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복음 – 정화와 변모, 희망과 두려움

지요하

정화와 변모, 희망과 두려움

묵주기도 ‘빛의 신비’ 제4단을 바칠 때는 묘한 두려움과 희망을 동시에 떠올리곤 한다.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심을 묵상합시다.’라는 지향을 외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와 함께 특이하게도 ‘연옥의 불’을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신 다음 그들에게 자신의 변한 모습을 보여주셨다.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얗게 변했다. 과거에 사용했던 공동번역 성서에는 ‘세상의 어떤 마전장이도 그렇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새하얗게 변한 모습’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예수님의 그런 변모는 ‘정화’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예수님의 그런 변모는 목격자들인 세 분 사도를 비롯하여 성서를 통해 그 사건을 접하는 사람들에게나 ‘변모’일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변모를 한 게 아니라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셨을 뿐이다. 그렇게 몸소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확인시켜 주셨지만, 그것만으로 변모의 의도가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변모, 즉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정화’의 의미를 선사해 주셨다.

인간은 그 누구도 정화되지 않고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의 그 모습처럼 새하얗게 변해야 구원의 문 안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정화에 정화를 거듭해야만 예수님의 그 모습처럼 새하얀 모습이 될 수 있다.

이 세상에 정화가 필요 없는 인간은 없다. 성인으로 추앙받는 분들도 하나같이 정화의 과정을 끊임없이 거치신 분들이다. 주님을 증거하며 순교의 화관을 쓰신 분들도 곧바로 100% 천국으로 가신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순교 직전 어떤 분은 변심을 겪었을 수도 있다. 휘광이의 칼을 받기 직전 배교의 마음을 갖게 되었으나, 그 마음을 표현하기 전에 휘광이의 칼을 받아 목이 떨어진 경우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 경우 그 순교자 역시 사후의 정화가 필요하다.

인간은 이 세상에 살면서 정화를 완성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순교자들을 비롯하여 성인품에 오르신 분들 모두가 100% 정화를 이룬 상태로 삶을 마감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정화의 여지를 안고 세상을 떠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선종했을 때도, 마더 데레사 수녀가 선종했을 때도 그의 영혼을 위해 연도를 바쳤다.

정화의 여지를 안고 세상을 떠난 영혼은 가톨릭교회가 ‘정화교회’로 부르는 연옥에서 정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정화 과정에 대해 나는 색다른 생각을 해본다. ‘연옥의 불’에서 기인하는 생각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수만 가지 사리들과 술법들을 베푸셨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연금술’이다. 불로 쇠붙이를 녹이고 달여 순금을 얻어내는 방법이다. 그것을 일러 단련이라고 한다. 단련을 하고 또 하고 제대로 해야만 순금을 얻을 수 있다.

연옥에서 정화의 과정을 제대로 거쳐야 순금과도 같은 단련의 결정체가 나온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새하얀 모습이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연옥에서 나와 예수님을 뵈올 수 있다. 그리고 연옥에서의 정화 과정은 이 세상에서 정화의 여지를 얼마나 안고 가느냐에 따라, 또 얼마나 지상교회의 도움을 받느냐에 따라 길이가 달라진다.

이런 생각들을 하기에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접할 때마다 ‘정화’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고, 희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게 되는 것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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