장술에 스스로가 도취마저 하여 왔다.

더구나 평생 시 쓴답시고 시어 조작에만 몰두했으니

아주 죄를 일삼고 살아왔달까!

그러나 이제 머지않아 나는 저승의 관문, 신령한 거울 앞에서

저런 추악 망측한 나의 참모습과 마주해야 하니 이 일을 어쩌랴!

하느님, 맙소사!

(구상, 임종고백)

박정희가 집권하고 나서, 시인 구상은 오히려 더욱 시 작업에 매달려 살았다. 그러나 시에 집착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상을 사랑하고, 가족은 물론 일상에서 만난 사람들을 아끼고, 그 일상에서 오히려 깊은 하늘 뜻을 헤아리고 애썼다. 그의 절친들은 화가 이중섭, 시인 공초 오상순,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선구자이자 ‘어린이 헌장’의 기초자인 마해송, 걸레 스님 중광 등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기인이어서 구상은 그 시대의 아웃사이더들과 사귀는 즐거움을 알았다. “모두 규격품만 있으니까 재미가 없잖아. 비규격품인 기인들은 재미없는 사회에 재미도 주지만 거리에 청량감을 주는 살수차 역할도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이중에서 이중섭과의 우정은 남달랐다. 구상의 서재에 늘 걸려 있던 그림은 이중섭이 담뱃갑의 은박지에 연필로 그린 천도복숭아 그림이다. “왜 어떤 병이든지 먹으면 낫는다는 천도복숭아 있지 않아. 그걸 먹고 우리 상(常)이 어서 나으라는 말씀이지.”하며 이중섭은 구상 시인이 폐 절단 수술을 했을 때 병원에 찾아와 이 그림을 던져 주고 갔다. 구상은 이중섭이 전해 준 천도복숭아 그림을 보고 ‘이게 바로 영성체’라고 말한다.

구상에겐 ‘입버릇’에 대한 재미난 글도 있다. 한국전쟁 때 일인데, 이계환 공군대령이 “세상 못마땅한 일을 보거나 들으면 언성을 높여 ‘저런 죽일 놈’하고는, 깜짝 놀라는 상대에게 이번엔 아주 상냥한 음성으로 ‘노래 한마디 부르겠습니다’라고 하여서 크게 웃겨 고약한 우리 심정을 달래곤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구상 시인 역시 그분의 입버릇이 부지중(不知中) 옮아서, “행길에서도 저런 죽일 놈, 버스에서도 저런 죽일 놈, 모임에서도 저런 죽일 놈, 심지어는 성당에서도 저런 죽일 놈, 매일 저녁의 신문을 읽다가는 저런 죽일 놈” 남의 귀에 들릴 정도는 아니지만 때도 곳도 가리지 않고 연발했다. 구상 시인은 “이 말이 씨가 된달까, 저런 증세가 날로 심해지면서 이번엔 내 마음속에 소리 안 나는 총이 있으면 정말 없애고 싶은 사람이 하나 둘 불어나고 그 욕망이 구체화 되어서 집단살인도 자행(恣行)할 기세라, 이 밑도 끝도 없는 살의에 스스로가 놀라게끔 되었다.”고 하는데, 이 말 끝에 하는 말이 “노래 한 마디 부르겠습니다.”였다고 한다. 이 말이 엉뚱한 후렴(後斂) 뒤에 ‘해독제’였음을 구상은 깨달았다. 그래서 “나도 ‘저런 죽일 놈’ 소리가 나오면 애송시 한 편이라도 읊어서 비록 마음속일망정 살인은 안 해야 겠다.”고 말했다.

구상의 시편이 하도 많지만, 그중에서 오히려 더 와서 닿는 것은 산문시다. 관상적이고 함축적인 시어보다는 구상의 남다른 시선을 더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을 담은 ‘다듬이’라는 시에서는, 구상 집에 세 들어 사는 독신녀로 수도원 세탁부 노릇을 하고 있는 청상과부 이야기다. 늦둥이 구상은 노부모 슬하에서 무상으로 그녀 방에 출입하고 잠도 자고 올 때가 있었다. 그런 어느 가을 밤 다듬이질하는 그녀 곁에서 놀다가 잠이 들었다. 한밤중 눈을 뜨니 그녀는 아직도 똑딱거리고 있었다. 구상이 “아줌마 안 자?” 하고 돌아누웠더니 등 뒤에서 “응, 가슴의 불을 끄고서!”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구상은 “그때 그녀 가슴 속의 불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찌 끈다는 것인지 그 뜻을 알 바 없었으나 그 말만은 내 머리 한 구석에 박혀 있다가 이렇듯 잠 안 오는 달밤이면 또렷이 떠오른다.”고 썼다. 이 묘한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는 게 시인이 아닐까, 한다. 구상은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다.

구상의 대표작들은 박정희 정권 시절에 집중적으로 저술되었는데, 일본 체류 중에 완성해 <한국일보>에 연재한 ‘밭일기’ 100편을 포함해 신앙에세이 『그리스도 폴의 강』, 『나자렛 예수』가 출간된 것도 이 때였다. 『영원 속의 오늘』, 『우주인과 하모니카』라는 시집이 출간된 것도 이 때였다. 정치적 끄달림에서 벗어나 관상적 세계로 몰입하던 때였다. “나의 심신의 발자취는 모과 옹두리처럼 사연투성이”였다는 구상은 그래도 “오직 보이지 않는 손이 이끌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고 했다.

구상이 어려서부터 살던 왜관을 떠나 한강이 보이는 여의도에 살게 되면서 작은 아파트 서재를 ‘관수재(觀水齋)’라 부른 것처럼, 시인은 “그리스도 폴! 나도 당신처럼 강을 회심의 일터로 삼습니다”라고 썼다. 이어 “당신의 그 단순하고 소박한 수행을 흉내라도 내 가노라면, 당신이 그 어느 날 지친 끝에 고대하던 사랑의 화신을 만나듯, 나의 시도 구원의 빛을 보리라는 그런 바람과 믿음 속에서 당신을 따라 강에 나아갑니다”라고 적었다. 구상에게 강은 인생의 배움터였다. “강은/과거에 이어져 있으면서/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강은/오늘을 살면서/미래를 산다./…/강은/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가장 낮은 자리를 택한다.//강은/그 어떤 폭력이나 굴욕에도/무저항(無抵抗)으로 임하지만/결코 자기를 잃지 않는다.(강 16)”

수행자처럼 시를 쓰던 구상에게 오늘은 추하지만 오늘에 영원을 담겨 있기에 늘 희망을 준다. 거듭 절망하고 거듭 희망을 품게 해서 고마운 것이 또한 ‘신앙’이었다. 구상은 ‘고백’이란 시에서 “어느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하고 읊었지만, 나는 마음이 하도 망측해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고 어쩌구커녕 숫제 두렵다. 일일이 밝히기가 민망해서 애매모호하게 말할 양이면 나의 마음은 양심이 샘이 막히고 흐리고 더러워져서 마치 칠죄의 시궁창이 되어 있다.”고 거듭 아뢰면서 “주님! 저를 이 흉악에서 구하소서. … 하지만 이 참회가 개심으로 이어질지를 나 스스로가 못 믿으니 이를 어쩐다지?” 한다. 이 회한을 넘어서기 위해 ‘오늘’이라는 시에서는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오늘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삶은 ‘어느 골목 가로등’이란 시에서, 호젓이 은은하게 길을 비추고 서 있는 ‘가로등’처럼 “어두운 우리 삶의/ 어느 한 구석이나마 밝히고 싶다”는 고백으로 이어진다. 그는 겸손하고, 현실에 민감하면서 그 현실을 넘어서는 법을 배우다 이승을 하직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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