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복음 –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배안나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긴 시간동안 유혹을 받으신다. 굳이 한 달 하고도 열흘을 헤아리지 않아도 40일이란 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겨울방학을 떠올려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유혹 직전, 예수님께는 아주 멋진 일이 있었다. 바로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예수님도 남자였으니, 그에게도 ‘아버지’의 인정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리라. 남자의 성장과정에서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아버지란 존재를 극복했을 때 진정한 성인 남자가 되는 것이라고 어느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태중 아기였을 때부터 알고지낸 형님과 감동스런 교통정리를 마친 후, 기다렸다는 듯이 아버지 하느님이 아들 예수의 손을 잡고 간 곳은 광야였다. 그것도 무언가 꽉 찼던 그의 속을 다시 텅텅 비워버리고.

21세기 대한민국 ‘아줌마’의 마음으로 이 구절을 들여다보면, 누구라도 유혹자가 되는 건 정말 순식간이다. 너무한 것은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유혹인지 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내 아이가 아니라고 해도 배고파 보이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고 싶고, 누구보다도 내 아이가 건강하고 뛰어났으면 좋겠고, 누구보다도 내 아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지닌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마다할 부모가 있을까? 더군다나, 혼자 있는 내 아들 옆에서 소근 대는 이 존재는 성경 구절까지 인용해가면서 이렇게 해도 괜찮다는 느낌까지 준다. 이렇게 해도 큰 잘못은 아니다, 이렇게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너는 쉽게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내가 내 몸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내가 내 시간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넘쳐나는 요즘, 무엇이 유혹이고 무엇이 참말인지 구분하는 것도 일이다.

예수님은 ‘나’를 잃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미 몸과 마음에 하느님과 일치된 그 순간의 모든 것을 아로새겼고, 왜 내가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지 그분께서는 알고 있었을 것 같다. 그러니 그런 대답을 척척 하시지. 예수님은 유혹자의 정체가 사탄인 것도 밝혀내고 그를 내친다. 그리고 천사들의 시중을 받는다. 유혹과 시련을 극복해낸 사람에게는 몸과 마음의 평화, 그 이상의 것이 기다리고 있다. 예수님은 광야를 벗어난 이후, 자신의 할 일을 척척 해 나가기 시작한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이때 예수님이 몇 살이었을까 생각해 봤다. 예수님이 실제로 30대 초반까지 사셨다고 하니까 20대 후반 그 즈음이 아니었을까. 이 구절을 접하는 내 삶의 자리마다, 광야의 느낌이 많이 달라졌다. 성당 마당에서 뛰어노는 게 더 좋았던 초등학생 시절엔, 엄청 덥고 풀 한포기 안 자라는 자갈밭 같은 곳에서, 뿔 달리고 못생긴 악마가 잘생기고 착한 예수님 옆에서 치근덕대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10대로 접어들고 길고 긴 고3을 보내며 대학만 가면 천국이 도래할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토록 기다렸던 20대가 되었지만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광야 한 복판이었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무얼 하며 살아야 하는지 정처 없이 헤매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괴로웠고, 바다 한 복판 섬 같은 외로움을 경험했다. 지금도 삶이 광야 같다는 생각은 달라진 것이 없다. 다만 내가 누구인지 아는 순간, 남의 정체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광야 한복판에서 천사도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거기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라는 것을 알 것 같은, 그런 나이가 되었다. 젊고 예쁜 것만 좋다고 하는 이 세상에서, 젊고 예쁘지 않은 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건 분명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힘들어하는 아이들의 뒤에는 반드시 그 문제를 제공한 사람은 부모가 있다. 우리의 바람과 상관없이, 부모도 유혹자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홀로 광야에 들어서는 아이의 뒷모습을 지켜봐야 한다는 점에서 이 구절은 부모인 내게 많은 것을 일깨워준다. 그렇다. 부모는 대신 살아주는 사람이 아니다. 어느 순간 삶의 광야를, 홀로 걸어 나와야 성장한다. 나 역시 그랬고, 내 자식도 역시 그런 과정을 통해 온전한 한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요즘은 힘든 그 무엇도 용납하지 않는 시대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내가 겪었던 그 힘듦을 내 아이는 겪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늘 아이들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건 아닌 것 같다.

글을 쓰면서 ‘광야에서’ 노래가 계속 맴돈다. 이 글을 다 마치면, 아들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려고 한다. 내 자식에게 유혹자가 되고 싶은지, 광야로 손잡고 이끄는 사람이 되고 싶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아들의 손을 잡고 광야로 이끄신 분께서 그 전까지 무엇을 하셨는지도 꼭 잊지 말아야겠고. 삶의 통과의례를 지나온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말없이 꼭 안아줄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면 좋겠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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